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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4화 (4/203)

4화. 거자필반(去者必返) (3)

“언제쯤 일어날 수 있겠느냐?”

까무룩 잠들었다가 드문드문 깨어날 때면 언제나 대사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마음의 준비를…….”

어렴풋이 들리는 대화가 무슨 뜻인지 와 닿기도 전에 흩어졌다. 회복세에 접어든 몸은 계속해서 휴식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천천히 가라앉은 예결의 의식은 하량의 음성에 반응해서 깨어나곤 했다.

“환자의 상태는 어떻지?”

“내상이 심한지라……. 좀 더 상태를 지켜봐야 합니다.”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그에 답했다. 먼젓번에 들은 건 중년 여인의 음성이었는데, 이번에는 노인이다.

‘의원일까?’

바뀌지 않는 건 하량의 목소리뿐이다.

‘정말 성실한 사람이라니까.’

다행스럽게도, 제하량은 기절하기 전에 한 약속을 충실하게 지켜준 모양이다. 가이딩으로 기운이 안정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회복은 금방이다.

폭주할 때만 해도 죽음이 머잖았다고 생각했는데, 가이드를 만나니 살고자 하는 욕구가 절로 자라났다. 게다가 예결은 대사형에게 물어볼 질문이 아주 많았다.

이를테면 자신이 죽은 후 몇 년이나 지난 건지.

‘그리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진 않은데…….’

제하량의 음성은 전생에 들었던 것보다 성숙한 편이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젊은 사내의 것이다.

‘행여 수십 년이 지났다면 대사형이 나를 보자마자 예결이라 부르진 않았겠지.’

먼 친척이나 혈육이라고만 생각했을 거다.

그간 대사형은 어떻게 지냈는지, 혹시 자신을 가끔 떠올려 주었을지도 궁금하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이는 걸까.’

가이드를 만난 기쁨에 젖어 위화감을 이제야 깨달았다.

예결은 분명 제하량이 보는 앞에서 절명했다. 마교에서 온 고수의 손에 가슴이 꿰뚫렸으니 회생의 여지는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대사형은 자신을 예결이라 불렀다. 그 음성에는 일말의 망설임이나 의혹을 찾아볼 수 없었다.

초조함에 좀이 쑤셨다.

하나 지금의 예결은 반쯤 동면 비슷한 상태에 접어든지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벌떡 일어나서 돌아다니고 싶었으나 수마가 덮쳐올 때마다 순순히 몸을 맡겼다.

깨어 있어봤자 회복이 느려질 뿐이다.

‘어서 회복해야…… 사형과 대화할 수 있어.’

예결은 애써 눈을 감았다.

그 노력과 집념이 빛을 발한 것일까, 이다음에 의식을 되찾은 예결은 마침내 눈을 뜰 수 있었다.

검은 천을 두르고 있었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하얀 붕대 같은 것이 눈을 가리고 있었다.

‘알아챈 건가?’

어둠 때문에 놀라서 소란을 일으켰다고 말할 기회도 없었는데, 사형이 어찌 알았나 싶었다.

우연이겠지, 하고 손을 더듬더듬 위로 움직이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있거라.”

온통 고요한 가운데 들려온 음성은 어딘지 모르게 오싹한 구석이 있었다.

예결은 새삼 이곳이 무림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만약 현대의 한국에서라면 에스퍼의 기민한 감각을 속일 수 있는 존재가 없지만 무공을 익힌 고수가 기척을 죽이고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대사형?”

상대를 부르는 것과 동시에 거친 기침이 나왔다. 그간 물을 마시지 못해 바싹 마른 목구멍이 입술 좀 움직였다고 부린 야단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황급히 예결의 허리를 받쳐 일으킨 제하량이 그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여기, 물이다. 잔을 입에 대줄 테니 천천히 입술부터 축이면서 마시렴.”

곧 미지근한 도기가 입술에 와 닿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제 몸을 지탱한 하량의 팔은 참으로 굳건한데, 입술에 닿는 잔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이를 모르는 척 시키는 대로 입술부터 적셨다. 가뭄이 길었던 입 안이 한 방울이라도 더 마시겠다며 아우성을 부렸다. 그러나 하량은 아주 신중하게 잔을 기울였다.

조급한 마음에 예결이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니 하량이 나직이 타일렀다.

“급하게 마시면 탈이 날 거다.”

마침내 물을 다 마시자 하량은 예결의 입술에서 잔을 거뒀다. 달그락, 하고 도기가 바닥에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가린 천도 치우고 물기를 닦아낼 겸 예결은 손을 들어 올렸다. 한데 얼굴에 채 닿기도 전에 제하량이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자칫 깨질 도자기를 대하듯 부드럽긴 해도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양 단호한 구속이었다.

“갑갑한 건 이해하지만, 만지면 안 된다. 약재를 스미게 하는 용도라서.”

“약재요?”

의아한 마음에 예결이 되물었다.

“눈 상태가……. 좋지 않단다.”

하량이 조용히 말했다. 그의 음성은 더없이 낮았다.

“처음 너를 찾았을 때 이미 실핏줄이 다 터져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의원이 자칫 실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더구나.”

“그랬군요.”

정작 예결은 태평했다. 센터에 다닐 때 팔이 반쯤 잘린 에스퍼가 가이딩을 받은 후 수일 내로 회복하는 걸 직접 봤다.

‘그 형은 자기 멀쩡하다고 과시하느라 가이드 앞에서 팔굽혀펴기를 했었지…….’

