23. 후일담
느지막이 일어난 두 사람은 서로의 몸에 기댄 채 창밖에서 들어온 일광을 나누어 쬈다. 에이든은 살며시 레인디아의 배에 손을 얹었다. 레인디아도 그의 손등에 손바닥을 포갰다.
“지금은 자나 봐요.”
“우릴 닮아서 늦잠꾸러기네.”
아직 잠에 취해 있는 에이든의 목소리에 레인디아는 후후 웃었다. 그녀의 배는 나날이 봉긋하게 부풀었다.
“가슴은 좀 어때?”
“오늘은 괜찮아요.”
에이든은 손바닥으로 레인디아의 밑가슴을 부드럽게 감싸 올렸다. 젖가슴은 모래주머니를 든 것처럼 묵직했다. 아이를 밴 후 가슴에 점점 살이 붙더니 어느새 밑으로 살짝 처질 만큼 커졌다.
“젖이 돌기 시작하면 더 커질 거야.”
“……여기서 더요?”
레인디아는 깜짝 놀랐다. 지금도 흘러넘칠 만큼 커진 가슴 때문에 자다가 눌리는 기분이 들어 종종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런데 더 커질 거라니. 하지만 걱정이 되진 않았다. 에이든이 마사지를 해 주면서 통증이 확연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본격적으로 모유가 나오면 젖몸살이 시작될 테지만.
“걱정 마. 매일 부드럽게 마사지해 줄 테니.”
오늘도 어김없이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슬립을 벗겨냈다.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가슴에 등을 기댄 채 편안히 젖가슴을 맡겼다.
에이든은 엄지로 겨드랑이 쪽을 빙글빙글 돌리며 서서히 유륜 쪽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잠자는 동안 뻣뻣해진 지방 덩어리는 에이든이 몇 번 어루만진 것으로 손바닥 안에서 부드럽게 흘러넘쳤다.
“으음.”
“시원해, 디아?”
“네.”
레인디아는 눈을 감은 채 웃었다. 에이든도 그녀를 따라 웃으며 뺨에 쪽 입을 맞췄다.
“……에이든.”
“응?”
레인디아는 손가락으로 수줍게 유두를 가리켰다.
“여기도, 부탁드려요…….”
“아아. 그래 이쪽도 풀어줘야지.”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겨드랑이 사이로 쑥 상체를 들이밀었다. 그러곤 그대로 고개를 돌려 유두를 한입에 물었다. 아이를 밴 이후 유륜이 동전 크기만큼 커지고 색도 짙어졌다.
“으응, 아, 아……!”
에이든은 입술로 유두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마치 이가 나지 않은 아이에게 젖을 물린 기분이었다. 레인디아는 자꾸만 열감이 올라오는 허벅지를 비비 꼬며 신음을 참았다.
‘아이에게 젖을 줄 때도 이런 기분이 들면 안 되는데……, 하지만, 기분 좋아.’
“흐으…….”
쫍. 쪼옵. 쫍.
이윽고 에이든이 볼을 한껏 오므리며 나오지 않는 젖을 빨아 댔다. 정말로 아이처럼 빨기로 작정을 한 것인지, 나오지 않는 젖에 투정을 부리듯 혓바닥으로 젖꽃판 여기저기를 찔러대기까지 했다. 어쩌면 유아 시절 충족하지 못한 욕구를 이렇게 해소하는 건지도 몰랐다.
“으, 아……?”
그 순간, 가슴이 찌르르 저려 왔다.
유두 구멍 밖으로 무언가 삐죽 흘러나왔다. 초유였다. 에이든은 혓바닥에 떨어진 한 방울을 녹일 듯이 입 안에서 굴렸다. 첫젖의 맛은 아찔할 정도로 달콤했다.
“응, 아아, 에, 에이든……!”
에이든은 레인디아를 바르게 눕히더니 배가 짓눌리지 않게 조심스레 그녀의 몸을 가두며 젖을 빨아 댔다. 하지만 착각을 한 걸까 싶을 만큼 모유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푸우.”
에이든은 퉁퉁해진 유두를 뱉어냈다. 그리고 살며시 가슴을 움켜쥐고 착유하듯 위로 쭉쭉 잡아당겼다. 그러자 유두 끄트머리에 희뿌연 액이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한계까지 차오른 젖물이 흐르기 직전 에이든이 꼭지에 입을 맞췄다.
쭈우웁.
에이든은 오늘 작정하고 젖길을 트려는 건지 젖꼭지를 뽑아낼 기세로 빨아들였다.
“아, 아아……!”
레인디아는 번쩍 눈을 떴다. 상체에 뿌리를 내린 젖샘을 타고 젖은 물론이고 몸 안의 모든 수분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 쥐어짜이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레인디아는 에이든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두 팔로 그의 머리를 감싸 잡아당겼다. 에이든의 오뚝한 콧날이 풍만하게 살이 오른 젖가슴을 푹 찔렀다.
“후우.”
숨을 들이켜자 은은한 젖내가 솔솔 풍겼다. 에이든은 젖을 주물럭거리며 혓바닥을 튕겨 본격적으로 유두를 자극했다. 계속된 자극에 조록, 조록 흐르는 모유가 봇물 터지듯 넘쳐흘렀다.
‘젖이, 나오고 있어.’
레인디아는 달달 떨며 생각했다. 한 번 젖길이 터지자 쌓여 있던 모유가 시원하게 배출되는 감각에 온몸이 나른해졌다. 뻐근하던 느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우리 아이는 금방 살이 찌겠어.”
에이든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가 속삭일 때마다 입술 밖으로 고소한 모유 향이 흘러나왔다.
“……네?”
“이렇게 맛있는 젖을 거부할 아이는 없을 테니까. 자꾸 넘어가.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져.”
에이든은 오늘치 모유를 전부 뽑아낸 젖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남아 있는 또 다른 젖가슴을 보며 탐욕스레 입맛을 다셨다.
“여기도 뚫어놓자.”
“흣……!”
에이든은 하압 입을 벌려 반대쪽 젖을 물었다. 요령이 붙은 건지 젖샘이 자극될 만한 곳을 유난스럽게 조물댔다. 이윽고 흘러넘친 모유가 혓바닥을 적셨다.
“으응, 하……!”
에이든은 나머지 가슴이 외롭지 않게 손톱으로 유두를 살살 긁어줬다. 레인디아는 젖을 배출하는 가슴으론 모성을, 손톱으로 애무 당하는 가슴으론 성욕을 느꼈다. 두 이질적인 욕망이 뒤섞여 질벽이 흠뻑 젖어 들었다.
“흐읏, 아, 에이드은…….”
레인디아는 애처롭게 남편의 이름을 중얼댔다. 에이든이 화답하듯 젖을 쭉 빨아들였다. 아이를 위해 만들어진 모유는 한 방울도 남지 않고 아비의 배를 채워줬다.
“하으, 하아, 하…….”
레인디아는 아무렇게나 두 팔을 뻗은 채 허덕였다. 에이든이 젖길을 뚫었으니 이제 매일 젖이 나오는 걸까? 그리고 에이든이 매일 제 젖을 먹어주겠지. 레인디아는 가물가물 가라앉는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하지만 몸이 축 처지는 와중에도 사타구니에서 퍼지는 열감은 선명했다.
“에이든…….”
레인디아는 가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느라 바빠 보이는 에이든을 불렀다. 제 암컷의 부름에 에이든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응. 디아.”
표범처럼 날렵하게 올라온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비볐다. 키스를 하려는 듯한 움직임에 레인디아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한껏 달아오른 성욕은 고작 입맞춤으로 충족되지 않았으니까.
“……하, 하고 싶어요.”
“응?”
에이든이 스르륵 눈을 떴다. 이윽고 붉은 눈동자가 달처럼 기울었다.
“하고 싶다니?”
에이든이 빙글빙글 웃으며 되물었다.
“……배 속이 허전해요.”
“이렇게 부풀었는데도 허전해? 쌍둥이라도 만들어줘야 하나?”
“읏, 그런 의미가 아닌 거……, 아시잖아요.”
레인디아는 투덜거리다 픽 고개를 돌렸다. 에이든은 후후 웃으며 돌아간 얼굴을 바로 잡았다.
“젖이 나오니까 흥분돼? 아니면 젖을 주면서 흥분한 거야?”
“……모르겠어요. 몰라요, 그런 거.”
“음란한 어머니네.”
“하, 하지만.”
레인디아는 우물쭈물 덧붙였다.
