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6화 (6/203)

6화. 거자필반(去者必返) (5)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장원은 고요하면서도 이질적이었다. 보통이라면 녹림의 산채가 지어질 법한 곳이었음에도 장원을 세웠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외부와 유리된 비밀스러운 장원의 중정을 한 사내가 거닐고 있었다. 얼핏 평범한 문사처럼 차려입은 그는 특별할 게 없어 보였다. 만약 움직일 때마다 단정하게 여민 옷깃 아래로 우둘투둘한 상처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무언가 고심하는 눈치의 남자는 검은 옷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힐끗 시선을 던졌다.

“어딜 다녀오십니까?”

삼랑이 밖을 돌아다니는 건 드문 일이었다.

“홍여한테 다녀오는 길.”

딱 속이 터지지 않을 정도로 느릿느릿한 답이었다.

“홍여? 갑자기 그는 왜?”

“주군이 의원 한 명을 정중히 데려오라고 하셔서.”

은근히 납치를 암시하고 있었으나 삼랑의 음성에는 긴장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의원 말입니까? 그 환자가 깨어났습니까?”

남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주군의 품에 안겨 왔던 사내는 당장에라도 픽 죽어나갈 것처럼 연약해 보였고 실제로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태였다.

한데 의원이라니, 살아나기라도 한 걸까?

“오는 의원마다 두 손 두 발 다 들어서 내가 딱 숨만 잡아두긴 했는데, 정말 살아났지 뭐야.”

삼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음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접할 기회가 많았던 그녀는 누가 죽을지, 누가 살지 알아보는 능력이 있었다.

한데 그녀의 예측이 빗나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살수가 아니라 의원을 해도 배부르게 먹고 살았겠네. 청해신의 삼랑! 어때? 멋지고 돈 많이 벌 거 같지 않아?”

동료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남자가 살아남은 게 당신 실력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실제로 반선 소리 듣는 신의도 포기한 환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치 않다. 사실 첫 등장부터 그랬다.

그들의 주인은 일 년에 한 번, 곤륜산으로 갔다. 비록 곤륜파에 오르지는 못해도 산의 발치를 휘도는 강가에서 술을 흘려보낸 후에야 제하량은 곤륜을 떠났다.

여느 때처럼 가장 좋은 술 한 병을 들고 곤륜을 찾은 제하량은 강가에서 쓰러진 이를 발견했다. 주군이 그를 다급하게 안아 올리기 전까지만 해도 진영은 그것이 시체라고 생각했다.

제하량이 경공을 전개하며 청해의 안가로 의원을 데려오라 이르기 전까지 말이다.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는 의원을 붙들고 환자를 살려놓으라 하는 주군의 모습은 그를 가장 오래 모셔 온 진영이 보기에도 낯설었다.

“그 혈사(血史)에서 살아남은 자가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하필 주군이 곤륜을 찾는 날 모습을 드러내다니, 너무 공교롭지 않습니까?”

미간을 잔뜩 좁힌 사내의 모습에 삼랑이 혀를 찼다.

“진영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야.”

“그러는 당신은 생각을 너무 안 하죠.”

신랄한 독설에도 삼랑은 별 타격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심각할 필요가 있어? 문제라도 있으면…….”

말꼬리를 흐린 삼랑은 싱거운 낯으로 웃으며 덧붙였다.

“주군이 알아서 치우시겠지.”

본인의 밤잠도 줄여가며 살려놓은 환자에게 하는 말치고는 차갑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주군이 안 치울 거 같으니 이러지요!”

진영은 갑갑한 마음에 일갈했다. 그들의 주인에게는 옛 인연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여태까지 제하량은 그 모든 걸 무심히 흘려보냈다.

한데 이번만은 달랐다.

“하면 지켜봐야지. 잊었어?”

처진 눈꼬리에는 매서움일랑 한 자락도 느껴지지 않았다.

“판단하는 건 주군이야. 괜히 애먼 데 힘 빼지 마.”

조언 아닌 조언을 건넨 삼랑은 총총걸음을 옮겼다. 긴장감 없는 목소리 탓에 경고가 와닿지 않아 진영은 두 팔을 늘어뜨렸다.

“이게 주군을 노린 정파 놈들의 함정이면 어쩌려고……. 하여간 나만 속 태우지. 나만.”

혼잣말로 투덜투덜 뇌까린 그의 시선은 주군이 머무르는 전각으로 향했다. 제하량은 침식조차 잊은 채 ‘손님’의 곁을 떠나질 않았다.

