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3화 (3/203)

3화. 거자필반(去者必返) (2)

예기치 못한 기적이었다. 눈물이 안개를 걷어 내기라도 한 건지 그저 희끄무레한 윤곽만 보이던 상대의 얼굴이 좀 더 분명해졌다.

겨울을 조각해 옮겨놓은 것처럼 수려한 미남이 예결을 끌어안고 있었다. 손을 대면 얼 것처럼 차갑게 생긴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진 채였다.

“아…….”

예결은 탄식을 토해냈다.

차라리 생면부지의 타인이라면 모를까, 예결은 저 얼굴의 주인을 알았다. 비록 그가 아는 것보다 더 성숙하게 느껴졌으나 종종 꿈에 찾아들곤 하던 이를 몰라볼 리 없었다.

‘이게 착각이라면 정말 기분 나쁠 것 같은데…….’

예결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 부름을 담았다.

“제 사형?”

제하량. 곤륜파의 대제자이자 전생에 자신의 대사형이었던 사람.

“그래. 나다. 알아보겠느냐?”

남자가 그의 어깨를 쥔 채 긍정했다. 예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교통사고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진 게 분명하다.

‘대사형이 왜 내 앞에 있지?’

여기가 중원도 아니고.

문득 예결은 주변의 풍광을 휙 둘러봤다. 어딘지 모르게 낯익었던 강가, 그리고 그 너머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태산이 드러났다. 구름까지 닿아 있는 그 거대한 산의 위용이 예결의 숨통을 짓눌렀다.

곤륜(崑崙).

“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예결은 몸을 옹송그렸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한순간에 멀어지고 있었다.

“결아!”

***

매캐한 냄새가 혈향과 뒤섞여 있다. 여기도, 저기도 전부 죽었거나 죽어가는 이들 뿐이다.

곤륜파의 상징인 용이 새겨진 건물이 타오르고 있었다. 날름날름 시뻘건 혓바닥을 움직이는 화마가 용이 손에 쥐고 있던 여의주를 살라 먹었다.

예결은 땀 때문에 손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검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진검을 허락받은 것이 고작 달포 전의 일이었다. 막내라곤 하나, 같은 배분의 사형제보다 성취가 느렸던 예결은 열일곱에 겨우 제대로 된 검을 쥘 수 있었다. 그마저도 당시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다.

진검의 무게는 어린 소년의 마음에 꿈을 불어넣었다. 머잖아 저 강호로 나아가 녹림도와 마두를 무찌르는 협객이 되어 무명을 떨치리라, 그리 믿었다.

한데 막연한 꿈 대신 현실이 들이닥쳤다. 곤륜의 숙적, 신강의 천마신교가 발호한 것이다.

무림일통을 위해 깃발을 들어 올린 마교는 중원무림의 첫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곤륜에 쳐들어왔다. 구름에 휩싸여 언제나 적요하던 산에는 온통 고통과 비명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드높은 기상을 자랑하던 곤륜의 현판은 반으로 쪼개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일선에서 물러나 은거 중이던 곤륜의 장로부터 가장 어린 제자까지 검을 들고 침입자들에게 맞섰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기괴한 마공을 익힌 마교의 정예는 끝도 없이 몰려왔으며 강시가 이미 죽은 이의 시체까지 욕보이고 있었다.

지옥을 인세에 옮겨다 둔 것만 같다.

‘도망치고 싶어.’

울음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소년은 자신이 쥔 진검의 무게가 두려웠다.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으나 최전선은 무너진 지 오래였으며 달아나는 이들은 등에 암기를 맞은 채 죽어갔다. 예결이 살아남은 건 순전히 그보다 먼저 죽은 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 희망 없는 전장에서도 빛나는 이가 존재했다.

‘대사형…….’

저 멀리, 제하량이 보였다. 앞장서서 곤륜 내에 있던 민간인을 대피시키고, 본인은 습격자의 발을 묶어놓기 위해 뒤에 남았다. 그가 휘두르는 태청검의 푸른 검격 탓일까, 제하량은 마치 새파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길고 긴 곤륜의 역사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기재였다. 장로님들은 모였다 하면 그의 성취를 이야기했으며 사형제들 사이에서는 제하량의 협행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다들 중원무림의 변두리에 위치한 청해에서 서서히 쇠락해가던 곤륜이 제하량을 통해 다시금 날아오를 거라는 꿈을 꿨다.

