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집도 절도 없는데 이젠 가이드도 없는 (5)
“아, 문예결 그 새끼만 또 조퇴야.”
뒷문을 열려던 예결은 우뚝 멈춰 섰다.
“존나 재수 없는 새끼. 학주도 그 새끼한테는 검은색으로 머리 염색해 오라고 안 하더라? 나도 자연 갈색인데.”
“더러우면 너도 각성하든가. 새삼스럽게 그 얘긴 또 왜 하는데?”
수틀릴 일 있었냐는 질문이다.
“아니, 어제 건방진 놈 손봐주려는데 끼어들잖아. 시발. 지가 무슨 기사인 줄 아나.”
그제야 예결은 시대착오적인 새끼라며 투덜거리는 놈이 누군지 기억해냈다. 담배를 대신 사 오라며 동급생을 괴롭히던 일진이다. 자신이 끼어들자 도망치듯 자리를 피한 것도 기억했다.
‘자존심이 퍽 상했나 보지.’
당장에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예결을 멈춘 것은 아는 이의 목소리였다.
“기사는 무슨.”
평범한 남고생의 음성이었으나 악의가 덕지덕지 묻어났다. 그 주인을 잘 아는 예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거 아냐. 걔는 지가 협객이라고 생각해.”
피식피식 섞인 비웃음이 예결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협객? 그건 또 뭔 뜬금없는 소리야.”
“아 왜 책방 같은 데 가면 아재들이나 읽는 무협 소설 있잖아. 거기 나오는 주인공 말이야.”
“뭔. 문예결이 찐따 오타쿠 새끼라도 된다는 거야?”
“차라리 오타쿠 같은 거면 낫게? 걔는 자기가 무림에서 나고 자란 전생을 기억한댔어.”
“와……. 제정신이 아니네.”
“왜 에스퍼들은 다 이거잖아. 각성 때문에 맛이 간 거지.”
머리에 대고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는 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여드름 자국이 조금 남아 있고 그리 모나지 않지만 반듯한 생김새도 아닌, 평범한 남고생이다.
예결은 그를 친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저런 비밀까지 털어놓았지. 그는 예결의 말에 퍽 진지하게 반응해준 사람이었다.
둘은 함께 책방이며 서점을 돌아다니며 최대한 전생과 비슷한 내용의 무협지를 긁어모으기도 했다.
자신이 죽은 후의 무림이 어떻게 되었을지, 제하량이 살아남았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예결은 자신이 살았던 세계와 비슷한 이야기는 하나도 찾지 못했다.
그 대신 예결은 무협지 속 가상의 영웅들이 펼치는 협객행에서 위로를 찾았다.
“걔네 부모님도 감당 못 하고 정신병원에 처넣어서 일 년인가 이 년 꿇었잖아.”
예결은 눈을 내리깔았다.
친구라 믿었던 소년의 음성에서 숨길 수 없는 우월감이 느껴졌다. 남들이 모르는 유명인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으스대는 모습이 역겨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 천박한 혀에 제하량이 오르내릴 일이 없다는 거였다.
“그렇게 미친놈도 에스퍼라고 시민의 안위를 맡겨도 되는 건가? 가이드도 없는 새끼한테?”
깐죽대는 음성이 끼어들었다. 진심으로 미친 에스퍼를 걱정한다기보다는 이 상황 자체가 재미있어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그럼 문예결이 중국 놈이라는 거네.”
두 손을 모은 노란 머리 남자애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니쉬팔러마.”
“야 너 욕했냐 지금?”
“무식한 새끼. 지금 밥 먹었냐고 인사한 거거든?”
뒤통수를 맞고도 경박하게 낄낄거리는 남학생들을 찬찬히 살핀 예결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센터에 가야 한다고 조퇴했던 예결을 떠올린 이들은 한순간 자리에 얼어붙었다. 예결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사물함을 열고 책을 꺼냈다.
“야. 너 짱개 새끼라며?”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듯 노란 머리 남학생이 그에게 물었다. 동급생을 괴롭힐 때만 해도 예결이 주의하라고 경고하자마자 아무 말 없이 물러났던 바로 그놈이다.
누구보다도 빨리 줄행랑을 치고 싶을 텐데 가장 먼저 나선 건 결국 자존심 때문이리라.
이 또래의 사내애들이란 짐승의 무리와 같다. 속으로는 미친 에스퍼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덜덜 떨면서도 다른 애들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 저렇게 목소리를 내는 거다.
“아, 그거.”