“곧 돌아가야 할 텐데…….”

걱정에 중얼거리던 그는 이내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삼랑의 말처럼 결정을 내리는 건 주군이지 자신이 아니었다. 주군이 이 외딴 장원에 체류하겠다면 이를 돕고,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사람을 살리려 들거든 시왕의 멱살 잡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수하의 도리였다.

‘부디 별일 없기를.’

귀환이 늦어지게 된다면 처리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진영은 삼랑이 간 방향의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

“이 환자가 눈이 안 보였단 말입니까? 피가 계속 흘렀다고요?”

예결의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던 의원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의원이 시키는 대로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던 예결은 슬슬 지겨웠지만 양순한 척 눈을 내리깔았다.

“일전에 환자를 보인 의원 다섯의 소견이 모두 같았네.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니 사기꾼도 아니겠지.”

곁에서 지켜보던 제하량이 서늘한 음성으로 답했다. 예결은 슬쩍 사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곤륜파의 도복이 아니라 어두운 푸른색 비단옷을 입은 대사형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뿐이랴, 누굴 대하든 항상 스스로를 낮추던 겸허한 성품의 대사형에게서 묘하게 고압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상대를 업신여겨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뭔가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익숙해진 사람처럼 보였다.

‘언젠가는 곤륜파 장문인이 될 분이긴 했지. 그게 아니더라도 곤륜제일검 정도는 따 놓은 당상이었고.’

속으로 그리 뇌까리면서도 치미는 위화감을 속일 길이 없어 예결은 이를 꾹 삼켰다.

“뭐, 그럼……. 환자분이 의원 말을 잘 듣고 약도 잘 처방받아서 회복된 모양입니다.”

의원이 긍정적인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이곳이 한국이고 가이딩을 잘 받은 상태라고 가정해도 지금 예결의 회복 속도는 과하게 빨랐다.

‘대사형과 내 파장이 지나치게 잘 맞아.’

굳이 매칭률을 검사하는 기계에 들어가지 않아도 이를 확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폭주한 에스퍼가 살아 돌아온 것 자체가 기적의 범주에 드는 사건이다. 심지어 그들은 몸을 섞기는커녕 입을 맞춘 적도 없다.

고작 손을 잡은 게 다인데, 이 정도의 회복 속도라니.

‘여기가 중원이 아니라 21세기의 한국이었다면 대사형은 정치적인 이유로 매칭 테스트조차 금지된 고등급 가이드였겠지.’

예결은 말끔해진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 모든 건 제하량이 S급 가이드라면 설명이 된다.

가이드보다 에스퍼의 등급이 높아도 파장만 맞는다면 가이딩 효율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하물며 고등급 가이드라면야,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사형에게 딱 붙어 있어야 한다.

매칭 가이드는 에스퍼의 인생에 단 한 번만 찾아온다는 행운이었다. 심지어 여기는 한국도 아니라 중원이다. 매칭 테스트를 돌릴 기기나 센터가 확보한 가이드의 파장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가이드를 찾고자 한다면 예결은 온 중원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 모두와 신체적 접촉을 해야 한다.

‘차라리 한양에서 김 서방을 찾고 말지.’

중원의 크기를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했다. 예결의 삶 전부를 바쳐봤자 중원의 반의반도 못 돈다. 아니, 그 전에 죽을 거다. 봉인이 풀린 이상 에스퍼로서의 능력이 발현된 예결은 서서히 망가질 일만 남았다.

예결은 집요함을 애써 감추며 하량을 바라봤다.

대사형이 파문당했다 한들 그들은 본디 사형제 관계였다. 그로부터 가이딩을 받는다는 건 기사멸조의 죄를 짓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다. 행여 세간에 알려졌다가는 곤륜파를 욕되게 했다는 죄로 사지근맥이 잘리고 뇌옥에 갇혀도 할 말이 없다.

사형을 탐하는 사제라니.

과연 제하량처럼 고지식한 인간이 자신을 받아들여 줄까? 만약 자신을 거부한다면 손이나 슬쩍 잡는 걸로 만족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얼어 죽을 기사멸조 때문에 대사형을 포기하기엔 제 코가 석 자라는 점이다.

예결은 살짝 가라앉은 눈으로 제하량을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방긋 웃었다. 전생의 자신이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진 않았으나 조금이라도 선량해 보이고 싶었다.