“제가 이렇게 흥분하는 건……, 에이든뿐이에요.”
“흥분했단 말이지.”
에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조심스레 다리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자 질구가 푹 절어 있었다. 레인디아는 허리를 비틀며 어떻게든 에이든의 손가락을 머금으려 했다. 그 낑낑대는 모습이 어찌나 애달픈지, 에이든은 단숨에 바지를 내려 페니스를 끄집어냈다.
“넣어줘?”
에이든이 페니스를 붙잡아 음부 위를 툭툭 두드렸다. 레인디아는 부푼 배를 감싼 채 살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잘 자리 잡아서, 이제 해도 된다고……, 그러셨었죠?”
“응. 그랬지.”
에이든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대신 무리가 안 가게 옆으로 누워서.”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몸을 옆으로 돌리고, 그녀의 등 뒤에 꼭 달라붙어 엉덩이에 페니스를 비벼댔다.
“이 자세가 딱 좋아.”
“……읏, 네.”
레인디아는 꼴깍 침을 삼켰다. 이미 배 속에 에이든의 아이를 품고 있는데도, 또다시 에이든으로 몸을 채우고 싶었다. 레인디아는 어서 넣어달란 듯이 손을 뒤로 뻗어 에이든의 탄탄한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보채지 않아도 넣어줄게.”
“으, 아앙……!”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배를 감싸 안으며 좆을 삽입했다. 밑을 보지 않아도 귀두는 구불구불한 질구 안으로 쑥쑥 밀려 들어갔다. 도톰한 귀두갓이 간지럽던 질벽을 북북 긁어줬다.
“하으으…….”
“하. 디아, 왜 이렇게 푹 절었어? 응? 손가락으로 한 시간은 쑤셔준 것처럼 부드럽네.”
하지만 좆을 중간 정도 밀어 넣자 좁아진 질벽이 귀두를 가로막았다. 에이든은 살살 허리를 쳐올리다 단념했다.
“어쩌지, 디아. 우리 아기가 아빠랑 같은 방 쓰기 싫다는데?”
“읏. 흐……, 괜찮아요. 무리가 가면 안 되니까.”
하지만 레인디아는 퍽 아쉬운 얼굴이었다.
“여긴 원래 아빠 건데, 우리 아가는 욕심이 참 많아. 디아가 기분 좋아지는 곳에 닿으려면 조금 더 들어가야 하는데 말이야.”
에이든은 배를 감싸던 손을 내려 수풀 사이에 파묻었다. 병아리처럼 보드라운 음모를 헤치곤 클리토리스를 찾아내 포피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탱글탱글한 클리토리스가 드러났다. 에이든은 체리처럼 새빨간 덩어리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엄마를 위해서라도 아빠랑 잠시만 나누어 쓰자, 아가. 너도 엄마가 기뻐했으면 좋겠지?”
“으, 으응……! 에이든, 그런, 말은……, 앙!”
“응? 무슨 말?”
“아, 아가한테, 좋지 않아요…….”
“디아. 나 상스러운 말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걸? 오히려 먼저 유혹한 건 디아잖아. 잊었어?”
“흣!”
에이든이 음핵을 꼬집었다. 그 순간 막혀 있던 질벽이 벌어지며 좆이 쑤욱 말려 올라갔다.
“아, 아응, 거기……!”
“옳지, 다 들어갔다. 여기 기분 좋지?”
페니스가 전부 들어간 건 아니지만, 레인디아가 유독 잘 느끼는 깊이까지 내벽이 벌어졌다. 몸을 관통하는 아찔한 쾌감에 레인디아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에이든은 둥글게 접힌 그녀의 몸을 따라서 꼭 달라붙었다.
“모, 모르겠어요. 왜……, 생리를 할 때라든가, 임신했을 때처럼……, 곤란한 상황에서 성욕이 쌓이는 건지…….”
가능하면 조용히 넘어가고 싶어도, 쑤셔지는 기쁨을 알게 된 후론 질 안이 근질거렸다. 에이든은 혼란스러워하는 레인디아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성욕은 자연스러운 거야, 디야.”
에이든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응, 으응……!”
“그렇게 따지면 난 일 년 내내 발정기지.”
“아, 하앗……! 아!”
좆기둥이 다리 사이로 쑥 들어갔다 빠지길 반복했다. 레인디아의 밑구멍은 어느 때보다 많은 애액을 흘리며 기쁘게 에이든의 좆을 빨아먹었다.
“디아의 살 냄새만, 큭, 맡아도 좆이 빳빳하게 서.”
“으응, 아, 아앙!”
“이제는 젖 맛까지 알아버려서, 더는 참을 수 없을, 후우……, 정도라고.”
“으, 흐으, 아, 안 대여……!”
“응? 뭐가?”
“젖, 뺏어, 먹으면……, 아가가, 먹어야, 으응!”
“후후. 당연히 그 정돈 양보해야지.”
에이든은 그르렁거리며 레인디아의 귀 뒤에 입술을 문댔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이 젖은 전부 내 거야.”
에이든은 도톰한 젖꼭지를 꽉 꼬집었다. 빈 젖 대신 질구가 애액을 흠뻑 토해냈다. 에이든은 요도를 벌름대며 애액을 집어삼켰다.
“큭, 부족해.”
에이든은 한 손으로 레인디아의 허벅지를 들어 올렸다. 비록 좆을 전부 집어넣진 못하지만, 제 좆이 쑤컥쑤컥 질구를 드나드는 모습을 보며 부족한 욕구를 충족시켰다. 그는 침대에 기대 누운 팔로 바닥을 비집고 들어와 레인디아의 부푼 배를 감쌌다. 더 이상 좆이 들어가는 만큼 배가 볼록해지진 않았지만 쑤실 때마다 떨림이 전해졌다.
“으응, 흐으, 아앙!”
그리고 레인디아가 흘리는 달콤한 신음이 기분 좋게 귀를 간지럽혔다. 그녀의 몸짓, 발짓, 눈짓, 그리고 배 속 아이의 태동 하나하나가 모여 에이든을 전율케 했다. 더 없을 황홀감 속에 에이든은 자신의 모든 걸 레인디아의 안에 쏟아냈다.
정사가 끝나자 에이든은 레인디아에게 깜짝 소식을 전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래.”
에이든이 빙그레 웃었다.
놀라운 소식은, 캐서린이 살던 아담한 코티지가 전쟁의 피해 없이 멀쩡히 남아 있단 것이었다. 건물이 마을에서 떨어진 언덕에 있었기 때문이다.
“디아가 원한다면 그곳에서 아이를 키우는 게 어떨까 해.”
비록 마을은 전쟁으로 폐허가 됐으나, 코티지 주변의 자연은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만약 이사를 하게 된다면 에이든은 영주로서 그 일대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레인디아는 고민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우리가 그곳에서 가정을 꾸린다면, 돌아가신 어머니도 기뻐하실 거예요.”
“이사 준비를 위해서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아. 우선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거든. 아이를 기르기 적당한 장소인지. 디아를 혼자 남겨두는 게 걱정이지만.”
“괜찮아요. 이곳엔 마마도 계시는걸요.”
“그래. 내가 없는 동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백모님께 의지하도록 해.”
평소라면 카타리나와 티타임을 갖는 것만으로도 질투하던 에이든이 산뜻한 미소까지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살던 집이 멀쩡히 남아 있단 기쁜 소식에 심취한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며칠 뒤, 에이든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
* * *
에이든은 등받이가 없는 나무 의자에 앉아 무릎에 팔을 기댄 채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앞에는 한 거구의 사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밧줄도 수갑도 채워져 있지 않았지만 사내는 마치 결박당한 것처럼 굳어 있었다. 저를 바라보는 짐승 같은 눈빛에 압도된 것이다.
“원래 이 자리엔 두 명이 있어야 했어.”
무거운 침묵을 가르고 에이든이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그 여자는 손님과 싸우다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뇌진탕으로 죽었다더군.”
그 여자는 어린 레인디아를 산 마담을 말했다.
“처음엔 미치도록 화가 났지만……, 곱씹어보니 그리 분노할 일만은 아니었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해.”
에이든은 몸을 낮춰 발목에 숨겨둔 단검을 꺼냈다. 그것을 휙휙 허공에 던지고 받길 반복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제 아이의 아빠가 돼. 한 집안의 가장이 되는 거지. 훗날 자식의 입에서 나의 아버지는 연약한 여자를 죽이는 쓰레기예요, 같은 소리가 나오면 안 되잖아?”