예결은 픽 웃었다. 처음부터 전부 듣고 있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친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예결의 시선을 피하려 했으나 고개를 완전히 돌리지도 못했다.
“순진하게 아직도 믿고 있었어? 너 놀린 거잖아.”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씨에 순간 무슨 말을 한 건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자꾸 중국어 숙제 베끼게 해달라고 들러붙는 게 귀찮아서 그랬어. 어떻게 하면 중국어 잘하느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거에 일일이 답해주기 번거로워서.”
아마 처음엔 정말 중국어를 잘하는 게 신기해서, 그리고 또 어린 나이에 에스퍼로 각성한 문예결과 친해지고 싶어서 자꾸 말을 걸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작이 어찌 되었든 끝은 변질되고 말았다.
“그럼.”
밖으로 나가려는데 예결의 팔을 낚아챈 소년이 악을 쓰듯 외쳤다.
“니가 그랬잖아. 중국에 있지도 않은 곤륜산에 가야 한다며 부모한테 매달렸다고!”
붉으락푸르락해진 소년의 얼굴을 보며 예결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말마따나 있지도 않은 곤륜산에 가겠다고 조르다가 강제로 입원당했다는 말을 이렇게 진심으로 믿을 줄 몰랐어.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망연자실한 낯을 보며 예결은 그의 손을 툭 털어냈다. 힘없이 고개를 숙이는 소년을 뒤로한 채, 예결은 교실 밖으로 나섰다.
***
‘돌아가는 상황 때문인지 꿈자리 한번 더럽군.’
그 시절의 꿈을 꾸는 건 퍽 오랜만이다. 어쩌면 요새 돌아가는 상황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숨을 쉰 예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잠자리를 정돈했다. 새로 맞이하게 된 사형제가 누워 있어야 할 주변은 휑하기만 했다. 백양진인은 처음부터 예결을 독방으로 배정했다.
밖으로 나선 그는 빗자루를 백양진인의 거처로 향했다. 건물 앞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예결은 빗자루로 눈을 싹싹 쓸어내기 시작했다.
어제도, 그제도, 그리고 그 전날도 한 일이었으나 일단 성실하게 임하고 있었다. 대사형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자신의 상황을 들여다볼지 모르기 때문이다. 되도록 착한 사제 노릇을 해야 그가 안쓰러움을 느끼지 않겠는가.
너른 마당에 쌓인 눈을 혼자 쓸어내는 건 보통 고단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성능이 끝내주는 에스퍼의 몸이라고 해도 추위는 느낀다.
‘벼락으로 다 녹여버리고 싶네.’
가이드가 없으니 함부로 힘을 쓸 수도 없다. 비실비실 앓아눕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거지, 폭주하는 꼴을 보이려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질하다 멈춘 예결은 손을 호호 불었다. 이놈의 눈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었다.
다시 태어나서 종종 곤륜산의 아득한 설경을 떠올리곤 했다. 특히 병원에 혼자 있을 때면 곤륜파의 막내로 지내던 시절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한데 다시 그 안에 내던져지고 나니 이걸 왜 잊고 있었나 싶었다.
곤륜산의 드높은 봉우리에는 만년설이 쌓여 있었고 눈도 종종 내렸다. 사부님이 기침하시기 전에 이를 미리 치워 놓는 게 바로 가장 어린 제자들의 몫이었다.
예결은 백양진인의 숱한 제자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찌꺼기 같은 거였다. 그러니 눈 치우는 일을 강제로 떠맡을 수밖에.
보통은 두서넛이 함께 하는 일을 혼자 하게 된 이유야 뻔했다. 다들 연줄이며 재능으로 곤륜파에 들어왔는데 신원불명의 소년이 새 제자랍시고 들어왔으니 경계할 수밖에 없다. 보통 뒤늦게 입문한 이들은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사문의 존장이 데려온 것이니까.
갑자기 툭 튀어나온 돌멩이의 취급이란 한국이나 중원이나 비슷했다.
배척한다.
‘어차피 무공도 못 익히는데.’
예결이라고 해서 곤륜파의 심법을 다시 배우려는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전생보다 신체 조건도 좋고 감각도 기민해졌으니 무공을 익히면 전생보다 훨씬 잘할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심법의 구결에 따라 기를 몸에 받아들이고 단전에 쌓으려고 해도 그 기운은 어느 순간 흩어지고 만다. 축기가 불가능하니 무공을 익히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예결이 자신의 상태를 보고하자 백양진인의 미간에는 내 천(川) 자가 아로새겨졌다. 원래도 아끼는 제자가 아니었는데 이제 단전도 못 만드는 쭉정이가 되어 돌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파문당할 궁리를 할 것도 없이 쫓겨날 수 있는 건가? 하고 설렜던 예결은 곧 낙담하게 되었다.
