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거자필반(去者必返) (6)
그럴 리가.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예결은 피식 웃을 뻔했다. 뭇 에스퍼의 소원이 가이드에게 함부로 취급당하는 거긴 하지만 예결이 아는 제하량은 죽었다 깨나도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대사형은 곤륜파의 장로조차 한 수 접을 정도로 바른 생활 청년이었다. 자신처럼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게 아니고서야 사제가 좀 아프다는 이유로 감금할 인간은 못 된다.
“붕대를 풀 즈음엔 밖에 나가도 되나요?”
순순히 한발 물러난 예결의 질문에 제하량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원한다면.”
‘좋다 말았네.’
흔쾌한 허락을 받았음에도 예결은 아쉬움을 느끼며 배시시 웃었다.
어차피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많이……. 갑갑한가?”
하량의 망설임이 느껴지는 질문에 예결은 고개를 내저었다.
“대사형이 이렇게 살펴주시는데 그럴 리가요. 그냥, 아직 좀 혼란스러운가 봐요.”
야금을 붙잡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괜찮다. 괜찮아.”
하량이 그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었다. 조금은 망설임이 깃들어 있긴 해도 조심스럽기 이를 데 없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일단 완전히 회복되는 것부터 생각하자꾸나. 체력이 좀 붙으면 해가 진 후에 장원을 구경시켜 주마.”
미끼를 살살 흔들고 구슬리는 솜씨가 일품이라 생각하며 예결은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형이 상인이 되었다니 곤륜파에 돌아갈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지내게 될 장원을 둘러볼 필요가 있었다.
‘어찌해야 대사형의 상단에 남을 수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장래 희망을 상단의 일꾼으로 정해버린 예결의 새 고민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건 그의 주변 인간관계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제하량처럼 완벽한 남자가 영원히 혼자일 리가 없다.’
곤륜파는 도가 계열의 문파로 혼례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사형이 말하길 그는 파문당해 곤륜파에 돌아갈 길이 없고, 지금은 상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제하량은 곤륜파의 대제자였던 시절에도 온갖 염문이 따라붙던 사내였다. 한데 더는 도사도 아니게 된 지금, 어느 여자가 그처럼 잘난 사내를 가만히 두겠는가?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일단 내 외양에 큰 의문을 품지 않으시는 걸 보니 시간이 흐르긴 했어도 십 년까진 안 지난 눈친데…….’
열일곱 살이던 전생과 스무 살인 지금의 예결은 본인도 신기하게 느낄 정도로 같은 얼굴로 태어났다. 다만 자라난 환경 때문에 요모조모 뜯어보면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곤륜파에 입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고아로 자라 항주의 거리를 전전하는 거지였던 전생에서는 못 먹고 자란 탓에 체구가 왜소한 편이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예결은 성숙한 태가 났다. 전생의 열일곱엔 이미 성장이 멈춘 상태였으나 지금의 예결은 스무 살이 되도록 키가 계속 컸다. 부모님이 멀쩡히 살아 계신 덕에 배를 곯을 일이 없었을뿐더러 S급 에스퍼로 발현한 사건이 영향을 주었으리라.
키 외에도 다른 점이 있다면 눈 색과 체모가 전생보다 밝은 편이긴 했다.
만약 전생에 예결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면 그 차이를 두드러지게 느꼈으리라. 하나 다행스럽게도 곤륜의 대제자 제하량은 막내 문예결과 멀고 먼 사이였다. 대사형이 곤륜파의 젊은 영웅이었다면 예결은 애물단지 막내였으니까.
같은 사람이라는 걸 파악할 수는 있어도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잘 알지는 못하는, 딱 그 정도의 거리감이 존재했다.
그 덕에 아직 의심받지 않는 거다.
‘마교가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대사형의 뇌리에 나 같은 인간이 남아 있기는 했으려나.’
현 상황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린 예결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제발, 원시천존이시여. 대사형이 상단 업무 때문에 바빠서 고운 소저를 만날 겨를이 없었다고 해주세요. 아니면 저 고지식한 대사형이 파문당한 후에도 곤륜파의 가르침을 지켰다고…….’
예결이 이십 년 만에 원시천존을 찾으며 올리는 기원이 뭔지 짐작도 못 할 제하량은 입을 열어 질문을 건넸다.
“……혹 누가 네가 이런 짓을 했는지 기억하느냐?”
목소리를 살짝 낮춘 제하량은 아이를 어르듯 말을 걸어왔다.
“이름이라든가, 혹 이름을 모른다면 생김새라도 좋다.”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느낌이 드는 음성이었다.
“그게…….”
