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집도 절도 없는데 이젠 가이드도 없는 (3)
20년.
예결은 그 실감이 나지 않는 숫자를 혀 위에 굴려봤다. 그야말로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사문에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곤륜의 제자를 보고 원시천존이 대로하기라도 한 걸까?
예결은 그저, 산에 오르려 시도할 때마다 의원 신세를 지게 된다면 대사형을 단념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럴, 그럴 리가요.”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다시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온 햇수와 같다.
“돌아가신 사부님을 걸고 맹세하마. 나는 지금 너를 놀리려는 것도 아니고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비현실적인 괴리감 뒤에 찾아든 것은 공포였다.
제하량은 예결이 그를 대신해 마두의 공격에 몸을 내던지는 걸 봤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확인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치명상을 입었다는 건 알 터다. 한데 20년이나 지난 후에 그때와 꼭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사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귀신? 괴물?
중원에는 무공이라는 게 존재해서 일정한 경지에 오른 이는 젊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반로환동의 고수 흉내를 내는 건 불가능했다.
천둥 벼락을 부릴 수 있는 에스퍼이긴 해도 무능하기 짝이 없다.
“대사형도 이렇게 젊으신데 어떻게 이십 년이나 지났을 수가 있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사형을 바라봤다. 마치 그리하면 제하량이 해결해 주기라도 할 것처럼.
희게 질린 예결의 낯을 찬찬히 살피던 하량이 쓰게 웃었다.
“그건 내가 퍽 오래전에 기연을 만났기 때문이란다.”
“아…….”
예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제하량이 저를 놀리는 것 같진 않았다. 애초에 대사형은 그렇게 요령 짓궂은 성품이 못 된다.
“저는 정말, 곤륜의 혈사 후 그렇게 긴 세월이 지난 줄 몰랐어요. 제가 왜 여기에 어떻게 있는지도 몰라요.”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간 적당히 거짓을 섞어 제 상황을 둘러대곤 했던 예결은 이번만큼은 온전히 진실만 말하고 있었다.
대사형의 두 눈을 마주 보는 것이 두렵다. 차라리 시왕의 업경을 들여다보는 게 낫겠지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예결은 온 용기를 그러모아 하량과 시선을 마주했다.
제발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라는 애걸이었다.
‘한국에서처럼…… 미친놈 취급당하고 싶지 않아.’
적어도 제하량에게만은.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면 좀 더 안정될 거란다. 곤륜파는 오래도록 이어온 명맥만큼이나 신비한 곳이니 네 상태를 설명할 방도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량은 부드럽게 예결을 타일렀다. 예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사형 곁에 있으면 안 될까요?”
충동적으로 내뱉긴 했으나 솔직하게 말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가벼웠다.
“이십 년이나 흘렀다는데……. 저는 그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곤륜파에 돌아가도 제가 아는 사람은 없을 텐데, 차라리 대사형 곁이 더 안심될 거예요.”
주절주절 내뱉으면서도 차마 하량의 눈치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밥값은 할게요. 허드렛일이라도 좋으니 상단 일을 시켜주세요. 저한테 든 약값도 갚을 테니까…….”
예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퍽 비참하게 애걸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알았다. 하나 제 자존심이야 어찌 됐든 상관없으니 하량의 곁에 남고 싶었다.
일단 살아야 자존심이든 뭐든 지킬 게 아닌가.
“……미안하구나.”
제하량의 음성은 낮고 가라앉아 있었으나 동시에 단호했다.
“너는 내게 아무것도 갚을 이유가 없단다. 그러니 여기에 남아 일을 할 필요도 없어.”
다정한 만류처럼 들릴 법도 하지만 오히려 단절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런 빚을 질 수 없는 관계를 어떻게 끌어가야 한단 말인가?
‘일단, 곤륜으로 떠나서 거리를 두자.’
예결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을 섞을수록 하량이 자신을 곤륜으로 돌려보내고자 하는 의지가 굳건함을 느낀다.
억지로 부딪혔다가는 장강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꼴이 되리라.
예결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시대가 무척 혼란하다. 곤륜은 너의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을 거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수그린 예결의 머리 위로 하량의 위로가 내려앉았다. 만약 건너편에 앉아 있는 게 대사형이 아니었다면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을 예결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분명 대사형은 저를 위한 결정을 내려주신 거겠지요.”
“네가 이해해주니 기쁘구나.”
제하량은 예결의 손을 조심스레 붙들었다.
본인이 가이드라는 걸 알면서 이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스킨십의 타이밍이 절묘했다.
예결의 기분이 조금 누그러진 순간, 하량이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말렴, 곤륜에 돌아가도 너는 혼자가 아닐 거란다.”
예결은 그 말에 느릿하게 눈을 끔벅였다. 혈사의 생존자를 말하는 건가 싶었다.
“사숙께 내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 두었단다. 백양진인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다.”
사숙? 그게 누구더라, 하고 생각하던 예결은 한 발짝 늦게 백양진인의 정체를 깨달았다.
백양진인은 전생에 예결의 스승이었던 자다.
