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거자필반(去者必返) (4)
제하량의 충격적인 발언에 예결은 멍청하게 되물었다.
“상인이…… 되셨다고요?”
곤륜의 몰락보다 더 뜻밖의 사실이었다.
무림인이 아닌, 곤륜의 제자가 아닌 제하량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곤륜파의 멸문을 가정하는 게 더 쉬웠을 정도로.
아이는 부모의 마음대로 크지 않는 법이라지만 이건 이야기가 달랐다.
곤륜파가 대사형 같은 기재를 쉬이 놓아줄 리가 없다. 마교의 침입으로 크게 흔들렸을 문파를 다시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그처럼 재능이 넘치는 동량이 필요하니까.
“혹시 그날 일로 다, 단전이 파괴되신 건가요? 아니면 영구적인 상해가-”
벌떡 몸을 일으킨 예결은 손을 뻗어 제하량의 몸을 더듬더듬 만졌다. 의원도 손쓸 도리가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환자라기엔 놀라울 정도로 잽싼 몸놀림이었다.
이처럼 격한 반응을 예상치 못한 하량은 순순히 몸을 내줬다.
예결은 무릎걸음으로 하량에게 더 다가서려고 하다가 침상 가장자리에 걸쳐져 중심을 잃었다. 아무리 에스퍼라도 눈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은 익숙지 않아서 속수무책이었다.
기우뚱, 하고 몸이 휘청이는 감각에 예결은 허우적거렸다.
“……예결아!”
푹, 하고 얼굴이 제하량의 가슴팍에 파묻혔다. 손끝에 천 같은 것이 걸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예결은 자신이 미끄러지지 않으려 버둥거리다가 찢어버린 것이 대사형의 옷임을 깨달았다.
이번엔 눈앞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
야단법석에 눈을 가리고 있던 붕대가 조금 흘러내린 탓이다. 아직 시야가 좀 부옇긴 했으나 제하량의 맨살을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하얗다.’
곤륜파의 문도들은 대체로 피부가 어두운 편이었다. 언제나 산봉우리를 뒤덮고 있는 눈 때문이다.
만년설은 따가운 햇볕을 반사하기 마련이었기에, 그 설산에서 수행하는 이들은 온종일 밭일을 하는 사람보다 더 태양에 그을려 있었다.
전생의 대사형은 개중에 살갗이 흰 편이긴 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로…… 대사형이 곤륜파 소속이 아니라고?’
상처 하나 찾아볼 수 없는 흰 피부에 비로소 실감이 났다. 정말 칼밥 먹는 무인이라면 이렇게 깨끗한 몸을 가질 수 없다.
기묘한 상실감이 예결을 사로잡았다.
“앞이, 앞이 보이느냐?”
하량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의 얼굴이 바투 다가와서일까, 처음 재회했을 때만 해도 어렴풋하게만 보이던 윤곽이 한결 선명해져 있었다.
벽옥을 깎아 만든 양 서늘한 낯의 미남이다. 전생이 너무도 멀어진 후에는 꿈속에서나 간신히 그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예결의 기억 속 대사형이 좀 더 풋풋했다면 지금의 제하량은 보다 성숙해져 있었다. 필경 온갖 삶의 곡절을 겪었을 텐데, 그 굴곡을 찾아볼 수 없다.
“보여요. 조금 흐리긴 하지만.”
“대체 이게 무슨 기적인지……. 데려오는 의원마다 전부 네가 앞을 보지 못하게 될 거라 했는데.”
제하량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기쁨, 혼란스러움과 불신, 그리고 희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예결은 탐욕스럽게 대사형을 살폈다.
상인이 된 후에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가슴은 탄탄했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예결이 바닥에 무너지기 전 부축한 걸 보면 순발력도 여전하다.
‘내공을 잃어서 상인이 된 건 아닌가?’
단전이 없는 예결은 제하량의 경지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무공을 익힌 전생의 예결도 대사형이 이룬 성취를 가늠하지 못했다.
“바로 의원을 데려오겠다. 일단 붕대를 다시. 아니, 일단 눈부터 감고.”
