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집도 절도 없는데 이젠 가이드도 없는 (2)
“존명.”
진영은 제 서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머릿속에는 십만대산으로 돌아가기 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차곡차곡 정리되고 있었다.
“그래서, 자네의 호기심은 충족되었나?”
자리에 앉으며 화분을 책상 옆에 내려놓던 진영은 깜짝 놀라 제하량을 바라봤다. 서늘한 낯을 한 그의 주군은 여전히 서한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나 그의 음성에서 느껴지는 엄격함이 있었다. 진영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몰래 다녀오려 했으나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다. 어차피 제하량이 자신의 행보를 짐작하고 있었다면 진영으로서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
“소득이 없으니 번거로운 걸음만 했군.”
“그런 건 아닙니다. 손님이 제가 예상하던 바와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전혀 다르다, 라.”
제하량이 피식 웃었다. 분명 입매는 누그러져 있었으나 그의 눈은 가라앉아 있었다. 아득히 먼 회한을 곱씹는 것처럼 비치기도 했고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의심을 품은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진영으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무저갱이었다.
긴급한 소식 외에도 하량의 결재를 요하는 사안을 정리해 제하량에게로 가져갔다. 죽간을 차곡차곡 쌓아놓는 중에도 하량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서한을 완성해 나갔다.
곧장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려던 진영은 서한의 끄트머리에 적히는 백양진인이라는 이름에 멈칫했다.
진영은 저 이름을 알고 있었다.
“꼭 곤륜으로 보내셔야겠습니까?”
망설이던 진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 그 수상한 손님을 제하량의 곁에서 치워야 한다는 판단은 바뀌지 않았다.
문제는 제하량이다.
주군은 곤륜산 기슭의 강가에서 문예결이라는 청년을 발견하자마자 그를 데리고 청해의 장원에 틀어박혔다. 평소라면 멀리할 의원을 몇 명이나 불러서 그의 부상을 살피게 했고 침식조차 잊은 채 환자가 깨어날 때까지 옆에 붙어 있었다.
세 수하 중 그를 가장 오래 섬긴 진영에게조차 그런 제하량의 모습이 낯설었다. 누군가의 생사에 매달리는 모습이 낯설었다. 기적 외에는 기댈 구석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포기하지 못하는 건 주군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땐 그게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마른 장작이라면 또 모를까, 물에 잠긴 나무토막에서 불길이 치솟을 리가 없는데 제하량은 불에 타고 있었다.
진영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 만약 그 손님이 죽기라도 한다면 주군도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가까운 두려움 때문에.
그럴 리가 없음에도 제하량은 그처럼 절박하게 비쳤다.
‘한데 손님이 회복되기가 무섭게 곤륜으로 보낸다니…….’
여태 주군이 내비쳤던 모습을 생각하면 이런 건 결코 정상일 수 없었다.
진영이 방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글씨를 쓰는 것을 멈춘 제하량이 붓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제에겐 곤륜보다 좋은 방죽이 없을 테지.”
그 말에 순간 진영의 등골을 타고 전율이 흘렀다.
주군의 적은 많지만 그중 곤륜파의 문턱이 높아 물러날 이는 없다.
“내 산 사람은 몰라도, 죽은 사람까지 베어 넘길 수는 없지 않나.”
곤륜에 들 수 없는 사람은 오로지 제하량뿐이다.
이미 죽은 이에게 다시는 그 땅을 밟지 않겠노라 맹세했기 때문이다.
까닭에 매년 혈사가 일어난 날이 다가와도 그 산기슭에서 먼 구름 너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제하량은 곤륜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살아서도, 그리고 죽은 후에도. 그의 피와 살, 뼛가루 중 무엇도 곤륜을 오를 수 없었다.
“이걸 삼랑에게 전하도록.”
곤륜파로 가게 될 편지를 손에 쥔 진영은 조금 착잡한 낯으로 이를 내려다봤다.
제하량이 뜻을 꺾을 리가 없긴 했으나 이게 잘하는 짓인지 망설여졌다. 그토록 애틋하게 보살펴놓고 그 자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곤륜파에 떼어 놓겠다니.
하나 진영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아, 그리고.”
서한을 가지고 물러나던 진영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건 여기에 두고 가거라.”
진영은 제자리에 가져다 둔 화분을 조심스레 제하량의 곁에 내려놓았다. 이내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뒷걸음질로 물러나 밖으로 나갔다.
제하량은 서신 따위는 쓴 적이 없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낯으로 진영이 옮겨다 놓은 죽간을 펼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붓걸이의 그림자가 손등으로 천천히 기울었다. 하량은 죽간을 정리했다. 슬슬 예결의 식사를 챙겨야 약도 먹일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하량은 흘깃 화분 쪽에 시선을 던졌다.
얼마나 망설였을까, 하량의 손가락이 찌그러진 화초의 잎사귀를 툭 하고 건드렸다. 자기가 건드려 놓고 정작 본인이 더 놀란 양 손가락을 움츠린 사내는 방을 나섰다.
