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화 (1/203)

1화. 서장: 가이드랑 손만 잡고 자는 에스퍼가 어딨어?

‘가이드랑 손만 잡고 자는 에스퍼가 어딨어?’

그 에스퍼가 바로 자신이 될 줄, 예결은 꿈에도 몰랐다.

애써 눈을 감았으나 잠이 오질 않았다. 반 바퀴만 굴러도 내 님과 닿을 수 있는 침상이 망망대해처럼 넓게만 느껴졌다.

“아직도 잠들지 못하는 것이냐?”

몸을 뒤척이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서늘한 낯의 사내가 걱정스러움을 담은 시선으로 예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대사형이 있어 줄 테니 괜찮다. 또 악몽을 꾸면 깨워줄 테니 눈이라도 붙여보거라.”

“사형…….”

그의 손이 이마를 찬찬히 쓸어주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꼼꼼히 귀 뒤로 넘겨주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제하량과 맞닿은 살갗에서 몸을 녹진녹진하게 만드는 가이딩이 흘러들어 왔다.

예결은 그 가이딩이 제 몸에 흠뻑 스며드는 감각을 천천히 음미했다. 각성자 센터에서 만난 선배 에스퍼한테서 들은 그 어떤 표현도 지금의 기분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

“어리광이 많이 늘었구나.”

“곤륜파에서는……. 이렇게 단둘이 지낼 수 없었으니까요.”

예결이 목소리를 낮춘 채 소곤소곤 속삭였다.

“대사형은 항상 모두에게 둘러싸여 있었거든요. 막내인 제가 다가가긴 어려웠죠.”

하량의 눈가에 언뜻 죄책감 같은 감정이 비쳤다. 표정이 일그러지는데도 잘생긴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닿으면 손끝이 얼어버릴 것처럼 차가운 생김새다. 그러나 예결을 바라보는 표정에는 온기가 가득했다.

흐르는 물에 담근 청옥처럼 맑고 깨끗한 분위기는 예나 지금이나 꼭 같았다. 아마도 그래서 이십 년 만에 만난 제하량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리라.

‘정말 누가 이렇게 재회할 줄 알았겠냐고.’

지금의 예결은 스무 살, 21세기의 한국에서 태어난 에스퍼였다. 동시에 그는 열일곱, 그 어린 나이에 죽은 전생을 기억한다.

바로 이곳, 중원의 곤륜산에서 눈앞의 사내를 지키고 흉수의 칼에 절명한 문예결의 삶을.

‘한국에서 나고 자랄 때만 해도 내가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예결은 태어날 때부터 전생의 기억이 있었다. 그가 새롭게 살아가게 된 세상은 정말 이상한 곳이었다.

말 대신 철로 된 자동차가 길을 달리질 않나, 허공답보를 익히지 않아도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 수 있지 않나. 지구의 반대편에 있어도 동시에 연락을 주고받는 게 가능했다. 무림 고수는 없었으나 에스퍼라는 자들은 손에서 불을 쏘고 맨손으로 철근을 구부리기도 했다. 게이트라는 게 열려서 몬스터라는 기괴한 생명체가 우르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토록 이상한 세상에서조차 무림은 소설에나 등장하는 공간이었다.

예결은 무협지가 뭔지 읽기 전부터 곤륜파가 어디에 있는지, 구파일방이 어떤 곳인지 줄줄이 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들 아이의 망상으로 여겼을 거다. 전생의 기억이 있는 소년은 눈치껏 스스로를 잘 포장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한국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대학 입학 기념 여행을 떠날 정도로.

‘그런데 갑자기 중원으로 돌아오게 될 줄이야.’

“그래도 지금은 우리가 퍽 가깝지 않니?”

하량은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오랜 침묵에 걱정하는 눈치였다.

“네. 분명 그렇네요.”

모르는 척 조심스레 그의 손에 뺨을 기대며 예결이 졸랐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으면 안 될까요?”

“자야 하는데, 불편하지 않겠니?”

완곡한 거절이었다. 하기야 시커먼 사내놈이 만져달라고 엉기면 불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쪽은 생존 문제가 걸려 있었다.

내장 조각을 토해내다가 제 피 냄새에 비위가 상해서 또 욱욱거리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다른 사람과 이렇게 닿아 보는 게 오랜만이라서, 정도를 몰랐나 봐요.”

예결이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자 하량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손을 움찔거렸다.

분명 거짓말은 아니다. S급 에스퍼로 각성할 조짐이 보인 순간부터 예결은 세상 모든 자극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으니까.

먹는 거, 입는 거, 쓰는 거 다 가리게 된 마당에 어디 사람이라고 안 가렸을까.

“본, 나는 이 모든 게 처음이라 어색해서 꺼낸 말이란다. 개의치 말렴.”

하량에게서는 여전히 망설임이 느껴졌으나 더 이상 예결을 밀어내진 않았다. 이를 기민하게 알아챈 예결은 흡족함을 느꼈다.

이렇게 착한 가이드는 선배 에스퍼 중 누구도 만나보지 못했을 거다.

동문의 부러움을 사곤 했던 대사형의 가슴은 여전히 컸다. 아니, 예결이 죽은 후에 더 훌륭해진 것 같았다. 폭주 후유증으로 너덜너덜해진 불쌍한 에스퍼가 기댈 자리는 충분하다.

‘자……. 이제 진도를 어떻게 뺀다?’

무릇 사형제란 한배에서 난 형제만큼이나 가까우며 사제는 사형을 공경해야 한다. 하나 이십 년 만에 대사형과 재회한 이 사제의 머릿속에 그런 건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하면 제하량을 잡아먹을 수 있을지 궁리하기에도 바빴기 때문이다.

‘강호의 금기 따위 다 나가 죽으라지.’

일단 내가 살고 봐야 할 거 아닌가?

만족스럽게 제하량의 품 안에 똬리를 트는 예결의 눈이 금빛으로 번뜩였다.

끈적끈적한 음모가 깊어가는 어느 가을밤이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