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뱀뱀이 (2)
예결은 아주 바빴다. 사부님의 심부름도 해야 했고, 그가 대사형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정작 연락은 두절시키려는 무시무시한 음모도 파헤쳐야 했다.
“네놈! 평범한 곤륜의 제자가 아니구나!”
음혼귀마는 검을 뽑아 들었다. 음혼(陰昏)이라는 별호만큼이나 무언가 검붉고 탁한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척 보기에도 아파 보인다.
예결은 날렵하게 음혼귀마의 검을 피했다. 보법을 쓸 수 없어서 거의 간발의 차이로 궤적에서 벗어나기만 한 거였다.
‘망할 단전.’
현대였다면 저런 놈은 단숨에 잡아다 메쳤을 텐데, 무림이라 함부로 간격을 좁히기가 여의찮았다.
몇 번이나 공격을 주고받았다. 하나 음혼귀마의 움직임이 어찌나 신출귀몰한지, 예결의 벼락은 놈의 발목을 묶어놓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 나를 놀리나? 유형의 검기를 맨손으로 날릴 정도로 강한 자가 왜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느냔 말이다!”
예결이 쓰는 벼락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흑도의 무공이 패도적이라곤 하나 그의 뇌전은 음혼귀마가 아는 그 어떤 마공보다도 패도적이고 강력하다. 중원에서 나고 자란 음혼귀마는 이 젊은 청년이 강력한 고수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검기인지 강기인지 가늠하기 힘든 벼락을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내는 이라면 분명 내공도 심후할 텐데 왜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질 않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발악하듯 번개의 틈새를 파고들어 공격해도 슬쩍 피하는 게 전부였다.
완전히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숨을 헉헉 몰아쉰 음혼귀마는 몇 번이나 더 몸을 날렸다.
예결은 곤란한 기색을 숨기며 그가 접근하는 동선을 따라 벼락을 불러냈다. 단번에 처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전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봉인을 푼 후 능력을 사용하는 건 고작 두 번째인 데다가 무림인의 신묘한 움직임을 따라잡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내공심법을 익힐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예결이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그는 경공술이나 보법을 익힐 수 없는데 반해 적은 자유자재로 거리를 좁히거나 멀어질 수 있었다.
물론 힘을 끌어 올려 제대로 된 필드를 펼친다면 놈이 눈먼 벼락에 맞아 죽을 거다. 하지만 그 후에는?
다시 말하지만 예결은 비실비실 앓다가 쓰러지고 싶은 거지, 폭주를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장기간 가이딩을 받지 못할 경우, 힘을 쓸수록 폭주의 위험이 커진다.
음혼귀마가 발악하듯 손을 휘저었다. 예결은 이번에야말로 끝내버릴 작정으로 그에게 벼락을 내리꽂았다.
처음으로 전류가 음혼귀마의 몸을 감쌌다. 음혼귀마는 땅에 검을 찔러넣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단숨에 절명하고도 남을 정도의 벼락을 맞아놓고도 살아 있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예결이 확인 사살을 하려던 순간,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날아왔다. 황급히 몸을 뒤로 젖혔으나 완전히 피하기에는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진 상태였다.
“윽……!”
예결의 몸이 눈 위로 풀썩 넘어갔다. 무언가 서걱하고 베이는 소리에 음혼귀마가 몸을 일으키고 다가왔다.
옷도 다 그을리고 머리카락도 꼬불꼬불해진 상태였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음혼귀마라지만 곤륜에서 이런 괴물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조금 전만 해도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천지신명이 내 편인 게 분명해.’
음혼귀마는 제 가슴 위를 쓸어내렸다. 어떻게 살아난 건지 짐작 가는 부분이 있긴 했다.
살아 있다면 벌떡 일어나 번개를 몇 번이나 내리치고도 남았을 청년이 누워서 미동조차 하지 않는 모습에 음혼귀마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힘을 몸으로 겪어서일까, 상대를 쓰러뜨려 놓고도 믿어지지 않는다.