***
석반 때가 되어서야 나타난 하량은 여느 때처럼 온화한 낯이었다.
“진영이 웬 화분을 안고 돌아오던데. 혹시 그를 만난 거니?”
“아.”
젓가락질하던 예결은 눈을 내리깔았다. 대사형에게 쪼르르 가서 고자질한 건 아닌 모양인데 그렇게 눈에 띄는 짓을 할 줄은 몰랐다.
‘멍청하기는.’
첫눈에 마음에 안 들었다고 혀를 차며 예결은 미리 준비한 변명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어놓았다.
“대사형이 낮에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갑갑해서 요 앞의 정원을 좀 둘러봤거든요. 근데 갑자기 상단에서 일하신다는 분을 만나서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땅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던 식물을 뽑아버린 모양이구나.”
제하량의 음성은 무언가를 꾹 눌러 참는 듯했다. 화가 난 것 같진 않은데 이게 뭘까?
“이 일이 대사형 귀에 안 들어가게 입막음을 한다는 게 그만……. 손에 잡히는 대로 쥐어서 선물이라고 건넸거든요.”
“사제가 제법 보는 눈은 있군. 서역에서 들여온 꽃인데.”
비스듬히 돌린 제하량의 낯에 은근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렇게 귀한 물건인 줄은 몰랐어요.”
왜 화분씩이나 챙겨서 심어 놓았는지 깨달은 예결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남의 정원에서 비싼 화초를 횡령한 데다가 그걸 뇌물로 줘버렸음을 이실직고한 셈이다.
“다, 다시 가서 찾아올게요.”
눈을 끔벅이던 예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사형은 그가 방 밖으로 달아나기 전에 붙들었다.
“괜찮다.”
“하지만 꽃이…….”
“괜찮다. 내 가진 것 중 무엇인들 네게 아까울까.”
그리 말하는 하량의 음성은 부드럽기만 했다.
“무엇보다, 이 밖으로 나간다 한들 녀석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아느냐?”
녀석?
대사형이 위진영을 부르는 호칭에 예결은 다음에 그를 만나면 조금 더 상냥하게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음……. 아니요.”
당연한 말이지만 알 턱이 없다. 예결에게 허락된 공간은 이 방과 그 너머의 정원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대사형 곁에서 멀어질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예결이 얌전히 착석하자 제하량의 눈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에스퍼 특유의 동물적인 감각이 아니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아주 자그마한 차이였다.
“왜 그리 얼어붙어 있지?”
하량의 질문에 예결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답했다.
“혼을 내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째서?”
“붕대도 벗고, 대낮에 혼자 정원을 돌아다닌 데다가 귀한 화초도 멋대로 남에게 주어 버렸으니까…….”
“오늘은 날이 흐렸으니 붕대를 풀어도 괜찮다. 또, 안에만 있는 게 갑갑해서 정원에 나온 거겠지. 오히려 내 너를 혼자 두어 미안하구나. 화초는 얼마든지 새로 심으면 되는 거고.”
귀한 화초라더니, 대사형의 낯에서 아깝다는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인일 때도 또래에 견줄 자가 없어 용봉지회의 우두머리가 되더니 상인이 되어서도 유능함을 뽐내는 모양이다.
가장 좋은 건 먼발치에서 남몰래 훔쳐보기만 하던 대사형의 다정함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건 전생의 세계로 돌아온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감각이었다.
“조금만 참아 주렴. 곧 곤륜으로 가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거야.”
그놈의 곤륜.
예결은 어서 사형과 함께 곤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었던 제 주둥이를 꼬집고 싶어졌다.
이게 다 전생 때문이다. 그 시절의 예결은 곤륜산의 봉우리를 둘러싼 운해(雲海)에서 노니는 용이 있다면 그게 바로 제하량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득하고 먼 곳에 있던 우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소년은 다시 태어난 후에야 제하량이 인간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가장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사문에 불을 지르지 않아도 대사형이 나를 데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핑계 어디 없나.’
번듯한 핑계라는 놈은 어찌나 꼬리가 짧은지 예결이 낚아채려 팔을 뻗어도 매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어쩌면 지나치게 초조한 탓에 머리가 굳어버린 걸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산병 정도면 대사형이 포기할까?’
자꾸 아픈 척을 해서 하량을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그 한 푼의 걱정이라도 없으면 예결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었다.
‘정말로 죽느니 아프다고 걱정시키는 게 낫지 않나.’
생각이 어둑하게 가라앉던 찰나, 제하량이 입을 열었다.
“일단, 네게 말해주어야 할 것이 있다.”
예결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폈다. 대사형의 입에서 흘러나올 말이 얼마나 무거울지 직감했기 때문이다.
굳은 시선은 예결이 준비되었음을 말해주었다. 그럼에도 하량은 오래 뜸을 들였다. 길어지는 침묵에 걱정이 대나무처럼 자라난 순간, 서늘한 낯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너는 곤륜에서 있었던 혈사 이후의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하였지.”
예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아, 그로부터 이십 년이 흘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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