백양진인이 그를 내보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질구레하긴 해도 그의 신변에 가까운 일을 맡기고 항상 시야 안에 두었다.
마치 감시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게 다른 제자들의 눈에는 총애로 비친 눈치였다. 나름 도가의 제자라고 슬쩍 불러내 주먹다짐을 하진 않았으나 식사 때를 알려주지 않는다든지, 대화에 끼워주지 않다든지 등의 소소한 따돌림이 주가 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예결로서는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들 서열 싸움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외로워 보일수록 대사형이 자신을 내버려 두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그게 언제냐고…….’
곤륜파에는 학부모 참관일 같은 게 없다. 예결은 제하량의 속내는 하나도 모르는 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문제는 제 몸이 얼마나 버텨줄지 모른다는 거다.
비질을 마친 예결은 터벅터벅 건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걸음은 전생에 혼자 찾던 비밀 장소로 향했다. 건물과 건물의 사잇길로 들어가야 보이는 연무장이었는데, 위치가 애매해서 쓰는 이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구석의 바위에 걸터앉은 예결은 품에서 홍여가 준 피리를 꺼냈다. 정교하면서도 독특한 문양이 아로새겨진 피리는 요새 그의 번민을 불러일으키는 근원이었다.
‘쓰고 싶다.’
대사형에게서 아무런 소식 없이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예결은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으나 편지를 아무리 써도 답신이 돌아오지 않는다.
‘정말 나를 잘라낸 건가?’
예결이 백양진인을 통해 전달한 서신이 벌써 열 통이 넘어간다. 대사형이 상행 때문에 온 중원을 누빈다고 하였으나 안부를 묻는 편지가 한 통 정도는 올 법도 한데 왜 이토록 감감무소식인 걸까?
제하량의 책임감을 믿었다. 그러나 대사형의 성격이라면 파문 제자와 연이 닿아 있는 게 자신에게 독이 될 거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서서히 싹트고 있었다.
위험할 때 불라고 한 피리였으니, 이걸 쓰면 대사형에게 어떻게든 소식이 닿을 터다.
‘그러다가 양치기 소년 꼴이 나는 거지.’
예결은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피리와 함께 갈무리했다. 제하량의 믿음을 이런 일에 소모할 수는 없었다. 인내심이야말로 에스퍼에게 가장 중요한 소양이 아니겠는가.
잠깐의 휴식을 마친 예결은 아침 식사를 위해 이동했다. 보통은 사형제와 만나서 함께 식사할 테지만 지금의 그는 혼자였다.
곤륜파의 입구 쪽이 상단의 행렬로 북적북적했다.
‘오늘이 물자가 들어오는 날이었나?’
멀찍이 선 채 예결은 상단의 표두가 쟁자수에게 손짓하는 광경을 지켜봤다.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표두와 함께 건물 안으로 사라지자 쟁자수들이 입을 열었다.
“아이고, 힘들다. 매번 이 높이를 올라오는 것도 일이야.”
“그래도 언제나 대금을 후하게 치러주시지 않나. 명문의 체면이 있어서 지급이 밀리지 않는 것도 좋고.”
쟁자수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짐을 부리고 있었다. 곡물이며 천 등의 생필품이다.
“아이고, 그거 조심해서 내려! 표두님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까. 망할 놈의 뱀.”
뱀? 예결의 귀가 쫑긋거렸다.
에스퍼의 청력은 높은 경지에 오른 무림인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지라 이 거리에서도 쟁자수들이 나누는 말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뭔 영물 뱀 가지고 그렇게 야단이람.”
“천년뇌각망(千年雷角蟒)이니까 그렇지! 그 내단이 백 년 내공은 쌓게 해준다니까 다들 눈 뒤집힌 게지.”
쟁자수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필 마두 놈 손에 들어갈 게 뭐람. 그놈이 천마신교에 입교한다고 후다닥 신강으로 달려오는 바람에 지금 청해가 발칵 뒤집힌 거잖아.”
“남궁세가에서 창궁비연대를 파견했다더군. 원래대로였다면 천년뇌각망이 남궁세가로 들어갔을 테니 열받을 만도 하지.”
“표두님이 신경이 곤두설 만도 하군. 무림인들이 신공절학이니 영약을 두고 싸우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죽어 나가는 건 우리 같은 평범한 이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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