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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1화 (11/203)

11화. 집도 절도 없는데 이젠 가이드도 없는 (4)

장원의 입구에 여장을 꾸린 세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이 출발을 위해 나온 것이 벌써 반 시진도 더 된 일이었으나 그들의 발목을 잡는 자가 다름 아닌 제하량이니 어쩌겠는가.

“곤륜의 높은 봉우리는 사시사철 추우니 갑갑해도 옷을 잘 챙겨 입으렴.”

“예.”

신중한 낯으로 옷깃을 여며주는 대사형에게 몸을 맡긴 예결은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청해까지 닿진 않았지만, 저 남부에서 전염병이 올라오고 있다니 물은 꼭 끓여서 마셔야 한다.”

진영은 당황스러웠다. 일행에 함께하게 된 야율홍여는 기마민족 출신으로 이동과 노숙에 특화된 인재였다. 어지간한 표사보다 노련한 홍여가 동행하는 이상 잡스러운 질병이나 위험한 야생동물은 걱정하지 않아도 무방했다.

정작 홍여는 무뚝뚝한 낯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본인의 능력을 의심당한 거나 마찬가지인데도 별 불만이 없어 보였다.

“만약 홍여와 진영과 떨어지더라도 모르는 이는 함부로 따라가지 말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거라.”

맙소사.

진영은 속으로 탄식했다.

갓 여덟 살 난 어린아이에게 옆집으로 심부름을 보내도 이렇게 유난은 아닐 것 같았다.

“명심할게요.”

예결은 구구절절한 걱정을 늘어놓는 하량을 앞에 두고도 생글생글 웃는 낯이었다.

“혼자 있을 때 누가 네게 협박이라도 하면 그냥 전낭을 내주고. 홍여와 진영이 널 찾아낼 거다.”

진영은 목격하고 말았다. 주군이 그 말을 하며 예결의 품에 은근슬쩍 전낭을 찔러주는 것을.

여태 알아온 주군은 그 어떤 여자나 아끼는 수하에게도 이런 낯간지러운 태도를 내보인 적이 없었다.

그가 아는 제하량은 생김새만큼이나 차가운 사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예결은 씩씩하게 답했다.

가이드에게 이렇게까지 챙겨지는 에스퍼의 기분이 나쁠 리가 없다. 게다가 눈앞의 제하량은 머잖아 끝내주는 롤러코스터를 탈 예정이다.

‘대사형과 떨어지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가이드를 만난 것도 처음이고 그와 떨어지는 것도 처음이라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곤륜파로 보내 놓은 사제가 원인 모를 병으로 앓아누웠다는 소식에 제하량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 있어서 예결은 간신히 숨을 붙여놓은 안타까운 사제고 생명의 은인이다. 이십 년간 생사도 모르던 이를 살려내 곤륜파로 돌려보냈는데 생명이 경각에 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필경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리라.

‘이게 내 망상만은 아니겠지.’

예결은 이걸로 하량이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지르밟으며 생각했다.

제하량에게 애정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하나 대사형이 자신에게 품은 죄책감만은 불 보듯 선명했다.

지금 예결은 곤륜파로 가는 길이었다. 상단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요직에 앉은 게 분명해 보이는 수하를 둘이나 붙여 주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제하량의 걱정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애면글면하고 있음에도 예결은 기뻤다.

“조심히 가렴.”

제하량은 마침내 예결을 놓아주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홍여와 진영을 보며 명령했다.

“약속된 장소에 가면 백양진인께서 기다리고 있으실 거다. 가는 동안 사제의 상태를 면밀히 살피고 항상 시야 안에 두어라.”

“존명.”

예결은 홍여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올랐다. 전생에는 말 타는 법을 배울 겨를이 없었던 데다가 그가 끌고 온 말의 덩치는 군마로 쓰이는 종보다 훨씬 컸다.

어색하게 말고삐를 잡은 그는 금세 중심을 잡았다. 에스퍼로 태어나서 그런지 신체 능력은 전생보다 나았다.

‘무공을 다시 배우면 기재 소리를 들을 수 있으려나?’

갸웃거리는 예결의 등을 바라보는 하량의 시선은 차츰 가라앉고 있었다. 이대로 떠나보내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음에도 그는 미련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이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하량은 예결이 제 눈앞에서 죽어가는 걸 봤을 때만큼이나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놓아주어야 한다.’

그는 더 이상 협객도 아니고 촌부일 수조차 없다. 그러니 사제를 보내주어야 했다.