예결은 순순히 눈을 감았다. 하량이 흐트러진 붕대를 정리해주는 게 느껴졌다. 초조한 와중에도 조심하느라 그런지 대사형의 손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어쩌다 곤륜파를 나오게 된 건지 묻는 건 좀 미루자.’
아무리 생각해도 몸이 낫는 게 우선이다. 이대로면 기억보다 심지가 연약한 제 가이드가 걱정으로 졸도할지도 모른다.
가이드를 상대할 때 무해해 보이도록 몸을 바짝 낮추는 건 에스퍼의 기본 소양이다. 아둔하게 제 욕심만 앞세웠다가 버려진 에스퍼의 최후는 대체로 비슷했다. 그들의 후회와 눈물을 모으면 마천루도 세울 수 있으리라.
예결은 그 멍청한 치들처럼 될 생각이 없었다.
“아이고……. 나 죽네.”
“맥을 짚어보거라.”
제하량은 어딘지 모르게 긴장감 없는 목소리의 여인과 함께 돌아왔다.
휘적휘적 침상으로 다가오는 기척에 예결이 몸을 움츠리자 하량이 그를 달랬다.
“이쪽은 삼랑이라 한다. 네게 해가 될 짓을 할 사람은 아니다.”
“안녕하세요. 주- 크흠. 제 상단주님을 모시고 있는 삼랑이라고 합니다.”
모르는 인물, 그것도 여자의 등장에 예결은 새삼 이곳이 곤륜파가 아님을 느꼈다. 구파일방 중 소림과 무당, 그리고 곤륜파는 여성 문도를 받지 않는다.
“진맥을 받는 거야 상관없지만…….”
예결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동안 대사형이 손을 잡아주시면 안 될까요?”
사심 반, 흑심 반 섞인 부탁이었다.
환자니까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된다고 생각하며 제하량이 서 있는 쪽을 바라봤다. 눈이 가려진 채였으나 에스퍼의 감각은 제 가이드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감지해낸다.
마치 새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아는 것처럼.
“어려울까요?”
“아니. 그럴 리가.”
제하량이 그 말과 함께 다가서서 예결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진맥을 위해서인지 겸사겸사 몸을 안아 일으켜주는 손길에 얼씨구나 하고 응했다.
슬쩍 뒤로 기대니 단단한 대사형의 가슴팍이 예결을 지탱해줬다.
“으음. 이제 진맥을 볼 테니 너무 놀라지 마셔요.”
삼랑이라 소개한 여자가 손목을 잡아왔다.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 정도로 차가운 손이었다. 순순히 맥을 내주긴 했으나 만약 대사형이 없었더라면 저도 모르게 쳐냈으리라.
“……오. 내가 이렇게 끝내주는 명의였나?”
환자를 살핀 의원의 소견치고는 독특했다.
“분명 기혈이 다 뒤틀려 있었는데 며칠 정양했다고 멀쩡해졌네요? 뼈도 다 붙은 거 같고. 이거 이상하네…….”
“다 나았다는 건가?”
하량이 초조한 투로 물었다.
“좀 쇠약하긴 하지만, 이 정도면 몸살 걸린 환자 수준입니다. 상단주님. 이 정도면 연무장 좀 돌아서 땀 빼고 푹 자면 나아요.”
그 무식한 처방에 예결은 삼랑이 정말 의원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선량한 대사형이 자신에게 가짜 의원을 데려왔을 리는 없으니 저 여자가 사기꾼일지도 모른다.
“눈도 확인해야 하는데, 가장 근거리에 있는 의원은?”
“홍여가 사흘 밤낮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홍여는 또 누군가 싶었으나 예결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하루 정도 거리에 의원이 하나 있지 않았나?”
“며칠 전에 들이닥친 무뢰배 때문에 사천으로 기반을 옮겼다네요. 세상이 하도 수상해 정말 큰일이어요.”
삼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럼 홍여에게 의원을 데려오라고 전해라. 내 말을 데려가도 좋다고 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네에.”
삼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에 그녀가 나갔다는 사실을 확인한 예결은 하량에게 물었다.
“삼랑이라는 분은 의원이 아닌가요?”
“의원 같은 건 아니지만 재주가 많은 이다. 상단 일을 도와주고 있지.”
