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8화 (8/203)

8화. 집도 절도 없는데 이젠 가이드도 없는 (1)

정원 한구석에 쭈그려 앉은 예결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제하량이 날벼락을 떨어뜨린 지 꼭 일주일이 지났다. 그사이 예결의 몸은 아주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다시 앓아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가이드가 딱 달라붙어 있는 에스퍼의 몸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질 리가 없다.

힘을 물 쓰듯이 쓰면 비실거릴 수야 있지만, 문제는 예결이 S급 에스퍼라는 사실이었다.

몸이 나빠질 정도로 능력을 끌어 올리면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치는 진풍경이 펼쳐질 게 안 봐도 뻔했다.

중원은 사람 목숨을 파리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곳이다.

지금의 예결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몸이었다. 에스퍼의 신체 능력이 일반인을 아득하게 초월한다지만 높은 경지의 무인을 상대로 싸웠을 때 누가 이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제 한 몸을 건사하기 위해서라도 힘을 숨겨야 했다.

무엇보다도, 예결은 이레 전 오늘 대사형에게 들은 말을 잊을 수 없었다.

‘나는 갈 수 없지만, 너는 돌아갈 수 있을 거란다.’

그리 말하는 제하량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간절하기까지 했다.

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곤륜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반박하려 했던 예결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대사형도 없는 곤륜파에 무엇 하러 돌아가냐는 질문이 오도 가도 못 한 채 예결의 속만 시커멓게 태웠다.

마음 같아서는 죽어도 못 간다고 바닥에 드러눕고 싶은데, 그때 본 대사형의 얼굴만 떠올리면 도무지 고집을 부릴 수가 없다.

본인은 더 이상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문으로 간신히 되찾은 사제를 돌려보내고 싶은 제하량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말 듯 어렵기만 했다.

짐 덩어리처럼 느껴서 확 쫓아내려는 거라면 모르겠는데, 제하량은 진심으로 예결을 위해 그를 곤륜파로 돌려보내려는 기색이다.

‘이럴 때 어디에서 게이트 하나 안 터지나…….’

센터에서 만난 선배 에스퍼가 게이트 차출 명단 최상단에 자기 이름을 올려놓는 것도 봤다. 각방 선언한 자기 가이드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인명 피해가 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을 탈수기에 넣은 빨래처럼 쥐어짜 줄 게이트를 띄워달라며 온갖 신을 찾는 꼬락서니가 정말 한심해 보였다. 그런데 제 차례가 되니 이게 마냥 비웃을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이쪽은 기간제 각방도 아니다. 중원의 교통과 통신을 생각하면 영원히 헤어질 수도 있는 비상사태였다.

‘대사형에게서 떨어지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예결은 바닥에 난 풀을 아무렇게나 쥐어뜯으며 한숨을 쉬었다.

길어야 반년?

운이 좋아서 힘을 쓸 일이 없다면 말이다. 그리고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할 거다. 힘을 밖으로 쏟아내지 않아도 계속 몸 안에서 휘돌고 있을 테니까.

에스퍼의 몸은 안 써도 방전되는 건전지와 비슷하다. 이래서 에스퍼는 가이드를 찾기 전까지 봉인을 유지할 것을 권장받는다. 제대로 된 가이드 없이는 천천히 죽어갈 뿐이니까.

“그건 잡초가 아닙니다만.”

고개를 돌리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저번에 목소리를 들은 삼랑은 여자였으니 다른 사람이겠구나 싶었다.

“누구세요?”

예결은 풀물이 든 손을 슬쩍 옷소매에 숨기며 물었다. 화풀이하다가 그 현장을 들켰으니 찔리는 척이라도 하려는 심산이었다.

“위진영이라 합니다. 상단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척 보기에도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다. 생김새만 봐서는 무인이라기보다는 학자에 가까워 보였다.

“대사형이 오실 줄 알았는데.”

자연스러운 하대에도 상대의 낯빛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상단주님께서 업무가 바쁘신지라.”

“아아. 일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

“상단주님께서는 잠잘 시간도 줄여가면서 손님의 곁에 매달려 계셨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고 한마디 해줄 법도 한데 위진영이라는 사내는 딱딱한 투로 답했다.

솔직한 성격인 건지 자신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저렇게 뻣뻣하게 구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대사형이 책임감이 강한 분이긴 하지.”

“그러게 말입니다.”

“부리는 수하가 유능하면 상단 일 때문에 그리 고생하실 필요는 없으실 텐데.”

예결은 여 들으라는 양 한숨을 폭 내쉬었다. 위진영은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눈을 부라렸다.

‘뭐 어쩌라고.’

모든 에스퍼가 성격이 파탄 난 건 아니었으나 예결이 아는 에스퍼는 전부 제멋대로에 재수가 없었다. 이는 예결 그 자신까지 포함한 결론이었다.

‘기분 더러운 김에 잘 걸렸다.’

물론 생각 없이 내지른 건 아니었다. 예결은 이 위진영이라는 남자가 대사형에게 고자질을 하지 못하리라 확신했다.

중원에서 깨어난 이래 예결은 시비 한 명 보질 못했다. 옷부터 시작해 음식이며 목욕에 이르기까지 대사형이 모든 시중을 들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대사형 외에 만난 인간이라곤 삼랑이라는 여인과 의원 딱 두 명뿐이다. 그나마도 하량이 곁에 있었고.

한데 이 위진영이라는 남자가 정말 대사형이 없을 때 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을까?

‘그럴 리가.’