붙잡힌 남자는 불안한 시선으로 허공에서 빙글빙글 도는 단검을 좇았다. 난데없이 의식을 잃고 눈을 뜨니 캄캄한 방에 갇혀 있었다. 도저히 자신이 이곳에 감금된 이유를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원한을 살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나도 이젠 사람답게 살고 싶어.”
에이든이 높이 날아오른 단검을 휙 낚아챘다.
“히, 히이익, 사, 살려주십시오……!”
남자는 바닥에 손을 얹고 비굴하게 애원했다. 그의 손등에 난 엑스 자 모양의 흉터를 보며 에이든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도 먹고 살려다 보니, 컥!”
에이든은 다트를 던지듯 남자의 어깻죽지에 단검을 날렸다. 남자는 어깨에 꽂힌 단검을 보며 꺽꺽 숨을 들이켰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앞에 선 에이든이 검을 뽑았다.
“크아아악!”
“짐승은 죽여도 돼. 그게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지.”
에이든은 남자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너는 짐승이니까, 이건 살인이 아니야. 그렇지?”
에이든이 서늘한 미소를 띤 채 되물었다. 하지만 남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목을 그었기 때문이다.
“꺽, 컥, 크억……!”
“과연. 짐승다운 소리를 내는구나.”
에이든은 천천히 남자의 몸을 바닥에 눕혔다.
“걱정 마. 이 정도로 죽진 않아. 나는 전장에서 인간이 어느 정도의 고통을 느끼면 죽는지 실험해 왔거든. 그래서 잘 알고 있지.”
몸을 일으킨 에이든은 준비해 온 연장을 테이블에 하나씩 내려놨다.
“너는 왜 여기 잡혀 왔는지 모를 거야. 그렇지?”
“컥, 꺼억, 끅!”
“디아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어. 내가 널 고문하는 건 순전히 자기만족이야. 나의 디아는 말이지, 네가 죽었단 사실도 모르고 지낼 거야. 너의 존재는 티끌만큼도 떠오르지 않도록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에이든은 깨달음을 얻은 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평생 나만을 바라보며 사는 거지.”
에이든의 얼굴에 황홀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나도 참. 알아듣지도 못할 짐승을 앞에 두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에이든은 연장을 들고 헐떡이는 짐승의 앞으로 다가갔다. 뿌각, 하는 소리와 함께 벽 쪽으로 새빨간 피가 튀었다.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결과적으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다름없었다.
감옥으로 호송되던 벨리타가 심장 발작을 일으켜 돌연사한 것처럼,
누구도 모를 테니까.
* * *
“어머니가 살던 곳으로 거처를 옮길 거라고?”
“네, 마마.”
“그렇군. 황궁 안보단 바깥이 심적으로 편하겠지. 이해하네.”
“아니에요. 마마 덕에 황궁 생활도 편안했는걸요.”
“마음 쓸 거 없네. 아무리 편하다 한들 본가만 한 곳이 없지.”
쓸쓸해 보이는 황후의 얼굴에 레인디아는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그녀의 속내를 읽은 건지 카타리나는 다시 활짝 미소 지었다.
“황궁에도 조만간 기쁜 소식이 들려올 거라네.”
“네? 그게 뭔가요?”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어.”
“혹, 폐하께서 쾌차하신 건가요?”
“으음. 아니네. 그건 아니지만.”
카타리나는 찻잔을 든 채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레인디아는 더욱 알쏭달쏭해졌다. 그러나, 카타리나의 흐뭇한 표정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요즘 레인디아는 더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도 저처럼 행복한 일이 가득하길 바랐다.
“오늘 대화는 이쯤에서 마쳐야겠네. 선약이 있어서.”
“네, 마마.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카타리나와 레인디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레인디아가 구동궁으로 돌아가자 카타리나 역시 어딘가로 향했다.
황궁의 지하에 만들어진 비밀 통로를 따라 내려가자 굳게 잠긴 철문이 나왔다. 황후를 알아본 경비병은 재빨리 문을 열었다. 육중한 문은 장정 두 명이 매달려야 겨우 열 수 있었다.
끼이이익.
다시 좁은 복도가 이어졌다. 복도의 끝에서 카타리나는 열쇠를 꺼내 잠금을 풀었다. 사각의 방은 크기에 비해 텅 빈 느낌이었다. 카타리나는 중앙에 자리한 침대로 걸어갔다.
“제레미.”
카타리나는 커튼을 걷으며 안을 확인했다.
침대 위에는 4년 전쟁에서 실종사로 처리된 제레미가 누워 있었다. 황가의 초상화에 담긴 모습보다 훨씬 수척해진 몰골이었다. 거뭇한 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광대뼈가 도드라질 만큼 볼도 홀쭉했다. 몸에 지방이 전부 빠져 앙상한 뼈만 남은 채였다. 그럼에도 숨이 붙어 있는 게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후후. 사랑하는 나의 아들.”
카타리나가 제레미의 푸석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의식만 살아 있는 제레미는 눈을 굴려 카타리나를 바라봤다. 푸른 눈동자는 혈관이 전부 터져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에이든과 레인디아가 조만간 황궁을 떠날 거라는구나. 레인디아가 누군진 기억하지? 황가의 새 가족이란다.”
카타리나는 앙상하게 메마른 제레미의 손등을 다독였다.
“그 두 사람은 훌륭한 부부가 될 거야.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거든. 그러니, 그 둘을 위해서라도 너 또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돼.”
카타리나는 침대 옆에 놓인 줄을 잡아당겼다. 몇 초가 지나자 딸랑딸랑 종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또 다른 문에서 의원 하나가 들어왔다.
“마마, 희소식이 있습니다.”
“설마…….”
“예. 회임에 성공했습니다.”
카타리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다소 쓸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참으로 잘되었군. 한편으론 미안하고.”
“고아를 데려다 속이고 싶어도, 혈연 검사를 하면 황족의 씨가 아닌 게 들통이 날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궁중 의원이 황후를 독려했다.
황후는 비밀리에 후계자를 생산하고 있었다.
황손의 씨를 품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선 여인이 있었다. 카타리나가 후원하는 고아원 출신의 여자였다. 그간 궁중 의원이 뽑아낸 제레미의 씨를 몸에 품어 후계자를 길러줄 고마운 여인.
“제레미의 생식기능이 죽기 전에 후계자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군.”
카타리나는 애정이 담긴 눈으로 제레미를 바라봤다. 제레미는 있는 힘을 다해 목울대를 움직였지만 끅끅대는 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거죽만 남은 몸에 갇힌 제레미는 마치 번식을 위해 살아가는 종마가 된 기분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레미, 너도 이 땅에 너의 흔적을 남기게 된 거야. 나는 말이다. 너의 아들을, 나의 사랑스러운 손주를 훌륭한 황제로 기를 생각이란다.”
칼라마리 대부터 일그러지기 시작한 헬렌베르크 황가를 바로잡는 것. 그리고 젊은 시절 빼앗긴 어미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 카타리나는 자신을 기다리는 달콤한 미래에 더 없는 황홀감을 느꼈다. 마치 몸이, 영혼이,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이게 다 너의 사촌인 에이든 덕이야.”
카타리나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제레미를 황궁으로 데려온 것은 다름 아닌 에이든이었다. 제레미를 의식만 살아 있는 통나무 인간으로 만든 것도 에이든이었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에이든을 원망할 수 없었다. 오히려 조카의 계획에 살아갈 희망을 얻었다.
에이든은 자신의 계획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4년 전쟁에서 실종된 줄만 알았던 제레미는 살아 있었다. 다만, 기억을 잃은 채로. 그렇게 그를 구해 준 시골 처녀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꾸리지만, 아내가 임신할 무렵 불의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일찍이 제레미가 비범한 존재임을 느끼고 있던 아내는 황궁에 이 사실을 알리고, 카타리나는 아들과 만삭의 며느리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황후는 큰 결심을 한다. 아들과 시골 처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군주의 자리에 앉힐 결심을.
이것이 에이든이 보여준 미래였다.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라 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었다.
“네가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나누었다는 게 세간에 알려지면, 젊은 시절 황궁의 시녀들을 시도 때도 없이 건드렸단 소문도 사라지지 않겠니?”
소문이 아닌 사실이었지만. 어쨌거나 카타리나도 어미였던 이상 아들의 치부를 숨기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너를 추종하던 자들이 에이든의 목숨을 노렸어. 이 때문에 망가진 너의 평판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될 거란다.”