예결은 마른 입술을 살짝 핥았다. 가이드가 원한다면 심장이라도 꺼내줄 수 있으나 이건 좀 다른 문제였다.
자신을 여기까지 몰아붙인 흉수는 이미 번갯불로 튀겨 버렸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 시체를 찾으려 해도 차원 이동을 해버려서 여기엔 없다는 건 또 어떻게 설명하고?
아직은 착한 사제로 남고 싶었다. 그래야 저 책임감 강한 대사형이 자신의 주변을 맴돌 게 아닌가?
무엇보다도, 제하량에게 미친놈 취급받기는 싫었다.
‘몸이 너무 빨리 회복됐어. 쓸데없이 건강해서 큰일이군.’
내심 투덜거린 예결은 분주히 머리를 굴려 해결책을 찾아냈다. 같은 센터에 다니던 에스퍼 형이 그에게 알려준 비기였다.
“……아!”
눈을 도르륵 굴린 예결은 이마를 짚었다. 급작스레 휘청거리는 몸에 하량은 예결을 부축했다.
“결아!”
자연스럽게 그의 너른 가슴에 머리를 기댄 예결은 숨을 골랐다. 하량은 다급한 손길로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일부러 거칠게 들썩거린 어깨를 차분히 가라앉히자 상대방이 안도하는 게 느껴졌다.
이제부터는 완급 조절이 중요하다.
“잘……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는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던 시선을 오롯이 하량에게만 고정했다.
“분명 무서웠고, 그러다가 대사형을 보고 안도한 기억은 나는데, 으…….”
예결은 콱 피라도 났으면 좋겠다는 심경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한데 힘을 주기가 무섭게 제하량의 손가락이 그 사이를 밀고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가이드의 손가락을 깨물었다는 생각에 아차, 하고 힘을 풀려는데 입 안에 닿은 살갗에서 가이딩 에너지가 전해져 왔다.
달다. 너무도 달아.
예결은 홀린 듯 하량의 손가락을 핥아버리고 말았다. 이대로 빨아보고 싶었으나 그를 품 안에 가둘 정도로 덩치 큰 사내의 몸이 움찔 떨리는 게 전해졌다.
‘너무 나갔나.’
예결은 그야말로 피눈물을 삼키며 손가락을 입에서 놓아줬다.
“입술을 깨물다니!”
분명 동요했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양 엄한 음성으로 야단을 치는 제하량을 보며 예결은 아쉬움에 혀를 찼다.
역시 쉽지 않은 인간.
“그러다가 피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걱정 가득한 음성에 예결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대사형 덕에 저는 멀쩡한데, 대사형의 손가락에 잇자국이 남아서 어떡하죠?”
계속 흘깃거리지 않기 위해 눈을 내리깔긴 했으나 주체할 수 없이 차오르는 흑심까지 참아내기 어려웠다.
“침을 바르면 빨리 낫는다고 들은 거 같은데…….”
그 핑계로 한 번만 핥아보면 안 될까…….
처량한 시선을 건네자 제하량이 괜찮다는 듯 손을 내줬다.
“보렴. 피 같은 건 안 났단다. 그냥 자국만 남은 거니까 걱정 말거라.”
예결은 사양하지 않고 그의 손을 덥석 잡아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이제 폭주의 후유증도 가셨는데, 계속 닿아 있고 싶었다.
“정말 피는 안 났네요. 다행이에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말꼬리를 흐린 예결은 아쉬움 가득한 손짓으로 제하량의 손을 놓아주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참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짓의 연속이다.
처음 이 내숭을 전수받을 때만 해도 도통 선배 에스퍼의 당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에스퍼가 왜 이런 짓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가이드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거야.’
당시엔 선배 에스퍼의 말에 코웃음 쳤는데, 이젠 알 거 같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나보다는 네 걱정을 해야지.”
이마를 아프지 않게 톡 건드린 제하량의 손가락에 예결의 가슴이 간질거렸다.
나비가 심장께에 내려앉아서 날개를 파닥이는 것 같다.
왜 이렇게 좋을까? 그가 내 가이드라서? 아니면 목숨을 걸고 지킨 우상이 살아 있음을 이렇게 매 순간 실감하고 있어서?
예결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서 나아야 돌아갈 수 있지 않겠니?”
“어디로요?”
대사형의 말에 예결은 저도 모르게 멍청한 얼굴로 눈을 끔벅였다.
돌아간다니, 중원에서 나고 자란 전생의 예결은 고아였다. 게다가 이번 생의 부모님은 살해당하지 않았나.
제 상황에 딱 들어맞지 않는 표현이 껄끄럽게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제하량은 폭탄을 떨어뜨렸다.
“곤륜으로 돌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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