비록 궁지에 몰리긴 했으나 대사형의 근처에는 그가 쓰러뜨린 적이 가득했다.

만약 십수 년의 세월이 더 주어졌다면 곤륜의 영웅이 중원무림을 침범해온 천마신교의 악적들을 처단했다는 노래가 널리 퍼졌을지도 모른다.

하나 제하량은 용이되 아직 승천할 준비가 되지 않은 용이었다.

“어린 것이 제법 악바리처럼 버티는구나! 본좌의 수하들을 이렇게까지 잃을 줄이야!”

마두가 피에 젖은 낯으로 깔깔 웃고 있었다. 제 수하라는 이들의 몸이 차게 식어가고 있음에도 그는 즐거운 기색이었다.

“어떠냐? 지금이라도 본좌를 따른다면 네놈이 천마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기회를 주마.”

대사형은 묵묵히 검을 고쳐 쥐었다.

하나 구름 위를 노니는 듯 우아하던 움직임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검고 흉한 것들이 제하량의 발목을 쥐고 바닥으로 끌어 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곤륜은 이미 무너졌다. 네가 생명을 깎아 지켜도 끝이란 말이다.”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마두는 조공으로 대사형의 검을 낚아챘다가 놓아주길 반복했다. 고양이가 사냥감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 같아 지켜보고 있기 끔찍했다.

그러나 예결은 도무지 저 전장으로 뛰어들 엄두가 나질 않았다.

“……곤륜은 무너지지 않는다.”

의기가 가득한 제하량의 눈에 태청검의 푸른 빛이 스몄다.

“마교는 몇 번이고 곤륜을 짓밟았지. 그러나 우리는 매번 다시 일어섰다.”

곤륜의 역사에는 언제나 마교가 있었다. 청해에 적을 둔 곤륜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중원무림으로 진출했다가는 포위당하기 십상이다.

또한 천마신교가 익히는 마공과 곤륜의 선기가 깃든 무공은 서로 최악의 상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운명이 지어준 숙적 관계였다.

“나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곤륜은 너희가 죽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야.”

마교가 발호할 때면 곤륜은 언제나 사멸 직전까지 갔으나 다시 일어섰다. 몇 번이고 거듭해서.

그 사실을 알리는 제하량의 음성은 바르고 곧았다.

예결은 밤이면 이불보를 끌어안은 채 숨죽여 다른 사형들이 말하는 제하량의 협행 이야기를 훔쳐 듣곤 했다. 그 이야기 속의 협객이, 곤륜의 대제자가 지금 예결의 눈앞에 있었다.

온통 절망으로 가득했던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

침묵하던 마두가 입술을 달싹이자 예결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연신 깔깔대던 적의 음성에서 웃음기가 완벽하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계산하기도 전에, 예결은 운룡대팔식을 펼쳤다. 언제나 굼뜨다 사부님의 타박을 듣곤 하던 바로 그 운룡대팔식이었다.

구름을 타고 노니는 용이 전장을 한달음에 가로질렀다.

예결은 본인이 무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마두와 대사형의 사이에 제 몸을 내던졌다.

검게 물든 손이 예결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뜻하지 않은 존재의 등장에 손이 묶인 마두가 멈칫한 순간, 제하량의 시퍼런 검기가 놈의 미간을 꿰뚫었다.

“크, 크아악!”

손바닥이 찢어져도 놓지 않았던 검을 놓친 제하량이 무너지는 예결의 몸을 품에 안았다.

대사형을, 제하량을 부르려 입을 여는데 울컥 피를 토하고 말았다. 선혈이 이미 너덜너덜해진 제하량의 하얀 도복을 마저 물들였다.

“대사……형…….”

“이게…… 무슨……?”

붉은 피를 뒤집어썼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희게 질린 낯의 제하량이 예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천마신교의 마두를 앞에 두고도 당당히 맞서던 사내가 내보이는 동요에 예결은 놀랐다.

그는 사문의 기대를 한 몸에 짊어지고 있던 기재였으나, 자신은 언제나 관심에서 밀려나 있던 막내가 아닌가.