카타리나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황태자파의 습격 역시 에이든의 계략일지 모른다고. 하지만 카타리나는 그런 에이든의 계획에 순순히 응해 줬다. 그녀에게 있어서도 살아남은 황태자파는 처리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에이든이 목숨을 바쳐 기회를 만들어주었기에 그들을 뿌리째 뽑아낼 수 있었다.
아아, 참으로 고마운 아이였다.
“아들아, 이제 다 잘될 거야.”
카타리나는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몸을 일으켰다. 제레미의 퍼석해진 눈동자가 촉촉해지더니 눈물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젊은 부부를 태운 마차가 코티지 앞에 멈춰 섰다. 회색 벽돌 위에 하늘색 지붕을 얹어 만든 목가적인 건물이었다. 팬지와 아네모네 같은 알록달록한 꽃이 벽을 둘러싸 화사한 느낌을 주었다.
본채 옆에는 최근에 증축한 별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최신식으로 지어졌으나 기존의 건물과 자연스레 조화를 이루었다. 이제는 저택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커다란 규모였다.
“별관을 증축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어.”
먼저 마차에서 내린 에이든이 레인디아에게 손을 내밀어주며 설명했다. 레인디아는 에이든에게 몸을 기댄 채 홀린 듯 저택을 바라봤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선 얕은 계곡물이 졸졸 흘렀다. 또 주변 풍경 또한 완벽하게 보존되어 전쟁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래전 에이든이 속삭이던 모습과도 유사했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머물렀단 생각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서 구경하자.”
에이든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믿기지 않아요.”
거실에 들어선 레인디아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가 꿈속에서 보던 벽난로와 흔들의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세상에. 꿈에서나 보던 모습인데…….”
레인디아는 부푼 배를 감싼 채 흔들의자 앞으로 걸어갔다. 에이든은 조용히 난로 앞으로 가 불을 붙였다. 난로 안에서 따뜻한 불씨가 피어올랐다. 레인디아는 살그머니 의자에 앉았다.
“여기서 어머니가 저를 안고 있었어요.”
가슴 아래로 자란 찬란한 금발이 난로의 불빛으로 따사로이 물들었다. 배 속의 아이도 기분이 좋은지 콩콩 발을 굴렀다.
“어머. 일어났니?”
레인디아는 퍽 자연스레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에이든이 의자 등받이에 팔을 얹고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아이는 힘차게 발을 굴려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에이든. 정말로 제가 상상하던 모습 그대로예요.”
캐서린의 사망 후 그레제 백작은 낯선 이에게 이 집을 처분했다. 그래서 가구 또한 새 집주인의 취향에 맞게 교체되어 있었다. 에이든은 이 저택을 사들이자마자 대대적인 공사를 진행했다. 레인디아가 꿈에서 본 모습을 최대한 재현하는 쪽으로.
“다행이야. 디아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해서.”
“어떻게 마음에 안 들 수 있겠어요? 에이든이 나를 위해 꾸며준 공간인데. 무엇보다, 어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살던 곳이기도 하고요.”
비록 캐서린은 이곳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녀의 딸 부부가 돌아왔으니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레인디아 역시 가족들의 영혼이 제 곁에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에이든?”
“잠시만.”
아이의 태동을 느끼던 에이든은 살며시 레인디아의 앞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그대로 천천히 몸을 기울여 그녀의 배에 뺨을 기댔다.
“잠시만 이대로 있을게, 디아.”
에이든은 눈을 감았다. 레인디아는 깊은 애정이 담긴 눈으로 그런 에이든을 내려다봤다.
“시간이 참 빨라요.”
레인디아가 에이든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작고 귀엽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자란 건지,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얌전히 레인디아의 손길을 느끼던 에이든이 스르륵 눈을 떴다.
그래, 디아. 그 작은 아이가 널 보고 좆을 꼿꼿이 세울 만큼 자라버렸지. 그것도 모자라 열심히 허리를 흔들어 좆질을 하고 자궁에 씨를 듬뿍 뿌려서 임신시키는 기특한 짓까지 해냈어.
에이든은 스르륵 상체를 일으켰다.
“이제는 그때만큼 귀엽지 않아?”
“지금도 종종 귀엽다고 느껴요.”
“구체적으로 언제?”
“음.”
레인디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글쎄요. 제가 키스해 줄 때면 몸을 한껏 낮추고 얌전히 기다릴 때라든가, 뭐라도 들려고 하면 허겁지겁 달려와서 빼앗아갈 때?”
“그럴 땐 멋있다고 해 줘야지.”
“아니요. 정말 사랑스러워요. 번쩍 안아서 뽀뽀해 주고 싶을 만큼요.”
레인디아는 어린 시절의 에이든을 떠올렸다. 정말로 작고 연약해 보여서 후 불면 날아갈 것처럼, 위태롭던 어린 영혼.
“그땐 번쩍 안아 들 수 있었는데.”
“아니야. 디아는 그때도 힘들게 날 안았어.”
에이든 역시 함께 옛 기억을 회상했다. 두 사람은 이마를 맞대고 웃었다.
“모두 디아가 환상 속의 존재라고 말했어. 황궁 병사들이 찾으러 갔지만, 동굴은 비어 있었고 남은 흔적조차 없었으니까. 백모님 역시 너를 상상 속 존재로 치부하셨지.”
에이든은 무척 상처받은 표정을 하고 고개를 떨궜다. 레인디아는 재빨리 그의 뺨을 잡아 시선을 맞췄다.
“환상이 아니에요. 이렇게 다시 만났잖아요.”
에이든이 홀로 견뎌온 세월이 레인디아의 마음에도 녹아내렸다. 그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여왔다. 그리고 문득, 에이든이 저를 만나기 전 목숨을 끊으려 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랬다. 에이든은 부모님이 살던 저택에서 삶을 끝내려 했다. 우리가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히 물었다.
“요즘도, 삶을 포기하고 싶은 기분이 드시나요?”
이제는 진정으로 에이든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공포를 마주할 때였다. 더는 타인을 통해서가 아닌, 사랑하는 그의 입을 통해서 직접 듣고 싶었다.
오해가 풀리기까지 험난한 여정이 있었지만, 어렵게 이어진 만큼 그의 모든 것을 품어주며 함께 나아갈 때였다.
“그럴 리가.”
레인디아의 의중을 이해한 에이든은 걱정하지 말란 듯 푸스스 웃었다.
“더는 그런 나쁜 생각은 하지 않아. 아니, 할 수 없어.”
에이든은 레인디아와 이마를 맞댔다.
“디아와 우리의 아이가, 나를 이곳에 뿌리내리게 해 주는걸.”
이제 에이든은 생각한다. 진정으로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건 바로 레인디아와 그녀의 배 속에 자리한 소중한 아이라는 사실을.
“나는 디아를 통해 구원받은 거야.”
“저 역시 에이든을 통해서 몇 번이고 구원받았어요.”
에이든의 사랑은 무겁고 독하다.
그렇게 서로를 마모시키며 깎인 끝에 더 이상 누군가를 상처 주지 못할 만큼 둥글게 변해 있었다.
레인디아는 그 형태를 사랑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어머니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떠나지 못한 건, 단순히 홀로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지키고 싶었던 거다.
가족의 가치를.
서로 다른 영혼이 만나 하나가 되어 나아가는 기쁨. 가족이란, 여자를 가두는 울타리가 아닌 새로운 세계의 확장이었다. 레인디아는 그 소중한 울타리를 지키고 싶었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꼭 행복해질게요.’
그리고 에이든과 배 속의 아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을 위해서라도.
외전. 그 소년
“부모님이 그립지 않니?”
이따금 소년의 백모가 찾아와 묻곤 했다.
그녀의 이름은 카타리나 헬렌베르크.
명문 베르첸 가(家)의 여식으로, 지금은 헬렌베르크 가의 족쇄에 묶인 가여운 영혼일 뿐이었다. 황궁 안에서 자신을 이방인이라 느꼈던 카타리나는 소년을 동지처럼 여겼다. 소년에게 그녀는 불청객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오늘부터 제레미는 나와 함께 본궁에서 기거할 게다.’
‘어머니……!’
카타리나는 아주 오래전 아들 제레미를 빼앗겼다. 그러니까 소년의 할머니인 칼라마리 황후가 제레미의 거처를 본궁으로 옮긴 것이다. 소년은 카타리나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했으나, 그녀가 깊은 상실을 느끼고 있단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립지 않아요.”
소년이 말했다.
소년의 이름은 에이든 헬렌베르크.
