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뱀뱀이 (1)
이쯤 되면 다 들었구나 싶어서 예결은 그들을 지나쳤다.
평범한 쟁자수도 그 소식을 알고 있는 걸 보니 마두는 이미 청해를 거쳐 신강으로 접어들고도 남았으리라. 어차피 예결이 궁금한 건 대사형 소식이지 자신과 별 관련 없는 뱀이나 마두 이야기가 아니었다.
예결이 혼자 식사를 마치고 사부님의 거처로 돌아가니 백양진인이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서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늙어버린 사부님을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왔느냐.”
“예.”
“비질은 해두었느냐?”
“일어나자마자 바로 눈을 치웠습니다.”
“모름지기 수양이란 주변을 깨끗이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니 비질이라고 하여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일을 시켜놓고 결과를 딱히 확인하지도 않는다. 그럴듯한 가르침을 입에 담긴 해도 안은 텅 비어 있다.
백양진인은 그를 곁에 딱 붙여놓는 대신 살가운 말 한마디 하는 법이 없었다. 제하량에 관해 물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살아 있냐고 추궁하지도 않는다.
그 무관심은 힘들게 가공한 티가 났다. 일부러 관여하지 않고 거리를 두려는 거다.
‘왜 날 받아준 걸까?’
그리고 왜 자신을 쫓아내지 않는 걸까?
예결은 백양진인이 다른 제자들을 만나러 간 동안 다탁을 닦고 서책을 정리했다. 단순노동은 머리를 비워줘서 좋았다.
한꺼번에 대여섯 권을 안아 올린 예결은 걸음을 옮기다가 미처 치우지 못한 교의에 부딪혔다.
“아!”
살짝 휘청이긴 했어도 빠르게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전생 같았으면 꼼짝없이 넘어졌을 텐데.’
의기양양한 기분에 방심하는 찰나, 가장 위에 쌓아놓은 서책이 아래로 떨어졌다. 예결은 기민한 몸놀림으로 서책 표지를 낚아챘다.
“큰일 날 뻔했네.”
보는 이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서책 사이에 낀 것이 바닥으로 후두두 떨어졌다.
“……어라?”
봉투였다. 그것도 예결의 눈에 꽤 익은.
「청해상단주」
본인이 적은 겉봉의 글씨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린 예결의 낯이 굳었다. 그는 서책을 모아놓는 곳에 가서 최근 백양진인이 읽던 책들을 차례대로 골라냈다.
서책 사이에 숨겨진 봉투를 일곱 개나 찾아낼 수 있었다. 예결이 보낸 서신이 이게 전부는 아니었으니 나머지도 다른 어딘가에 숨겨져 있으리라.
예결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만약 이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의 눈 속에서 회오리치는 금빛의 격류를 목격했으리라.
제 가이드에게 버려졌을지도 모른다고 전전긍긍한 게 벌써 몇 주나 된 일이다. 오늘만 해도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부렁을 치고 싶어 얼마나 갈등했던가?
‘대사형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생각만으로도 눈시울이 절로 붉어졌다.
서한을 보낼 테니 꼭 답장해 달라고 신신당부해 놓고 곤륜에 돌아가자마자 하량을 싹 잊어버린 양 소식 없는 사제라니, 그나마 있던 정도 뚝 떨어질 거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전각에 벼락을 대여섯 번 내려쳐도 모자랐다.
그러나 마침내 고개를 든 예결의 낯은 한없이 차분했다. 그는 자신이 쓴 편지를 사부님의 서책 사이에 차례대로 끼워 넣었다.
본디 그것들이 가야 했던 곳이 아니라 백양진인이 숨겨놓은 자리로.
전생의 사부님이라 하여 대단한 애정은 없다. 그의 가르침보다 백양진인의 밑에 들어감으로써 제하량의 사형제가 될 수 있음을 기뻐했을 뿐이다.
‘내가 대사형이랑 연락하는 건 싫고, 그런데 대사형이 나를 맡아달라고 한 찝찝한 부탁은 들어주고…….’