“사, 살아야 합니다.”

말보다 피가 더 많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살아요. 꼭.”

예결은 힘없는 손으로 툭, 하고 제하량의 가슴팍을 밀쳤다. 언제나 저 곤륜처럼 크게만 느껴지던 대사형이 그 손길에 힘없이 주춤 밀려났다.

비로소 자신의 목숨으로 제하량을 살렸다는 사실이 머리에 와닿았다.

예결은 고통조차 잊은 채 해사하게 웃었다. 대사형이 여기에서 살아남기만 한다면 그는 무림의 역사를 다시 쓸 것이다. 마교의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난 곤륜의 새 기둥이 되어줄 거다.

팔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예결은 마지막 숨을 뱉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안 돼! 사제, 사제!”

더는 답할 수 없게 되어버린 절박한 부름이 필사적으로 예결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곤륜의 꿈은 예결의 꿈이 되었다.

***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난 예결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한데 눈앞이 온통 어두웠다.

교통사고 당시 들었던 소리와 양친의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명을 자아냈다. 징을 들이박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쟁쟁 울렸다.

폭주의 후유증으로 잔뜩 엇나간 예결의 감각은 삽시간에 그를 왜곡된 세상으로 내던졌다.

“아……. 아악……!”

예결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을 뒤틀었다.

‘아니, 지금 내가 머리를 붙잡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손끝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고 느끼던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지독하게 무서웠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소음과 고통, 그리고 사고 당시의 기억이었다. 예결은 다시금 그 고속도로 위로 내던져졌다.

누군가가 예결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결아, 예결! 정신 차리거라.”

예결은 자신을 억압하는 상대의 몸을 밀치고 할퀴었다. 제 이름이 불린 줄도 몰랐다. 그저 이 소음 사이로 저를 찾는 존재가 있다면 부모님을 죽인 습격자일 거라 판단하고 날을 세웠다.

“꺼져! 이거 놔, 놓으라고!”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바둥거리는 통에 옷이 흐트러졌다. 상대는 예결의 발작을 막기 위해 그를 끌어안고 무언가 푹신한 게 깔린 바닥에 잡아 눌렀다.

“정신, 차려라! 이러다가 혀를 깨물기라도 하면……!”

그 순간, 예결의 살결 위로 상대의 손이 닿았다. 맞닿은 자리에서부터 전해진 따스한 감각이 몸의 말단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예결은 자신이 시력을 잃은 게 아니라 무언가가 눈을 가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의원은? 의원은 언제 도착하지?”

고작 두 번째 들었을 뿐인데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가 누군가를 다그치고 있었다.

맞아, 기절하기 전 그는 가이드를 만났다. 그리고 그 가이드는…….

“사, 사형…….”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내뱉은 말에, 상대가 응답했다.

“그래. 내가 누군지 알겠니?”

반항하는 과정에서 예결의 눈을 감싸고 있던 검은 천이 반쯤 흘러내렸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하량이 있는 쪽을 바라본 예결은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상 기절한 모양이다.

이상하진 않았다. 폭주 때문에 이미 한계에 달했던 몸이다. 안도와 가이딩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순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일어난 직후에 겪은 후유증도 이해가 갔다. 자신이 기절해 있을 때 제하량이 손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게 예결의 구명줄이라고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아파, 아파요…….”

예결은 제 가이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다시 태어나 아이가 되어서도 이렇게 응석을 부린 적이 없었다.

죽음의 기억에 덜덜 떨리는 어깨를 하량의 손이 감쌌다.

“조금만, 조금만 버티거라. 내 이번에는 반드시……!”

애틋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음성으로 사내가 거듭 무언가를 약속했다. 예결은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발악하느라 기운이 빠진 탓이다. 예결은 몸이 바닥으로 푹 꺼지는 감각에 다급히 제하량을 붙들었다.

“소, 손…… 손잡아 주세요.”

이상하다고 생각할 법도 한데 제하량은 순순히 예결의 손을 잡아주었다. 필사적으로 깍지를 낀 예결은 제하량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오며 속삭였다.

“혼자 두시면 안 돼요. 꼭…… 꼭이요.”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