예결은 속으로 픽 웃었다.

“대사형은 내가 많이 걱정되셨나 봐. 일이 바쁜 중에 수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다 보내주시고.”

“상단주님께서 보내신 건 아닙니다. 다만.”

남자가 흘깃 예결의 눈을 바라봤다.

“아직 볕이 강한 시간인데 손님이 밖에 계시기에 가까이 와서 확인하려 했습니다. 눈이 회복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라며 상단주님께서 종종 걱정하셨거든요.”

아, 그래서.

예결은 상대에 대한 적의를 조금 거뒀다.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모를 개뼈다귀를 관찰하러 온 줄 알았더니, 의외로 걱정해서 찾아온 모양이었다.

“상단주님께서 종종 언급하시던 바와 달리 건강해 보이십니다. 다행이군요. 곤륜의 산세가 오죽 험해야지 말입니다.”

‘내가 다 나으면 곤륜파에 가게 될 걸 알고 있네?’

예결의 입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어차피 떠날 인간이라 걱정씩이나 해준 모양이다.

이 정도 긁어대는 건 가렵지도 않지만 사형에게서 뚝 잘려 나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심보가 뒤틀렸다.

“대사형이 걱정이 오죽 많으셔야 말이지. 잔기침 몇 번만 해도 부랴부랴 창을 닫고 물을 덥혀 오시고……. 솜을 넣은 금침을 가져오시는데 땀이 나서 죽는 줄 알았지 뭐야.”

대사형이 알차게 시중을 들었다는 말을 흘리니 위진영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예결과 진영은 한동안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를 노려봤다.

“그런데 당신 생각에는 대사형이 언제쯤 오실 거 같아?”

질문처럼 내뱉긴 했으나 말을 오래 섞어봤자 신경전만 벌일 테니 얼른 떨어지자는 제안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는 오실 겁니다.”

진영은 순순히 답했다. 예결은 바로 꺼져주겠다는 말에 방긋 웃었다.

“만나서 반가웠어. 이건 선물.”

척 보기에도 깔끔 떠는 위진영의 손에 흙이 잔뜩 묻은 화초가 놓였다. 예결이 화풀이 삼아 뜯은 풀이었다.

“다음에 또 보자고.”

손을 팔랑팔랑 흔드는 예결의 축객령에 진영은 고개만 까딱하고는 성큼성큼 정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좀 거리가 벌어지기가 무섭게 위진영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아끼는 옷의 소매에 풀물이 번진 게 보였다.

밥 주던 고양이에게서 쥐라도 선물 받은 기분이다.

“하하…….”

분명 주군은 이 ‘손님’이 세상에서 둘도 없이 선량한 아이라고 말했다. 진영도 어느 정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어떤 목적이 있다면 이를 달성하기 전까지는 무해함과 선량함으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건 뭐, 독 오른 족제비가 따로 없지 않나.

“주군……. 대체 뭘 데리고 오신 겁니까…….”

졸지에 떠맡게 된 풀뿌리를 울적하게 내려다보던 위진영의 낯이 울적해졌다. 그는 터벅터벅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가 당도한 건물 앞에는 칠 척이나 되는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손에는 조각칼과 나무토막을 든 채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남자의 몸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담벼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손바닥보다 작아 보이지만 무척 정교한 말 조각상이 몇 개나 놓여 있었다. 망아지부터 시작해서 준마라 불릴 법한 덩치 큰 말이 화목하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에 흘깃 시선을 준 진영이 입을 열었다.

“홍여, 주군은 안에 계신가?”

조각을 멈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영처럼 제하량의 수하인 야율홍여는 말수가 극도로 적은 사내였다.

“……화분.”

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기려는 진영은 제 발을 붙든 말에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풀 쪼가리를 아직도 손에 쥐고 있었다. 홍여처럼 인상이 사나운 남자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바닥에 내팽개치기도 그랬다.

결국 진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화분이 어디 있지?”

오래지 않아 건물에 들어선 진영의 팔에는 화분이 안겨 있었다. 손님이 뿌리째 뽑아서 건네주긴 했으나 반쯤 쥐어뜯긴 화초는 홍여의 손을 거치자 처음보다 훨씬 깔끔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손이 그렇게 크고 두꺼운데 섬세한 일을 잘도 한단 말이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진영은 한 방의 문 앞에 멈춰 섰다. 들어가겠다는 허락을 구하기도 전에 진영의 앞에 놓인 장지문이 스르륵 열렸다.

조금 긴장한 진영은 화분을 꼭 끌어안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창가에 놓인 책상 앞에 서늘한 미남이 앉아 있었다. 수려한 외양과 어우러지는 위압감, 그리고 무표정한 낯은 그에게 남다른 이질감을 부여했다.

저 안에 깃든 게 무엇인지 모르는 이라도 주춤 물러서서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으리라.

“주군. 신강에서 도착한 소식입니다.”

진영은 이곳에 온 용건을 단도직입적으로 전했다.

“마도육가가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적어도 두 가문 이상이 손을 잡은 눈치입니다.”

하량이 이 시기에 자리를 비운다는 건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한데 외부에서의 체류가 길어지니 그동안 밟히고 밟힌 벌레가 꿈틀거리는 게다.

“여덟 개였던 가문이 여섯 가문으로 줄어들었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는군.”

그리 말하는 하량의 음성은 무미건조했다. 분노나 배신감, 심지어 짜증마저도 느껴지지 않는 덤덤한 목소리였다.

“귀환할 준비를 하도록.”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8)============================================================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