그는 태어난 순간 어미에게서 떨어져 황궁에서 자랐다. 바로 이 구동궁. 수백 년 전 미친 황녀를 가두기 위해 지어졌다는 동쪽에 있는 오래된 성에서 쭉 홀로 지내왔다. 입는 것도, 먹는 것도, 씻는 것도, 모두 이 작은 손으로 야무지게 해냈다.
카타리나가 제레미를 그리워하는 건 당연했다.
그녀는 아들의 얼굴을 안다. 비록 제 아들이 어미보다 할머니를 의지하고 따른다고 할지라도. 반면 에이든은 부모의 얼굴도, 목소리도, 무엇 하나 알지 못했다. 아는 것은 불러봐야 무의미한 이름뿐. 칼라마리는 황궁 안에서 에이든의 부모와 관련된 모든 걸 불살랐다.
“백모님,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를 어떻게 그리워하나요?”
그리움.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
그리워하다. 사랑하여 몹시 보고 싶어 하다.
사전에 정의된 의미는 그러했다.
“저와는 상관없는 감정이에요.”
소년은 사전에 적힌 단어들을 곱씹으며 대답했다. 카타리나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어린 조카의 시큰둥한 대답에 무척 상처를 받은 모양이었다.
* * *
“컥, 커억, 꺽……!”
죽음은 에이든의 삶 도처에 깔려 있었다.
거품을 뿌걱뿌걱 쏟아내는 게처럼, 소년의 뺨을 타고 침이 질질 흘렀다. 기도가 막혀 호흡 곤란이 왔다. 눈이 뒤집혀 흰자위가 드러났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하루가 꼬박 지나 있었다.
‘죽지 않은 건가.’
처음으로 마주한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소년은 차분히 상황을 판단했다. 누군가 음식에 독을 탔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었다. 할머니인 칼라마리의 짓이었다.
철의 여인. 제국의 대모. 자비로운 군주.
‘이 아이가 너를 대신해 제국의 새로운 황태자가 될 거다.’
‘어머니, 에이든을 돌려주십시오!’
그러나 자신을 거스른 아들과 아들을 유혹한 여자, 그들이 낳은 손주에게는 악마보다 지독해질 수 있는 여인. 그 미친 여자는 갓난쟁이를 어미의 품에서 빼앗아온 것도 모자라 멋대로 황태자로 책봉하고, 고성에 유폐해 고립시킨 뒤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누가 칼라마리를 탓하겠는가.
성군이라 불리는 역대 황제들도 하나같이 추악한 뒷사정은 존재했다. 완벽한 칼라마리의 인생에 있어 통제할 수 없는 아들만큼 치욕스러운 존재는 없었으리라. 칼라마리에게 아들이란 자신의 분신이었고, 페레디온은 주인을 거스른 반역자였다.
그리고 에이든은 괴물의 아이였다.
“크윽. 하아. 하…….”
그 후로도 음식에 종종 독이 들어 있었으나, 소년은 짧으면 한 시간, 길어야 하루 정도 의식을 잃다 깨어났다. 일종의 경고 사격이었다. 자신을 거스를 생각은 말라는.
“옷 품이 너무 커서 수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허리띠를 매면 돼요. 두고 가세요.”
소년의 체구는 또래보다 빈약했다. 조금만 건들면 쓰러질 것처럼 연약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독약 때문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소년은 약초학과 화학에 관련된 서적을 탐독한 끝에 음식에 들어 있는 독극물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 독약의 효력을 측정하기 위해 작은 들짐승을 붙잡았다.
“끼, 끼이이. 끽!”
보드라운 털에 둘러싸인 그 작은 짐승은 약을 먹은 지 30초도 지나지 않아 발작을 일으켰다. 거품을 흘리며 부들부들 떠는 모습은 애처롭다기보단 한심해 보였다.
“괜찮아.”
소년은 죽어가는 짐승을 품에 안았다. 짐승의 털은 물에 빠진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끽, 끽……!”
“너는 곧 죽을 거야.”
평온한 죽음이 너를 안식으로 이끌 거야.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통에서 몸부림쳐야 하는 나와 달리.
“1분 17초.”
소년은 수첩에 시간과 치사량을 기록하고, 왼손에 늘어진 털가죽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대로 아무렇지 않게 죽은 짐승을 난로에 집어넣어 불태웠다.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도 작은 들짐승처럼 땀에 흠뻑 젖어 몸을 틀어댔을까? 소년은 독약이 든 음식을 먹었던 날들을 떠올렸다. 그런 약한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그 한심한 모습을 발견한 이는 없었다. 발작하는 자신을 안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 * *
“이것 보게. 이 정제법대로라면 불순물이나 오염 없이 처음 사용된 원료를 완벽하게 추출할 수 있겠어.”
우연히 황립 연구소에 근무 중이던 귀족이 소년의 수첩을 발견했다. 수첩 안에는 소년이 알아낸 정제에 관한 기술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대단하구나, 에이든. 언젠가 너의 재능이 많은 사람을 구하게 될 거야.”
카타리나는 에이든의 비상한 두뇌가 백성을 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는 칼라마리를 설득해서 어린 조카가 황립 연구소에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줬다.
에이든이 새로운 시각으로 행한 연구들은 학계에 크고 작은 파장을 불러일으켰지만, 백성의 평균 수명이 늘어난다거나 하는 즉각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백성들은 어린 황태자가 벌이는 지적 성취에 관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에이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쌓여온 불안을 지적 활동을 통해 분출하였는지도 몰랐다. 그저 목적도 목표도 없이 연구실을 왕래하길 몇 달이 지났다.
“에이든, 이번에 찾아온 사절단이 네 연구에 무척 관심을 보이더구나. 페레디온과 천국에 있는 실비아가 너를 무척 자랑스러워할 거야.”
어느 날, 카타리나가 말했다.
소년의 어머니는 죽었다. 시어머니에게 갓 태어난 아들을 빼앗기자 시름시름 앓다 북부의 척박한 기후를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 페레디온은 여전히 북부의 어느 저택에 은둔자처럼 살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 남자는 왜 살아가는 것일까?
무엇이 그 남자를 살아가게 만드는가?
무엇이, 인간을 살게 만드는 것이지?
나는 왜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일까.
“특별한 성과 없는 연구일 뿐이에요, 백모님.”
“그렇지 않아. 에이든, 네 나이에 뛰어난 학자들과 연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모로선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단다.”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심한 아들을 둔 카타리나로선 페레디온 부부가 그리 부러울 수가 없을 테다. 에이든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논리는 단순하다.
참과 거짓, 정답과 오답만이 있을 뿐이다.
에이든은 감성이 아닌 이성의 세계에서 고립된 채 자라왔다. 어쨌거나 카타리나의 논리대로라면, 어린 아들의 성취에 북부에 유배된 아버지는 자랑스러워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페레디온이 돌연 목숨을 끊었다.
“내 아들이 죽었다고?”
“마마, 고정하십시오.”
“페레디온이, 내 아들이! 아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이더냐?”
“마마!”
카타리나의 논리가 정면에서 부정당한 순간이었다. 에이든은 백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평범하게 사고하는 평범한 여인일 뿐이었다.
반면 소년의 아버지는 아내를 잃고 아들을 빼앗겨 영혼이 망가진 사내였다. 영혼이 망가진 자들은 이성을 배반하는 행동으로 주위 사람을 놀라게 만들곤 했다.
칼라마리 헬렌베르크.
그 여자도 그랬다.
그 여자도 영혼이 망가져 있었다.
“실비아! 실비아 치프먼! 이 발칙한 계집! 네년이 내 아들을 죽인 게다! 네년이! 죽어서도, 죽어서도오! 끝끝내 내 아들까지 지옥으로 끌고 갔어! 이 요망한 년!”
칼라마리가 에이든에게 달려들었다.
“마마, 그, 그분은 황태자 전하십니다!”
칼라마리는 에이든의 멱살을 붙잡고 죽어버린 여자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소년은 알고 있다. 자신의 짙은 흑발이, 붉은 눈동자가, 칼라마리로부터 그녀의 아들을 빼앗아간 요망한 여자를 미치도록 빼닮았다는 것을. 그리고 칼라마리는 실비아를 대신해 에이든에게 격정적인 분노를 쏟아내고 있단 사실쯤은. 또한, 자신은 칼라마리를 거스르기엔 너무나 나약하단 현실도.
알고 있었지만.
소년은 태어나 처음으로 반기를 들었다.
“당신이 죽인 거예요.”
“뭐……?”