“……정말 해치웠나?”
소생의 주문을 들은 예결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저 비도는 그의 살갗을 가르지 못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놈의 검에 겉옷이 베여 나갔다는 사실이다.
갈라진 옷자락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술술 들어왔다. 그 냉기가 예결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이건 제하량이 선물해준 흰담비 털 외투였다.
능력을 최대한 아끼면서 싸우다가 하량에게 받은 선물이 상해버렸다. 몇 살만 더 어렸어도 펑펑 울어버릴 텐데, 애석하게도 예결은 전생과 현생을 합치면 서른일곱 살이나 먹은 어른이었다.
어른은 어른만의 화풀이 방식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정말……. 참으려고 했어.”
예결이 웅얼거렸다.
“진짜 꾹 참고 있었다고. 알아?”
그의 몸에서부터 벼락이 줄기줄기 뻗어나갔다. 확인 사살을 위해 성큼 다가왔던 음혼귀마는 이를 피하지 못했다.
아니, 설령 피했다고 하더라도 벗어날 곳이 없었으리라. 예결을 중심으로 반경 일 킬로미터가 전부 벼락의 대지로 변모해 있었다.
“크, 아악!”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온몸을 뒤트는 꼴이 퍽 고통스러워 보였다.
한데 예결이 생각하는 것처럼 바싹 구워지질 않는다. 최대한 피를 안 보려고 웰던으로 구우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핏물 뚝뚝 떨어지는 레어가 될 뿐이다.
저 남자가 가진 무언가가 예결이 내리치는 벼락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뭐지?’
아까 음혼귀마가 벼락을 맞은 직후에도 멀쩡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예결은 비도에 당했다. 피뢰침 비슷한 걸 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대체 이게 무슨…… 사술을……!”
잠시 주춤하는 사이 헐떡이던 남자가 출수했다. 그의 눈에는 공포와 광기가 가득했다.
음혼귀마가 쥔 검을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눈속임이었다. 남자가 손을 움직이자 검 손잡이 쪽에서 독 모래가 흘러나왔다.
목과 가슴도 보호하지 않은 채, 그야말로 생명을 도외시한 공격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예결을 죽여 버리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쿨럭……!”
예민하기 이를 데 없는 에스퍼의 감각에 이런 매캐한 냄새는 독이었다. 시야가 부옇게 흐려지는 가운데 예결은 다시 힘을 끌어 올렸다.
“……이런.”
원하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강력한 전기가 손끝에서 방출되고 있었다. 통제되지 않는 능력은 곧 폭주의 징조나 다름없었다.
곤륜산의 산봉우리를 날려 먹을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예결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면서 고통을 선사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결의 무시무시한 공격이 주춤하는 기색을 보이자 독이 통했다고 생각한 음혼귀마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무림에서의 승부는 한 장 차이지! 네 목숨은 감사히 받겠다!”
그때, 수풀 사이에서 무언가 붉고 거대한 짐승이 나타났다. 음혼귀마가 그게 무언지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리던 찰나, 짐승이 앞발로 마두의 가슴을 걷어찼다. 한순간에 고꾸라진 음혼귀마는 제 늑골이 부러지는 감각에 비명을 토해냈다.
“안……. 아아아악!”
쿨럭하고 피를 뱉어낸 마두의 눈에서 점점 생기가 사라졌다. 예결은 얼빠진 낯으로 음혼귀마를 짓밟은 짐승을 바라봤다. 호전적으로 콧김을 푸르릉 내뱉는 거대한 말이었다.
붉은 갈기며 덩치가 예사롭지 않은 존재인 것만은 분명했다.
‘초원도 아니고 산에 말이? 이 가파른 곳에?’
말이 성큼성큼 예결에게 다가왔다. 전생에 십칠 년을 곤륜산에서 살았으나 저런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다. 인과관계를 다져보자면 짚이는 게 하나 있긴 했다.