편지도 그냥 태워버리면 될 것을 여기저기 분산해서 숨겨놓았다. 예결은 주변뿐이 아니라 서한을 받을 제하량까지도 의식했기 때문에 그 안에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곤륜에서 잘 지내고 있으며 대사형의 안부를 묻는 게 전부다. 백양진인에게 서한을 맡기면서 사부님의 험담 같은 걸 적을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았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동안에도 마른 천을 쥔 예결의 손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머잖아 백양진인이 방으로 돌아왔다. 찻주전자를 예결이 닦은 다탁 위에 내려놓은 그가 입을 열었다.
“차를 끓일 때 쓰는 물이 다 떨어졌더구나. 오늘 중으로 채워놓도록 하여라.”
“예. 사부님.”
예결은 고개를 숙였다.
속으로는 백양진인을 잘 묶어두고 번갯불 맛을 몇 번이나 보여줬으나 겉보기에 그는 성실한 제자였다.
곧장 방을 나선 예결은 겉옷을 챙겨입었다. 이건 제하량이 챙겨준 외투였다. 속에는 흰 담비 털을 켜켜이 대서 아주 따뜻하고 호사스러웠다. 예결은 털을 몇 번 만지작거린 뒤 산길에 올랐다. 깨끗한 만년설을 퍼 오려면 산 높이 올라가야 하니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세상이 내 인내심을 시험하네.”
예결은 눈길을 오르며 툴툴거렸다. 요 며칠 내내 내린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발이 푹푹 빠졌다.
경공을 다시 배운다면 답설무흔의 경지도 꿈이 아닐 텐데, 단전이 생기질 않으니 맨몸으로 뚫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에스퍼로 태어난 덕에 몸을 가볍게 움직일 수 있었다. 만약 신체 능력이 아니었다면 만년설을 채취하는 장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쓰러졌으리라.
“하드웨어가 엉망인데 동시에 이 하드웨어가 끝내줘서 조난될 일이 없다니…….”
에스퍼라 심법을 못 익히는데 에스퍼라 이만한 눈을 뚫고도 가볍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웃겼다.
목적지에 거의 도달할 무렵, 무언가가 예결의 발에 차였다. 옷도 두툼하게 입은 데다가 사방에 쌓인 눈 때문에 휘청휘청하던 예결은 결국 앞으로 넘어졌다.
“뭐……. 뭐지?”
예결이 넘어지며 헤집어진 눈 사이로 사람의 몸통이 보였다.
얼굴은 파리하고 가슴도 오르내리지 않는다. 누군가 여기 던져두고 간 시체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예결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상대에게서 아주 미약한 생명의 징후를 느꼈다. 이건 예결이 에스퍼라서 알아챌 수 있는 거였다.
모든 인간의 몸에는 전기 신호가 흐른다. 심장에서도, 뇌에서도, 근육과 피부 표면에 이르기까지.
예결은 상대와 접촉하면 그 생체전기 신호를 느낄 수 있었다.
“귀식대법?”
죽음을 가장해서 적을 따돌리기 위해, 혹은 치명상을 입고 몸을 회복하기 위해 사용되는 강호의 비술 중 하나였다.
예결은 상대가 깨어나기 전에 주춤 물러섰다. 빠르게 품에서 피리를 꺼내 입술을 가져다 대고 불었다.
귀식대법을 쓴 채 곤륜산에 숨어든 고수를 마주치다니, 이게 바로 위기 아닌가.
‘소리가…… 안 나?’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 단소처럼 특별하게 불어야 하는 종류의 목관악기인가 싶어 연거푸 힘껏 숨을 불어넣었으나 피리는 조용하기만 했다.
예결의 기척에 반응한 건지, 남자의 손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예결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누워 있던 무림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있을 때만 해도 몰랐는데, 덩치가 상당히 큰데다가 생김새는 험상궂기 이를 데 없었다.
손목이 뻐근한지 이를 몇 번 돌려본 사내가 예결에게 시선을 던졌다.
“얘야. 물 한 모금 주면 안 잡아먹지.”
검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는 남자는 시체처럼 누워 있을 때와 달리 흉흉한 분위기를 풍겼다. 순식간에 덜미를 잡힌 예결은 그의 손바닥에 정전기를 일으켰다.
차라리 칼을 써서 반격했다면 모를까, 찌릿한 감각에 남자는 예결을 잡은 손을 놓아주고 말았다. 예결은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제법 찌릿찌릿한데? 뇌전의 기운인가.”