“그분과 오래 알고 지내셨나요?”
예결의 어깨를 지탱하고 있던 하량의 손이 잠시 멈추더니 이내 그를 눕혔다.
“호기심이 많구나.”
꼬치꼬치 캐묻는 예결에 대한 질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새삼스러운 마음에 뇌까리는 혼잣말에 가깝다.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던 예결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제하량의 손길에 천천히 긴장을 풀었다.
“몇 년 되었지.”
몇 년.
두루뭉술하다. 일부러 감추려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보다는, 딱히 삼랑을 만난 게 언제인지 헤아린 적이 없는 기색이다.
예결은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대사형은 내가 죽은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어서 의원이 왔으면 좋겠다. 그가 붕대를 벗어도 된다고 말해주면, 대사형의 얼굴을 보면서 온갖 질문을 던져볼 텐데.
치밀어오르는 조바심을 삼키며 예결은 저를 다독이는 하량의 손을 꼭 붙잡았다.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주세요.”
수마가 다시 밀려오고 있었다. 의식이 끊어지기 전, 예결은 붕대 너머 대사형의 인영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볼 수 있었다.
***
잠든 예결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올라가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냈다.
이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제하량은 어느덧 길어지는 그림자에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 너머로 천천히 내려앉는 땅거미가 보였다.
시비가 한 아름 가져다 놓은 초를 들어 올린 하량은 이를 예결의 침상 근처에 내려놓았다. 불을 피우려는데 성냥이 보이지 않아 그는 혀를 찼다.
성냥을 가지러 가자니 잠든 예결과 한 약속이 마음에 걸렸다.
‘혼자 두지 않기로 했지.’
붕대가 잘 감겨 있는지 확인한 하량은 아무것도 없는 손바닥 위에 불을 피웠다.
삼매진화(三昧眞火)였다.
일정한 경지에 오른 고수만이 사용할 수 있는 삼매진화를 고작 초에 불을 붙이기 위해 피워올리고 있었다. 곤륜에서 파문당해 상인이 된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성취였다.
예결이 깨어나지 않게 조심조심 초에 불을 붙인 하량은 어둠을 막을 빛이 충분히 확보된 뒤에야 삼매진화를 거뒀다.
이윽고 하량은 침상의 곁에 가져다 놓은 교의에 앉아 촛불의 불빛이 예결의 뺨에서 어른어른 춤추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시간이었다. 하량이 여태 겪어온 모든 일이 무(無)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눈앞의 아이가 자연스럽게 늙어간다면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하염없이 꿈꾸곤 했다. 별로 대단치도 않은 버릇 같은 거였다. 본인의 미래 같은 건 헤아릴 수 없으니, 결코 오지 않을 타인의 미래를 점쳐 보면서 고단하고 한없이 지겨운 시간을 지새웠다.
그 때문일까, 하량은 예결을 다시 만난 순간 그가 자신이 알던 모습보다 성장해 있음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간 사제는 어떤 일을 겪었을까? 제하량은 예결이 자신을 대신해 죽었다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그 시신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제하량이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예결의 죽음을 파헤치기엔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하여 하량은 그날의 참사와 함께 그 어렸던 소년을 제 가슴에 묻었다.
이런 몰골로 재회하게 될 줄도 모르고.
명백한 폭력의 흔적이 존재했던 몸, 뒤틀린 기혈과 파괴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단전, 단련의 흔적이 전부 사라져서 가냘파진 팔다리, 무공의 성취가 없음에도 젊은 나이에 고정된 외견, 곤륜혈사가 있던 그 날로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던 두 눈과 오로지 어둠 속에서만 사제를 집어삼키던 악몽의 자취.
그리고 이 비정상적인 회복력.
“잘 자렴.”
서늘한 눈을 한 사내는 부드러운 뺨을 조심스레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더는 아프지 말고, 악몽에도 시달리지 말고…….”
잠든 이에게 불러줄 만한 자장가는 한 소절도 기억해낼 수 없었다. 그래도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사제를 집어삼키러 오는 괴로움만은 대신 찢어발길 수 있으리라.
제하량은 그걸로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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