“아.”

문득 예결이 고개를 돌렸다. 숨길 도리 없이 절절한 마음을 내비치고 있던 하량은 사냥꾼에게 덜미가 잡힌 짐승처럼 놀라고 말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예결이 환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량은 차마 그 말을 정정하지 못한 채 우뚝 서서 떠나는 이를 바라봤다.

***

“오늘은 여기에서 머무르겠습니다.”

홍여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꺼낸 말에 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영은 이미 말에서 내려 잔가지 따위를 줍고 있었다. 홍여의 도움으로 말에서 내린 예결은 자리에 앉아 두 사람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흥미로운 점은 홍여는 물론이고 진영에게서도 무공을 배운 흔적이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상단을 꾸리면 호위무사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중원은 그야말로 무법천지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밟히는 건 야율홍여뿐이 아니라 평범한 문사처럼 보이는 진영도 몸놀림이 가볍다는 거다.

‘의외란 말이지…….’

무거운 물건도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데다가 주변의 기척에도 민감하다. 한국에서도 A급 에스퍼 정도는 돼야 저 정도로 기민하게 움직인다.

“대사형의 일을 많이 도와주신다고 들었어요.”

돌연 생글생글 웃는 예결의 모습에 진영은 주춤 물러났다. 심지어 존댓말까지 쓰자 뭘 잘못 먹었냐는 얼굴을 했다.

진영으로서는 제하량이 ‘녀석’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 때문에 예결이 태도를 바꿨다는 걸 알 도리가 없었다.

“상단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나요?”

떨떠름한 표정으로나마 진영은 성실하게 답했다.

“여러 가지 일을 하지요. 상단이 돌아가는 상황을 감독한다든가, 상단주님께서 보셔야 할 내용을 따로 정리해 올리기도 합니다. 장부 정리도 하고……. 뭐, 결국 다 숫자놀음이죠.”

요약하자면 서류 작업을 한다는 소리다.

예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중원에 흘러넘치는 게 무림인이라지만 평소 하는 것만 봐도 A급 에스퍼의 무력 수준은 되어 보이는 남자다. 그런 이가 상단을 이끄는 표두 같은 게 아니라 총관 노릇을 하고 있다니.

한국으로 따지면 태권도 금메달에 특전사 훈련을 받은 인간이 중소기업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하는 걸 보는 느낌이다.

차라리 경호팀에 있다면 또 모를까, 독특한 진로 선택이다.

‘역시…… 평범한 상단은 아닌 거 같은데.’

대사형이 상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잠자리를 준비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에 저쪽에서 쉬시면 됩니다.”

부산히 움직이던 홍여가 예결이 잘 위치를 가리켰다. 마른 낙엽과 두툼한 모포만으로 완성된 간이침대가 보였다.

위에 털썩 주저앉아 보니 제법 쾌적했다. 노숙이 아니라 캠핑이라도 온 것 같다.

“감사합니다.”

사근사근한 말씨를 사용하는 예결을 본 진영의 표정이 또 묘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반말을 마구 쓰던 예결과 지금의 예결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감 때문이었다.

당시 받아온 화초를 생각하면 역시 지금 내보이는 모습은 가식이 분명했다.

“혹 불편하신 곳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야율홍여의 말에 예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괜찮아요.”

“이동 속도는 이대로 해도 괜찮을까요?”

“사실 좀 더 빨리 가도 괜찮을 거 같은데…….”

예결은 슬쩍 홍여의 눈치를 살폈다. 전날에도 같은 말을 했으나 야율홍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제도 해가 지기 전에 야영할 장소를 찾지 않았던가.

“단련되지 않은 몸으로 장시간 말을 타면 몸에 무리가 갑니다. 중간에 마을에 들르기가 여의찮으니 이렇게라도 체력을 보존하셔야 합니다.”

마을이라, 예결은 그것도 퍽 의외였다.

“장원에서 곤륜파까지 가는 길에 마을이 하나도 없다니, 놀랍네요.”

아무리 청해가 그 넓은 크기에 비해 사는 사람이 적다지만 여기까지 오는 내내 예결은 사람의 머리카락 한 올 보지 못했다.

일부러 행인을 피해 다니는 게 아니고서야 이 적막함은 이상했다.

상단은 결국 물건을 유통하고 돈을 버는 일을 한다. 사람이 많을수록 돈과 물류가 모인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 아닌가.