사부님의 존재를 까먹다니, 만약 중원인이 예결의 머릿속을 읽을 수 있었다면 걸어 다니는 기사멸조 덩어리라고 손가락질했으리라.
“사부님이 저를 보면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으실까요? 이십 년이나 지났는데 열일곱 때의 모습 그대로인 제자라니.”
예결은 은근슬쩍 제 나이를 어리게 포장했다. 원래 어리고 약한 것일수록 대사형의 동정을 사기에 좋았다.
막말로 이십 년이나 지났는데 자기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대사형이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긴 했다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곤륜파에서 막내 노릇 하던 예결의 존재감은 강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말렴. 사숙은 아무런 편견 없이 너를 받아줄 거란다.”
하량의 말은 묘하게 단정적이었다. 백양진인이 두 팔을 벌려 예결을 맞이하는 것 외에는 다른 미래가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예결은 기억을 더듬어 백양진인을 떠올려봤다.
백양진인은 가장 마지막에 곤륜에 들어온 예결을 떠맡듯이 제자로 들였다. 온화하고 자비로운 낯의 도인이긴 했다. 그러나 백양진인은 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예결에게 관심이 없었고 자연스럽게 그는 적당히 방치되었다.
그러니 백양진인에게 별다른 기대나 감상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다만 자신을 다시 받아주는 게 의외였다. 별 재능이 없을뿐더러 이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젊은 제자라니, 영 미심쩍지 않은가. 사제 간에 정이 깊은 사이도 아니었으니 백양진인이 옛 제자에게 사부로서의 의리를 지킬 줄은 몰랐다.
“사부님이 혈사에서 살아남으셨다니 무척 다행이에요. 하지만-”
예결은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슬쩍 속삭였다.
“의지할 사람도, 믿을 수 있는 사람도 대사형밖에 없는데 이렇게 떨어져야 한다니 너무 무서워요…….”
“이 우형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선인이 아니란다.”
대단한 비밀을 털어놓는 양 제하량이 속삭였다.
“너무 믿고 기대하고……. 의지하지 말렴.”
예결은 그냥 웃어버렸다.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으면서 의지하지 말라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니 할 수 있는 순진한 소리였다.
떠나야 한다는 게 정해졌으니 이제 가장 중요한 걸 물어봐야 할 때다.
“곤륜에 들어가면 다시는 대사형을 못 보게 되나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간 나머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희게 질렸다.
적당히 해야 하는데 참을 수 없다.
“……이토록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다시 만난 걸 보면 분명 인연이라는 게 존재하는 거겠지. 그러니 분명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거란다.”
거짓말이다.
예결은 기민하게 그 사실을 알아챘다. 에스퍼의 본능이라기보단, 오래전 제하량이라는 이를 알았기 때문이다. 예결은 그의 낯에 어린 죄책감을 읽어냈다.
“그렇다면 제가 대사형에게 편지를 써도 될까요?”
양순한 척 눈을 내리깐 채 하는 말에 상대는 침묵했다. 예결은 곤혹스러워하는 하량이 보고 싶었다. 그래야 좀 더 고민하고, 미안해하고 자신을 생각할 게 아닌가.
“너도 알다시피 중원은 넓고 나는 상행을 자주 나가니 제때 서한을 받지 못할 거란다.”
결국 안 된다는 소리다. 예결은 여봐란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파문당하는 수밖에.’
겉보기에는 선량한 소년이었으나 그 머릿속은 곤륜파에서 파문당할 방법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하나같이 기사멸조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극단적인 방법뿐이었다.
사제의 음험한 야망을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하량이 달래듯 덧붙였다.
“하지만 네가 서한을 보내 놓으면 꼭 답장해주마.”
‘쫓겨나서 갈 데 없다는데 처마 밑에 웅크리고 있으면 사형이 설마 날 내쫓기야 하겠어?’
“늦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말이다.”
조금 쑥스러운지 시선을 피했던 하량은 예결이 답이 없자 그를 불렀다.
“결아?”
나쁜 생각을 하고 있던 예결은 한 발짝 늦게 대사형이 한 말이 무슨 내용인지 깨달았다.
“네? 예! 정말이에요? 진짜 답장해주실 거예요?”
순간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대사형의 말마따나 중원은 더럽게 넓었고, 위치추적기도 구할 수 없는데 어떻게 제하량을 따라다니나 싶어 막막했었다. 막말로 서한도 안 받아준다고 하면 어찌할 도리 없이 범죄자의 길을 걸어야 하나 싶었는데.
그의 가이드는 너무 착해서 예결을 여러모로 구원해주고 있었다.
“울지 말고.”
난처하다는 듯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어주며 달래오는 하량의 말에 예결은 부러 더 큰 소리를 내며 그의 품에 안겼다.
순간 하량의 몸이 조금 경직되기는 했으나 이내 그는 순순히 예결을 끌어안고 그의 등을 안아주었다.
‘안쓰러워 보이나? 그랬으면 좋겠는데.’
제하량이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예결은 낙담했을 뿐, 포기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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