당연한 말이지만 그 직후 의료실로 끌려갔다. 그때만 해도 그게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하량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걸 들으니 자신도 비슷한 짓을 저지르고 싶어진다.

가이드를 만난 에스퍼는 나사가 열 개 정도 빠진다지만, 직접 겪어보니 그 정도는 약과였다.

“금방 나을 거예요.”

질이 나쁜 에스퍼였다면 일부러라도 눈을 가리고 다니며 가이드에게 의지했을 거다. 그러나 예결은 센터에 꾸준히 출석하며 에스퍼 윤리 교육을 이수한 상식인이었다.

“눈뿐이 아니다. 발견되었을 때 네 몸은 성한 구석이 없었어. 외상뿐이 아니라 내상도…… 온몸의 기혈이 뒤틀려서 손쓸 도리가 없다더구나.”

하량의 음성이 살짝 떨려 나왔다.

“추궁과혈도, 침술도 영단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예결은 자신이 어렴풋이 들었던 대화 일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먼젓번에 들은 목소리의 주인이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던 건가.’

의원이 폭주 직후의 자신을 진맥했다면 최악을 가정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현대 의학조차 에스퍼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존재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대라신선이나 화타가 와도 살리지 못할 거라고…….”

제하량의 목소리가 뚝뚝 끊겼다. 그 애수 어린 떨림이 피부에 와닿았다. 예결은 자신이 그의 앞에서 죽어간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님을 떠올렸다.

“정말이에요. 사형.”

제하량의 손을 잡은 채 또박또박 말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저는 괜찮아요.”

저번에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하량의 걱정이 덜했을까?

한동안 대사형은 말이 없었다. 이상하게 길어지는 침묵에 예결은 붕대로 가려진 눈을 깜박였다.

‘혹시 우는 걸까?’

제하량이 우는 건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예결이 들어온 이야기 속 대사형은 언제나 대단한 영웅이었고 협객이었던 까닭이다.

가능하다면 그의 얼굴을 보고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머잖아 숨넘어갈 환자라고 생각하는 사내가 붕대를 치우는 걸 허락해줄 리 없었다.

“여기는 곤륜인가요?”

예결은 화제를 돌렸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어차피 자신이 완벽하게 회복되면 사형의 걱정도 가실 거다.

“……아니. 이곳은 청해의 장원이란다.”

하량의 음성은 실로 차분했다. 만약 예결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았다면 대사형이 잠시 뜸을 들였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리라.

“아아.”

예결은 나름대로 납득했다. 여긴 21세기가 아니라 케이블카나 산악 헬기 같은 것도 없으니 의원을 데리고는 저 험준한 산을 오르내릴 엄두도 내지 못했으리라.

“하긴 험준한 곤륜산에 의원님을 모셔 오긴 어려웠겠지요.”

곤륜파에도 의약당이 있긴 했다. 그러나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감안한다면 문파 내부에서 치료가 가능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무림문파의 모든 의료기관이 으레 그러하듯, 곤륜의 의약당도 외상과 영단 제조에 특화되어 있다.

“대사형이 직접 저를 돌봐주고 계신 건가요? 분명 문파의 중역을 맡고 계실 텐데……. 바쁘신 분을 이렇게 붙들어 놔서 어쩌지요?”

물론 정말 바쁘다 하더라도 예결은 딱히 제하량을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대사형이 지금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또 자신을 살피는 게 부담이 되진 않는지 같은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만난 가이드인데, 예쁘게만 보여도 모자라.’

염려 가득한 예결의 말에 제하량이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 지금 내게 너보다 더 중하고 급한 일은 없단다.”

손으로 만질 수 있다면 얼어붙을 것만 같은 서늘한 음성이다. 한데 예결의 귀에는 사근사근하게만 들렸다.

구름 위에 올라선 양 가슴이 붕 떠올랐다.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나아서 돌아다니는 것만 생각하렴.”

예결은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량은 그런 예결의 몸을 뒤로 눕혀주더니 손을 빼냈다.

“어디 가세요?”

스르륵 일어나는 기척에 예결은 다급히 하량을 붙잡았다. 겨우 만난 가이드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네가 드디어 깨어났으니 의원을 데려와야지.”

이게 바로 에스퍼 특유의 분리불안인가.

예결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어서 나아서 사형과 곤륜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저 딴에는 소박한 바람을 입에 담은 것이었다. 겸사겸사 회복에 대한 의지를 내보여 하량을 안심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런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량은 선 채로 얼어붙었는지 그에게선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혹시 눈앞에서 죽은 사제가 살아 돌아온 게 수상쩍어서 곤륜으로 데려가지 않는 거였나?’

초조함에 아무 말이나 내뱉기 전, 우뚝 멈춰 있던 제하량으로부터 괴로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결아. 이 우형(愚兄)은 곤륜에 갈 수 없단다.”

“예?”

무심코 반문하면서도 예결은 자신이 하나의 가능성을 간과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만약 곤륜파가 습격 당시의 피해를 수습하지 못하고 결국 멸문했다면?’

마교가 쳐들어왔다곤 하나 이토록 긴 도가의 명맥이 끊길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한데 곤륜이 그 습격에서 무너져 내렸다면?

예결은 곤륜파가 멸문하는 과정을 지켜봤을 대사형의 가슴을 송곳으로 긁어버린 셈이다.

보일 듯 말 듯 희게 질린 예결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제하량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는 상인이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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