예결은 말이 자신도 걷어차려 들기 전에 황급히 품을 더듬어 피리를 꺼냈다.
“이 피리 소리를 듣고 온 거니?”
말이 유순하게 몸을 숙였다. 어서 올라타라는 듯 등을 내미는 모습에 예결은 고개를 내저었다.
“잠깐, 잠깐만…… 나 확인해야 할 게 있어.”
몸 상태가 제법 만신창이였으나 음혼귀마가 벼락을 맞고도 두 번이나 살아남은 게 마음에 걸렸다. 무언가가 제힘을 먹어 치우는 것 같지 않던가.
예결은 죽어서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무거워진 음혼귀마의 몸을 가뿐히 뒤집었다. 그의 거침없는 손길이 마두의 품을 헤집고, 무언가를 찾아냈다.
자그마한 새장처럼 생겼으나 상당히 납작하다. 화려한 금빛 장신구처럼 보이는 것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팔찌처럼 생긴 것의 끄트머리가 서서히 움직이고 나서야 예결은 그것이 살아 있는 생물임을 깨달았다.
황금빛 뱀이다. 그것도 아주 작은.
우리의 살 사이로 느릿느릿 고개를 내민 뱀이 시선을 마주쳐 왔다. 황금빛이 휘몰아치는 두 눈이 보였다.
징그럽다기보다는 깜찍하고, 소름 끼친다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답다.
“이거……. 설마?”
쟁자수의 말과 음혼귀마의 말이 한순간 겹쳐 들렸다.
‘남궁세가에서 창궁비연대를 파견했다더군. 원래대로였다면 천년뇌각망이 남궁세가로 들어갔을 테니 열받을 만도 하지.’
‘남궁세가의 추적자냐? 결국 날 따라잡았군. 그러나 내가 순순히 죽어줄 줄 알고?’
예결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천년뇌각망(千年雷角蟒)…….”
홀린 듯 손을 가져다 대자 자그마한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머리를 비벼왔다.
음혼귀마에게 내리친 번개를 먹어 치운 게 이놈인데 이상하게 밉지 않았다.
당금 무림에서 가장 핫한 영물 1순위에 빛나는 뱀이라 그런지 자신이 여태 섭취한 힘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보는 눈치였다. 어쩌면 같은 속성을 지닌 예결을 부모 비슷한 것으로 착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 자그마한 애한테서 뭘 빼먹겠다고?”
예결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천년뇌각망의 내단을 빼먹겠다고 달려들었을 무림인들을 비난했다. 이무기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자그맣다.
푸르릉 하고 말이 발을 구르자 천년뇌각망은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츠리며 정전기를 일으켰다. 예결에겐 살짝 찌릿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어라?”
순간, 어떤 영감이 예결에게 찾아들었다.
그간 예결이 힘을 쓰는 걸 가로막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가이드인 제하량의 부재였고, 다른 하나는 무림에서 뇌전의 힘을 다루는 이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남궁세가의 심법에 뇌(雷)의 기운이 서려 있다곤 하나 제왕검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번개를 줄기줄기 뽑아내지는 않는다.
이토록 이질적인 힘을 다루는 이상 함부로 능력을 써서는 안 된다. 무림인이란 원래 열린 듯 닫힌 꼰대이기 때문이다.
일정 경지에 오르면 맨손으로 바위를 자르고 불도 피우고 하늘을 걸어 다니면서 조금이라도 생소한 기술이나 이질적인 힘을 쓰면 사술이라 몰아붙이며 무림공적으로 만든다.
대사형과의 행복한 노후를 위해서라도 이 힘은 되도록 숨겨야 했다.
한데 만약 영물이라는 독특한 존재가 끼어든다면?
“야.”
예결은 천년뇌각망의 동그란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잘해 줄게.”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전류가 황금빛 뱀을 가두고 있던 우리를 부숴버렸다.
“같이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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