한데 대사형은 어째서 이토록 외진 곳에 장원을 마련한 걸까?

“언제쯤 도착할까요?”

“내일이면 당도할 겁니다.”

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가는 길은 준마 세 마리가 나란히 달려도 될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다. 이 시대에 다니는 사람도 없는데 이렇게 잘 포장된 도로라니, 역시 이상하다.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수상함은 끝도 없이 자라났다.

저녁으로는 따끈한 죽이 차려졌다. 설거지라도 도우려 했으나 홍여와 진영의 만류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이튿날 곤륜산에 당도할 때까지 그들의 극진한 시중은 이어졌다.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눈치의 진영조차도 결례를 저지르는 법이 없었다.

산 중턱 즈음에 이르렀을 때, 일행의 걸음이 처음으로 멈췄다.

“여기까지만 들어오시는 게 좋겠구려.”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도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예결은 도사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백양진인이었다.

옛 사부님을 보니 비로소 이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게 실감 났다. 한때 검던 머리카락은 백발이 되었고 고강한 무공으로도 노화를 막지 못한 얼굴에는 주름살이 늘어 있었다.

우습게도 그 모습을 보며 드는 생각은 그리움 따위가 아니었다.

‘대체 대사형은 얼마나 강한 거지?’

파문당한 제자는 보통 단전이 파괴당하고 사지근맥이 잘린다. 한순간에 폐인이 되는 것이다. 한데 예결이 재회한 하량은 건강하기만 했다. 몇 번이나 본 손목에는 흉터가 존재하지 않았을뿐더러 걸어 다닐 때도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곤륜파에서 이토록 오래 수행한 백양진인조차 벗어나지 못한 세월의 굴레 밖에 서 있는 게 분명하다.

예결의 가슴이 쿵 쿵 뛰었다. 꼭꼭 숨겨진 하량의 비밀에 한 발짝 더 다가선 기분이었다.

“사부님.”

“이리 오거라.”

“잠시, 여기까지 바래다주신 분들께 인사를 하고 오겠습니다.”

홍여가 말을 몰아 예결에게로 다가왔다.

“끝까지 모시지 못해 송구합니다. 부디 가는 길 조심하시길.”

그는 제 말에 달아두었던 예결의 짐을 건넸다. 이를 받으려 몸을 기울이자, 야율홍여가 순식간에 그의 품에 무언가를 찔러넣었다.

[혹 위험한 일이 생기면 이 피리를 부십시오.]

전음이다.

단전이 없어 무공도 쓸 수 없는 예결은 눈을 끔벅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의 뜻이 전해진 건지 거대한 사내는 천천히 물러났다.

제 차례가 되었다는 듯 진영이 앞으로 나섰다.

“주군께서는 여태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곤륜지약을 지키실 거라 하셨습니다.”

“……내 제자 될 아이를 찾아주어 고맙네.”

상대를 안심시키려 꺼낸 말 같았으나 백양진인의 경계심은 외려 더 강해진 눈치였다.

진영은 반듯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하산을 시작하면서 전혀 돌아보지 않는 이들의 뒷모습은 매정함으로 비치기 쉬웠으나 예결의 눈에는 배려로 읽혔다.

“가자.”

하량이 말한 대로라면 이십 년만의 재회일 텐데 백양진인은 예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명했다.

“예.”

사부작사부작, 두 노소(老少)의 걸음이 눈 덮인 대지를 지나고 있었다.

***

“네가 그렇게 길게 말하는 건 처음 봤다.”

“……음.”

홍여는 모닥불을 쑤석거릴 뿐, 뾰족한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곤륜의 영역에 예결을 데려다주기가 무섭게 다시 평소대로 말수가 줄어들어 있었다.

“그나저나, 그 피리 말인데…….”

예결의 몸에 가려진 탓에 백양진인은 보지 못했을 테지만 진영은 홍여의 날렵한 손놀림을 확인했다.

“너희 부족의 족장에게만 내려오는 귀물이 아니었나? 그걸 주군의 손님에게 주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홍여에게 있어서 그 피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유품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이대로면 돌려받을 길은 요원하다.

주군은 곤륜파에 들어간 사제를 다시는 만나지 않을 기색이었다. 하물며 그들은 곧장 신강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 아니던가.

“뭘 느낀 거지?”

잇따른 추궁에도 홍여는 침묵했다. 어느새 그의 눈에는 일렁이는 불길이 옮아와 있었다.

“다시 만나게 될 거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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