“아버지를 죽인 건 제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 할머니를 원망했을 거예요. 저는 알아요. 저는 페레디온과 실비아의 아들이니까요. 자식과 부모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어져 있는 법이죠.”
한 번도 그렇게 느껴본 적 없었지만, 이러한 표현은 즉각적으로 효과를 발휘했다.
“이, 이 괴물……, 징그러운 괴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네, 할머니. 저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과 그 악랄한 여자의 사랑이 빚어낸 끔찍한 창조물이에요.”
“아아악!”
칼라마리는 비명을 지르다 쓰러졌다.
카타리나는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조카를 바라봤다. 저 어린아이의 입에서 어떻게 저런 말이 나왔는지, 도저히 믿을 수 없단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알아. 나는 괴물이야.
에이든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는 저들과 다르다고. 자신은, 인간이 아닌 무언가라고…….
“황후 마마의 병상이 깊어져 황권 교체를 준비해야 할 듯싶습니다. 지금 상황에서라면 에이든 황태자 전하께서 다음 황위를 계승하셔야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느 날, 산첼로가 카타리나에게 고했다.
에이든이 칼라마리의 심장에 심어준 죄책감은 서서히 효력을 발휘했다. 물론 이전부터 황후의 건강 상태는 적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제국의 국모라 불리는 철의 여인도 세월 앞에선 피부에 주름과 검버섯이 가득 올라온 노인에 불과했다.
인간은 죽는다.
죽음이란 모든 필멸자들이 공통으로 다다르는 운명의 종착역이었다.
“정말로 에이든이 황위에 오르게 될까?”
“예?”
“아니. 달리 묻지. 어머니께서 에이든을 황위에 오르게 두시겠는가? 처음부터……, 그 아이를 핍박하기 위해 황태자로 책봉한 분이셨는데.”
카타리나는 불안한 낌새를 느꼈다.
그리고 곧, 그녀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그해 성축일(聖祝日).
황궁 안에서 황태자가 사라졌다.
* * *
성축일의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나타난 괴한 두 명이 쥐도 새도 모르게 황태자를 납치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4대 축일이라 불리는 성축일이 긴장감을 해이하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황손이 납치될 만큼 황궁의 경비가 허술하지 않았다.
“노스랜드로 데려가서 산 채로 늑대한테 던지란 말이지.”
“그래. 확인을 위해 오른팔을 잘라 오라고 했어. 성공만 하면 하사받은 영지에서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고.”
“크흐흐. 내 평생 귀족 나리들 꽁무니만 쫓아다닐 줄 알았지, 내가 귀족이 될 줄이야!”
칼라마리의 짓이었다.
철의 여인은 병상에 누운 순간에도 교묘하게 에이든의 목숨줄을 쥐고 흔들었다.
결국, 나는 그 여자의 손에 죽는 것인가.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그들의 아들도 부모의 궤적을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일까.
‘이번에는 확실히 죽여줬으면 좋겠는데.’
소년은 차라리 칼라마리가 작정했기를 바랐다.
사주를 받은 괴한들은 딱 봐도 멍청해 보였다. 자신이 갇혀 있는 철장의 조임 또한 느슨했고, 발목에 채운 수갑의 둘레도 고통을 감수하면 벗을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소년은 살아가는 것이 귀찮아졌다. 더는 저항하지 않을 테니 이번에야말로. 그런 간절함을 품을 때였다.
“이년은 또 뭐야?”
“씨발. 한눈파는 사이에 저 새끼를 데리고 도망치려 그랬어.”
“하이락 안에서부터 따라온 건가?”
그 여자는, 에이든이 살면서 보아온 사람 중에 가장 멍청한 여자였다. 어쩌면 제레미보다 멍청할지도 몰랐다.
“당신들, 저 아이를 어쩌려고 그러는 거죠?”
그렇게 묻는다고 순순히 말해 줄까.
“닥쳐!”
철썩!
역시나 괴한 중 하나가 매섭게 여자의 따귀를 올려쳤다. 철장 문이 열리고 기절한 여자가 안으로 쓰러졌다. 소년은 구석으로 도망쳐 몸을 웅크렸다.
멍청한 여자.
다시 한번 생각했다.
짐승도 이기지 못할 상대에게는 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절대자인 칼라마리를 거슬렀고 지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죽음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대체 어떤 대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이곳에 온 것일까?
“괘, 괜찮나요?”
겨우 정신을 차린 여자가 퍼렇게 멍든 눈을 뜨면서 한다는 말이 저거다. 소년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순수한 의문을 담아 물었다.
“너, 지능이 모자라?”
여자도 소년의 질문이 뜬금없다 느꼈는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푸스스 웃었다.
“또, 똑똑한 편은……, 아니에요.”
여자는 어색한 미소로 이 어색한 상황을 무마하려는 듯했다. 이윽고 여자가 웃음을 거두며 소년에게 다가와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다치진 않았나요?”
그건 내가 물어야 할 소리인데.
여자는 마치 동방에서 들여온 백자를 만지는 시녀들처럼 섬세하게 제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생각보다 멀쩡하단 게 미안해질 만큼. 꼼꼼히. 하지만 그 손길에는 생명을 다루는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소년에게는 낯선 온기였다.
그러다 문득, 납치범들이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여자를 강간할 거라고 말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단어였지만, 유추해 보건대 좋은 일이 아님은 틀림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강간이 대체 무엇이냐고.
“저에게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어요. 오히려 잘됐어요.”
그런데도 너는 잘된 일이라 말했다.
틀림없이 머리를 세게 부딪혀 제정신이 아닌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여자만큼은 살았으면 한다는 바람이 스멀스멀 마음 한구석에서 올라왔다. 역시 제정신이 아닌 건 자신이었다. 칼라마리가 먹인 독약의 후유증인가?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었다.
결국 여자를 살리고 싶은 마음에 발목을 비틀어 수갑을 벗었다. 내심 철장을 나오자마자 들켜 살해당하는 상상을 했지만, 열쇠를 찾아오는 일은 김이 샐 만큼 쉬웠다. 서운한 한편 여자를 살릴 수 있단 생각에 기분이 묘하게 고양되었다.
이제 그 여자 혼자 도망치는 일만 남았는데.
“자. 어서 나가요.”
여자는 소년을 번쩍 안아 들었다.
하지만 여자는 얼마 못 가 쓰러졌다. 여자는 보상금을 바란 것도, 타인의 인정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결국 멍청한 행동을 통해 목숨을 잃어가는 순간에도 여자가 바란 것은 단 하나.
“당신이 살기를 원해요.”
“왜?”
“누군가 살아가길 바라는 데 이유가 필요하진 않아요.”
시들어가는 검은 눈동자가 그것으론 부족하냐 물어왔다.
아니. 충분해.
에이든에겐 그것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소년은 여자의 영혼이 서서히 죽어감을 깨달았다. 결국 도움을 구하기 위해 동굴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뒤에서 늑대가 낑낑대며 소년을 따라왔다.
“안 돼. 너는 여기 있어. 저 멍청한 여자랑 있어 주란 말이야.”
소년은 새끼 늑대를 안아 다시 여자의 위에 얹어 놓았다. 자신이 도움을 청하러 가다 얼어 죽는 한이 있어도 이 여자는 살길 바랐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너무나 많아서, 이렇게 바보처럼 착한 여자 한 명쯤은 살아남아야 균형이 맞을 테니까.
그런데 그 바보같이 착한 여자도 거짓말을 술술 했다.
백작가의 영애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한참 어린 제게 존댓말을 하는 게 자연스럽고, 마치 누군가를 모시는 것이 몸에 밴 듯한 태도. 아무리 봐도 귀족가의 아가씨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믿고 싶었다.
죄책감으로 자신을 책임지려는 카타리나, 어린 황태자의 지적 성취를 경이로워하는 동시에 시기하는 학자들. 소년에게 상냥한 타인의 존재란 겨우 이 정도가 다였다. 그마저도 상냥함 뒤엔 명확한 이유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달랐다.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이타심.
그래서 소년은, 기뻤던 것 같다.
그 맹목적인 이타심과 희생정신이 오롯이 제게 향했다는 게.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 있는 인간이란 걸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품 안에서 멈춘 줄만 알았던 심장 소리가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 감각은 특별했다.
아. 나는 살아 있구나.
나는, 살고 싶어.
“……에이든, 네가 말한 장소를 수소문해 봤지만 그 여자의 흔적은 없었다는구나. 그레제 백작가도 마찬가지야. 그 가문에 여식은 너보다 어린 여자아이뿐이란다.”