마두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낯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남궁세가의 추적자냐? 결국 날 따라잡았군. 그러나 내가 순순히 죽어줄 줄 알고?”
남궁세가가 있는 안휘면 청해의 반대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멀다. 현대였다면 비행기로 몇 시간 거리지만 이곳은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이 말인 중원이다.
무리해서 달아났음에도 벌써 따라잡혔다는 사실이 마두를 놀라게 했다.
“나는 곤륜의 제자다! 곤륜파의 허락 없이 산에 오르다니, 너는 누구냐!”
“아, 남궁세가가 아니었어? 그냥 찌릿했던 건가.”
사내는 예결의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혼잣말을 계속했다. 눈의 초점이 자꾸만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어린 곤륜의 제자여, 본좌의 정체를 물었느냐?”
예결은 답하지 않은 채 그를 쏘아봤다. 진검은커녕 목검 한 자루 없이 의문의 흉수와 대치하는 중이었으나 전혀 겁이 나질 않았다.
“강호 동도들은 본좌를 음혼귀마라 부른다.”
“음혼귀마?”
예결이 반문했다. 척 듣기에도 사파나 마교의 인물 같은 별호다.
“낄낄. 이 어르신이 누군지 알아본 모양이구나. 어때, 이제 순순히 마실 걸 내놓을 마음이 드느냐?”
“그게 누구지?”
음혼귀마가 순간 휘청했다.
“중원에서 악명을 널리 떨친 내가 누군지 모르는 척 허점을 노리려 하다니! 어린놈의 심계가 보통 깊은 게 아니구나!”
자존심이 위협당해서인지 놈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좀 더 유명해지지 그랬어?”
예결은 만년설을 담기 위해 챙겨온 물동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전투가 일어날 것 같은데 이게 깨지면 곤란하다. 경공도 쓸 수 없는 몸으로 다시 곤륜파까지 다녀와야 한단 말이다.
“노오옴! 내 먹을 것과 마실 것만 얻으면 순순히 떠나줄 생각이었지만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남궁세가에 쫓기는 눈치던데, 곤륜파의 추적까지 당하면 생명 부지가 가능하겠어?”
“글쎄. 내가 널 죽이고 숨어버리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음혼귀마가 히죽 웃었다. 그의 웃음에서 더없는 잔혹함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별호를 고스톱으로 딴 건 아닌 모양이다.
‘아니, 이 경우엔 마작인가.’
“남궁세가가 그쪽의 행적을 밟다가 곤륜에서 제자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당연히 여길 찾아와 네 정체를 밝히겠지. 사악한 마공은 독특한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니까.”
심드렁한 투로 말하면서도 예결의 눈은 사내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재고 있었다. 제하량이 이곳에 없으니 힘을 절약할 필요가 있었다.
“흉수가 밝혀질 즈음엔 난 이미 천마신교에 있을 거다. 이 귀한 진상품을 올리고 나면 교주님께서 본좌를 휘하에 넣어 주시겠지.”
상대는 그동안 입이 근질거렸는지 주절주절 떠들었다. 들을수록 안 궁금한 이야기였다.
“진로 상담은 입학 컨설턴트를 만나서 해라!”
예결은 곧장 벼락을 상대의 머리에 내리꽂았다. 무언가 불길한 기운을 느낀 건지 음혼귀마는 냅다 몸을 날려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헉, 허억. 뭐지?”
나려타곤을 펼쳐 벼락의 궤적에서 벗어난 사내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봤다가 화들짝 놀랐다. 눈이 다 녹았을뿐더러 땅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손에서 느꼈던 그 찌릿찌릿한 감각이 착각이 아니었던 거다.
“대체 무슨 사술이냐!”
음혼귀마가 생각보다 잽싼 바람에 바닥에 흔적을 남기게 된 예결은 혀를 찼다. 저건 어떻게 숨긴담?
“사술은 네가 쓰는 마공 같은 걸 사술이라고 하는 거고.”
자연스럽게 까칠해진 음성이 예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발 얼른 끝내자. 해 지기 전엔 눈을 퍼서 산에서 내려가야 한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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