대사형은 그런 사람을 좋아할 테니까.

“앞으로 강한 빛만 조심하면 별문제가 없을 겁니다.”

의원의 말에 예결은 제 결심을 고이 접어 숨기며 그가 침을 챙기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니 웬 곰 같은 사내가 봐야 할 환자가 있다며 나를 들쳐메고 말 안장에 매달 때만 해도 죽는 줄 알았는데.”

처음 방에 들어올 때만 해도 희게 질린 얼굴이었던 그는 너스레를 떨었다. 생각보다 유한 분위기에 긴장이 풀리긴 한 모양이었다.

“이런, 정중히 모셔 오라 일렀는데 중간에 말이 잘못 전달된 모양입니다. 하지만 환자의 상태가 워낙 위중했었으니……. 부디 그의 실례를 이해해 주십시오.”

대사형은 묵직해 보이는 전낭을 의원에게 건넸다. 예결은 그 자연스러운 손놀림에 감탄했다. 본디 그가 알던 과거의 대사형은 올곧고 정직한 사람이었지 이처럼 처세술이 좋은 이는 아니었다.

세월은 참 많은 걸 변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예결은 의원을 배웅하는 대사형을 지켜봤다.

의원이 나가자마자 문을 탁 닫는 소리가 퍽 단호하게 들렸다. 돌아온 제하량의 낯에는 안도보다 수심이 더 크게 자리했다.

“대사형?”

예결이 그를 부르자 제하량은 걱정에서 깨어난 듯 이쪽으로 시선을 건넸다. 감정을 채 갈무리하지 못한 검은 눈이 깊어 마치 무저갱 같았다.

역시 낯설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의원도 제가 다 나았다고 했잖아요.”

“당연히 네가 회복된 건 기쁘지.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구나. 그 숱한 의원이 다 입을 모아 실명이 확실하다고 말했는데…….”

성큼 다가선 사내의 그림자가 예결의 위에 드리웠다. 그리 어둡지도 않은데 한순간 저 그림자에 집어삼켜지기라도 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문제가 생겼는데 찾지 못한 거면 어쩌지?”

제 손을 붙든 채 낮게 속삭이는 대사형의 질문에 예결은 그저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제하량이 이렇게 종종 손만 잡아준다면 잔병치레 같은 건 하나도 하지 않고 장수할 거라는 말을 어찌한단 말인가?

여긴 중원이라 에스퍼나 가이드에 대한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가이딩이 무언지 설명하더라도 결국 사술 취급이나 받을 것이다.

‘입맞춤으로 뒤틀린 기혈을 진정시키고 힘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하면 채음보양술 같은 취급을 당하겠지.’

정작 무림 고수는 맨손으로 돌을 순두부 자르듯 숭덩숭덩 자르고 물 위를 뛰어다니고 하늘을 날 수도 있으면서 말이다.

“괜찮을 거예요. 저를 이렇게 생각해 주시는 대사형이 있으니까요.”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이렇게 자신을 신경 써주는 가이드가 있는 에스퍼는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

가이딩 한 번에 삶의 의지마저 강제당한다며 질색하는 에스퍼도 더러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 같다고. 그러나 가이드가 없어서 하루하루 천천히 바스러지는 에스퍼를 보고 있노라면 그건 배부른 소리였다.

가이드는 에스퍼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에스퍼는 가이드가 없으면 죽는다. 살고자 할수록 더 비참한 몰골로 죽어가는 에스퍼가 해마다 한둘은 꼭 있었다.

각성하자마자 봉인을 받은 예결은 능력자 센터를 드나들며 여러 에스퍼를 접할 수 있었다. 고등급 에스퍼이면서도 발현 직후에 능력이 봉인될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었다. 한 에스퍼는 매칭 가이드를 찾기 전까진 절대 봉인을 풀지 말라고 충고했다.

“전 언제까지 침상에만 있어야 하나요?”

예결은 슬쩍 눈치를 보며 물었다. 회복을 위해 누워 있는 동안 그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대사형과 몇몇 의원이 전부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한데 제하량은 이상하리만치 말을 아꼈다.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 묻지도 않을뿐더러, 본인에 관한 이야기도 삼갔다.

그저 상인이 되었다는 말 외에는.

“글쎄.”

하량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어둑한 시선 탓일까, 이 잠깐의 침묵이 한없이 의미심장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회복이 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겠구나.”

‘감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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