소년이 죽음의 문턱을 딛고 살아 돌아왔을 때, 그의 경험담을 믿어주는 이는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카타리나의 죄의식 가득한 눈동자 아래엔 어린 조카가 드디어 미쳐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잠재되어 있었다.
아니야. 나는 미치지 않았어.
너무나 멀쩡해.
이렇게 심장이 뛰고, 괴롭고, 슬프고, 고통스러워. 나의 전부를 부정당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된 것보다, 정신 나간 취급을 받는 것보다 괴로운 일은 따로 있었다.
‘그런 여자는 존재하지 않아.’
자신을 위해 아무런 대가 없이 목숨을 걸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받을 때마다 영혼이 조각조각 뜯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날 느낀 온기는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말한다.
가여운 아이야.
이 세상에 너를 사랑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너는 목숨을 걸 가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야.
라고.
* * *
오기일까. 아니면 현실로부터의 도피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자신이 인간이란 사실을.
평생 사랑받긴 글렀음에도 살아갈 자격이 있는 인간이란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보다는 괴물이 되는 쪽이 빨랐다. 어쩌면 자신은 처음부터 괴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년은 몸 안에 쌓인 독소를 없애는 해독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거품 섞인 침을 질질 흘리고, 땀에 흠뻑 절은 볼품없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일념만으로 이루어낸 쾌거였다.
해독제는 즉시 효과를 발휘해서 몸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혈색도 좋아지고 빈혈도 사라졌다. 하지만 복수의 대상인 칼라마리는 무덤에 묻힌 지 오래였고, 에이든의 커지는 몸집은 제레미의 호승심을 자극할 뿐이었다.
“저 빌어먹을 늑대 새끼가 사람을 물었단 말입니다, 아버지!”
그리고 제레미의 비겁한 호승심은 에이든이 아닌 짐승에게 향했다. 울타리 안에 꼭꼭 숨겨둔 채 길러서, 에이든 말고 다른 인간은 한 번도 구경해 보지 못한, 그럼에도 저를 공격하는 인간에게 아주 경미한 상처만 낼 만큼 순진한 늑대였다.
“진정하거라, 제레미.”
“듣자 하니 울타리 안에 들어간 건 너희이지 않니?”
“그래. 어찌 아무런 목적 없이 구동궁까지 간 게냐?”
황제와 황후는 곤란한 얼굴로 푹푹 한숨을 쉬었다.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늑대가 이제 사람 피를 맛봤으니 울타리를 뛰쳐나오는 건 시간문제란 말입니다!”
“저런 짐승을 황궁 안에서 기른 에이든도 문제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늑대를 죽이고 에이든을 벌해 주십시오!”
“이 사달이 난 것은 전부!”
격해진 감정들이 절정에 다다르고, 소모적인 논쟁이 오고 가 피로만 중첩됐다. 누군가 이 상황을 끝내야 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뚜둑, 하고 끊기는 소리가 났다. 에이든은 비로소 삶을 끝내고 싶어졌다.
“헉! 에, 에이든 님!”
에이든은 경비대가 허리에 차고 있던 리볼버를 빼앗아 들어 장전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에이든에겐 그 짧은 시간이 하루처럼 길게 느껴졌다. 에이든은 늑대를 향해 총을 겨눴다.
“끄응.”
은빛 털을 지닌 늑대는 순진한 눈망울을 깜박이며 제 주인을 올려다봤다. 그 여자를 닮은 멍청한 눈으로.
에이든은 망설이지 않았다.
타앙!
“낑!”
“꺄아아악!”
“으, 으아아악!”
한 발의 총성이 늑대의 몸을 관통했다.
에이든은 제레미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제레미는 기겁을 하며 두 팔로 제 머리를 감쌌다. 그러나 총구는 제레미를 향하지 않았다. 뜨거운 열기가 남은 총구가 향한 곳은,
“당신이 만족할 결말을 보여주지.”
에이든은 제 머리통을 겨냥했다.
칼라마리는 죽어서도 황궁 안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그것은 그녀가 황가에 내린 저주와도 같았다. 내가 죽어야만 이 저주가 끝나는 거다. 죽어야만 이 고통스러운 삶에서 해방될 수 있어.
그대로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 힘껏 잡아당겼다.
타앙!
그 후의 기억은 없다. 정신을 차렸을 때 에이든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황후의 측근인 산첼로가 몸을 날려 에이든을 구했다고 한다.
타인이 보기에 산첼로는 생명의 은인이었으나, 에이든에겐 이 지긋지긋한 삶을 이어가게 한 살인자나 다름없었다.
언젠가 반드시 죽여버려야지.
에이든은 으득 이를 갈며 결심했다.
“에이든, 정신이 드니?”
“늑대의 사체는 어디 있나요.”
또 다른 살해 공모자가 묻는 말에 에이든은 전혀 다른 소리를 늘어놨다.
“따로 보관해두라 했단다. 장례를 치러주는 게…….”
“박제하고 싶어요.”
“……뭐?”
“전부터 늘 박제가 해 보고 싶었거든요. 몸통에 총알을 쐈으니 머리만 잘라 박제할 생각이에요.”
“스, 슬프지 않니?”
“슬퍼한다고 죽은 것이 돌아오진 않아요.”
에이든의 무감한 대답에 카타리나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에이든은 슥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거두어가더니 싱겁게 손을 털었다. 역시 다른 사람의 눈물을 아무리 봐도 마음이 동하진 않았다. 짜증만 치솟을 뿐.
“백모님, 눈물은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요.”
“흐, 흐윽…….”
“그리고 백모님의 아들은 훗날 제국을 멸망의 길로 이끌 괴물로 자랐죠. 오늘 일로 백모님도 인정하실 수밖에 없을 거예요.”
“에, 에이든. 나는, 나는……!”
“그러니 당신이 낳은 괴물을 저처럼 직접 죽이시든지, 이 자리에서 저를 내치든지 하세요. 아니면 황제 폐하처럼 영원한 방관자로 남는 법도 있겠지요.”
내심, 카타리나가 자신이 아닌 제레미를 택하길 바랐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 조카를 죽이길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에이든이 느끼기에 마치 어떤 강한 운명의 힘이 저의 죽음을 훼방 놓는 듯했다.
“흐으윽…….”
“…….”
그날, 에이든은 아주 짧게나마 카타리나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아니, 동지애일까. 이 지긋지긋한 황가에서 마모되는 또 다른 존재에 대한. 어쩌면 이날 느낀 동정심이 제레미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선물하게 된 계기가 됐는지도 몰랐다.
* * *
몇 년 뒤, 샤이룬 왕국의 침공이 일어났다. 4년 전쟁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군의관으로 참전하겠습니다.”
“하! 앞에서 전투하는 건 겁이 나서 뒤에 숨겠다는 거냐? 비겁한 놈.”
제레미의 비아냥에 황제가 머뭇거리며 에이든의 편을 들어줬다.
“그래, 에이든. 큰 결심을 했구나. 너는 의학 지식이 풍부하니 전장에서 큰 도움이 될 게다. 다만, 너의 어린 나이가 걸리는구나.”
“황족의 의무를 다하는 데 있어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렇게라도 목숨값을 해야지. 어린 시절 황태자 노릇을 하며 황궁에서 누린 게 얼만데.”
에이든의 예의 바른 대답에 제레미는 또다시 핀잔을 줬다.
“너도 참전하거라.”
“예?”
“너야말로 장차 이 나라의 지존이 될 황태자지 않느냐.”
잠자코 대화를 듣던 카타리나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제레미는 눈을 부릅뜨고 어머니를 노려봤다.
“그러다 내가 죽으면? 저 새끼한테 홀랑 재위를 넘겨줄 속셈이겠지? 당신은 나보다 저 새끼를 더 자식처럼 싸고도니 말이야.”
카타리나는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씨발, 내가 못 갈 줄 알아? 에이든 저 새끼도 참전하는데, 황태자인 내가 뒤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줄 아냐고!”
제레미는 길길이 날뛰다 마침내 출중한 호위 기사들을 거느리고 전장으로 향했다.
오히려 죽을 작정을 하고 전장에 뛰어든 쪽은 에이든이었다. 정확히는 완벽하게 죽기 위한 정보가 필요했다. 이상하게도 한 번 실패한 방법을 다시 쓰고 싶진 않았다. 일종의 징크스 같은 거였다. 신의 존재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저의 죽음을 방해하는 듯했다.
“또 그 여자 그림을 그리는 거냐?”
하필 제레미의 군사와 한 전장에 주둔하게 된 날이었다. 제레미는 에이든의 스케치를 빼앗아가더니 노골적으로 조롱을 했다.
“널 구해 줬다는 그 망상 속의 여자지? 뭐야, 얼굴이 없어? 설마 이걸로 수음하는 건 아니겠지? 그보다, 네 녀석 서긴 하는 거야? 군인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하다고. 네 새끼는 고자거나 비역질하는 변태 새끼일 거라고.”
에이든이 그림을 빼앗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도 소문을 하나 들었지. 황태자는 호위 기사를 고기 방패로 앞세우고 뒤에서 공로를 가로채는 겁쟁이라고.”
“뭐야? 어떤 새끼가 감히!”
에이든의 도발은 유효했다. 다음 전투에서 제레미가 용감무쌍하게 적진을 향해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세가 꺾이자 겁에 질려 말머리를 돌렸고, 아군과 부딪혀 낙마하고 말았다.
“누가 지어온 약이지?”
“예? 그야 당연히 군의관인 에이든 님께서,”
“지금 그 또라이 새끼가 지어온 약을 먹으란 거냐?”
막사 안에서 제레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미친 새끼는 전장에서도 망상 속 여자를 그리느라 제정신이 아니라고! 도대체가, 그런 정신병자가 군의관인 게 말이 돼? 씨발, 약에 독을 넣었을 게 틀림없어. 네놈이 먹어봐.”
“예? 예……?”
보다 못한 에이든이 막사를 걷어 젖히고 들어와 약을 빼앗아 들었다.
“감히 황태자의 막사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죽고 싶어?”
에이든은 조용히 가루약을 제 입에 털어 넣었다. 이윽고 약을 꿀꺽 삼킨 뒤 말했다.
“제가 만든 약을 못 드시겠다면 자연 치유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황태자 전하.”
“저, 저 새끼가……!”
제레미의 상스러운 욕은 에이든에게 어떠한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제레미의 망가진 다리는 문제였다. 약도 안 먹고 버티겠다? 이대로라면 후송 절차를 밟는 건 시간문제였다. 기실, 제레미 역시 이를 노렸는지도 몰랐다. 다친 다리는 그가 하이락으로 돌아갈 좋은 변명거리가 되어줄 테니.
동시에 에이든은 수도에 있을 카타리나를 떠올렸다.
죽기 전에 그녀에게 선물을 주는 건 어떨까. 또 제국의 백성들을 위해서도 제레미 같은 황태자는 없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렇게 에이든은 사고로 위장해 제레미를 실종사로 처리하고, 훗날 움직이지 못하는 병신으로 만든 제레미를 카타리나에게 데려가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그렇게 황태자를 잃은 상황 속에서 전쟁은 계속 이어졌다. 마침내 전장에서 필요한 정보를 모두 정리했을 즘. 이 무의미한 전쟁을 멈춰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인질을 회유하는 건 쉽다.
고문이 끝난 뒤에 따뜻한 수프와 갓구운 빵을 던져주는 짓을 반복하면 된다. 포로가 식사할 때, 자신은 전쟁으로 어쩔 수 없이 고문하는 거라 고백하듯 말하면 포로의 마음은 쉽게 물러진다.
특히나 목숨이 끊기기 직전의 순간 고문을 멈추는 센스가 중요했다. 그 순간 에이든은 고문자가 아닌, 포로를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준 구원자가 되는 것이다.
무리한 전쟁을 일으킨 것은 너희가 충성을 맹세한 왕의 탐욕과 욕심이다. 너희를 고문하는 나도 그 거대한 톱니바퀴의 일원일 뿐이다. 다만 나는 너희를 인격체로 존중하기에 이렇게 식사를 챙겨주는 것이다.
그러니 은혜를 안다면, 아니, 너희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 싶다면 칼날은 누구에게 향해야 할까? 그렇게 제게 충성하는 개들을 모아 적국에 보내자 알아서 주인을 물어뜯고 전쟁을 종결시켜줬다.
신념을 바로 세우는 건 수프와 빵 한 조각이면 충분했다. 특별한 배움으로 깨달은 게 아니었다. 그저 본능이었다. 에이든은 타고나길 누군가를 복종시키는 체질이었다.
새삼스레 깨달았다. 자신의 몸에도 칼라마리의 피가 흐른단 것을. 어쩌면 칼라마리와 자신은 본질적으로 같은 종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러한 재능이 다 무슨 소용인가.
에이든 헬렌베르크는 죽음을 결심했는데.
전쟁이 끝나자, 에이든은 가장 완벽한 죽음을 상상하며 북부로 향했다. 약도, 총도, 타인도, 에이든을 죽이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될 일이었다.
제 몸에 흐르는 핏줄을 따라간 끝에 도착한 곳은 얼굴도 모르는 부모가 살던 대저택이었다.
그 저택에는 오랫동안 방치된 아틀리에가 있었다. 복도에 붙은 유화는 그녀의 어머니가 살아생전 그린 그림이었다. 아이를 빼앗긴 고통에 평생 사람은 그리지 못했다고 아버지의 일기장에 적혀 있었다.
에이든은 전장에서도 잊지 못한 여자를 떠올렸다. 그 여자. 그 여자가 나의 죽음을 바라봐주면 좋겠어. 그래, 마치 천사가 내려와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듯이. 에이든의 안에서 생전 처음으로 미학적 갈망이 살아난 순간이었다.
그림을 시작할 땐 마음이 들떴지만, 완성할 무렵엔 분노만이 남았다.
아니야. 틀려. 이런 얼굴이 아니었다.
에이든은 캔버스를 찢어발기길 반복하다 마침내 얼굴을 제외한 채 그림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다시 그 여자를 만났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요.’
비로소 그녀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자신이 손을 대는 쪽이 옳다고 믿을 만큼. 그래서 에이든은 그 여자의 밑으로 자신의 분신을 거리낌 없이 밀어 넣었다.
에이든의 삶에 축적된 경험이 속삭였다. 절대적인 복종만이 그녀를 잡아둘 수 있을 거라고. 레인디아 같은 종은 자유를 줘도 누리는 법을 몰랐다. 에이든도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그는 통제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거다.
갖지 못한다면 철저히 망가뜨리는 게 속이 편했다. 제 손으로 부수는 쪽이 옳다. 하지만, 도망가는 레인디아의 뒷모습에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네가 원죄의 늪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없다면 차라리 안락한 지옥이 돼주겠노라.
* * *
창문을 투과해 들어온 빛줄기가 에이든의 눈꺼풀에 닿았다. 풍부한 속눈썹을 두드리는 햇살에 에이든은 스르륵 눈을 떴다.
에이든의 품 안에는 레인디아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에이든은 살며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체취를 한껏 들이마셨다. 모유가 돌기 시작해 젖내 섞인 향이 코를 자극하자 잠이 금세 달아났다.
한때는 레인디아를 복종시키는 것만이 그녀를 손에 넣을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 후로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겪긴 했지만 마침내 레인디아는 온순한 암컷이 되어 제 곁을 지켜줬다. 배 속에 더없이 사랑스러운 새끼까지 품어준 채.
이제 레인디아는 에이든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한정된 수명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 전까진. 에이든이 바라는 건 한 가지. 그녀가 남들을 소중히 대하는 만큼, 스스로를 소중히 대하는 것이었다.
“디아, 너는 타인에게 관대한 만큼 자신에게도 관대할 필요가 있어.”
“으음. 에이든……? 뭐라고 했어요?”
잠에서 깬 레인디아가 눈을 비비며 되물었다. 에이든은 그녀의 등 뒤에 바짝 몸을 붙이며 부푼 배를 쓰다듬었다.
“내가 디아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말했어.”
“후후. 저도요.”
레인디아는 팔을 뒤로 뻗어 에이든의 뺨을 쓰다듬었다. 에이든은 길들인 짐승처럼 그르릉 소리를 내며 뺨을 비볐다.
자신은 이 여자에게 구원받았다.
마치 알에서 갓 부화한 오리가 처음 본 존재를 어미로 각인하듯이. 어린 에이든에겐 그 존재가 레인디아였다. 환상도 착각도 아닌, 손안 가득 들어차는 양감을 지닌 살아 있는 인간.
인간의 형상을 한 나의 구원.
에이든의 손바닥 안에서 아이의 태동이 느껴졌다.
소년은 이제 아버지가 된다.
잔혹한 운명을 딛고 일어나, 마침내 영원한 행복에 다다른 것이다.
<절대복종> 完
- 공금 by Ji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