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뱀뱀이 (3)
“자, 뱀뱀아. 저기 저 말 형님을 따라가는 거야.”
예결은 적당히 현장을 꾸며두고 말의 등에 올랐다. 천년뇌각망이 갇혀 있던 우리를 전류로 부숴버린 건 영물이 자력으로 탈출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뱀뱀이라 불리게 될 천년뇌각망은 예결의 명령대로 말의 안장에 조심스럽게 자리 잡았다. 함께 곤륜파로 가고 싶지만 이 말도 뱀도 너무 눈에 띄었다.
현장을 꾸미는 동안 예결은 자신의 힘을 뱀뱀이한테 전해줬다. 천년뇌각망이라는 비범한 영물이라서인지 뱀뱀이는 예결의 힘을 꿀떡꿀떡 잘도 받아먹었다.
의도적으로 기운을 소진한 예결은 처음 제하량을 만났을 때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내상을 입을 수 있었다.
그는 도망치려다가 질질 끌려다닌 것처럼 꾸민 자리에 풀썩 드러누웠다.
말이 다가와 불만스럽다는 듯 콧김을 뿜었다. 그러나 예결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서 돌아가. 흔적 지우는 거 잊지 말고.”
저 말이 지나간 눈 위에 발굽 자국이 남지 않는 걸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가?
‘짐승도 답설무흔을 하는데 나는…….’
일단 뱀뱀이를 안전하게 빼돌리는 게 우선이다.
“피가 묻긴 했지만, 우리 뱀뱀이 안 춥게 둘러준 겉옷도 잘 챙겨주고.”
예결은 자신의 흰담비 털 외투를 뱀뱀이한테 둘러주며 피도 묻혀놨다. 당연한 말이지만 고의였다. 야율홍여가 이를 본다면 대사형에게 보고가 들어갈 걸 노리는 거다.
안전하게 곤륜산에 보내놓은 사제가 위험 상황에서만 쓰기로 한 피리를 불었다. 그리고 그에게 선물로 준 털 외투는 피가 묻은 채로 돌아왔다. 하필 그 안장에 숨겨진 건 중원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청해에 온갖 무림인을 불러 모은 원흉인 천년뇌각망이다.
작심하고 파문당했어도 이보다 더 좋은 그림을 그리긴 어려웠으리라.
“뱀뱀이 너도, 곧 보자.”
예결이 누운 채로 손을 흔들자 황금빛 뱀이 꼬리를 차르르 흔들었다. 영물이라 그런지 아니면 자신의 힘을 흠뻑 먹여 놓아서인지 뜻이 통하는 기분이다.
붉은 말이 한숨을 쉬는 것 같다고 생각한 다음 순간, 놈은 한순간에 저 멀리 사라졌다. 그야말로 붉은 벼락이 따로 없었다.
일을 제대로 해치우기 위해 외투를 뱀뱀이에게 둘러주긴 했으나 냉기가 몸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폭주도 못 할 정도로 힘을 뱀뱀이에게 밀어 넣은 터라 평범한 인간이 된 양 몸이 덜덜 떨려왔다.
이제 예결이 얼마나 빨리 발견되는지는 백양진인에게 달렸다.
‘사부님이 함흥차사가 된 제자를 얼마나 빨리 찾아다닐까?’
동사만 면하면 제하량이 어떻게든 살려줄 거다. 폭주 후 죽어가던 예결의 숨도 도로 붙여놓지 않았던가.
채 한 시진이 지나지 않아 예결을 찾는 수색조가 등장했다.
“이, 이게 무슨……!”
일대제자가 달려왔다. 죽은 줄 알았던 예결이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자 기겁하고 손가락을 밟아버리는 게 느껴졌다.
“쿨럭……. 침입자가……. 곤륜산의 정상에…….”
예결은 그대로 몸에서 힘을 풀었다. 툭 떨어지는 손에 일대제자가 황급히 몸을 숙였다.
그대로 곤륜파로 옮겨진 예결은 의약당에서 눈을 떴다. 몸에 둘린 붕대며 식은 탕약이 담긴 그릇을 보면 의원이 몇 번 다녀간 거 같긴 했다.
하나 만신창이가 된 예결을 계속 살피는 자는 없었다.
‘난리가 났나 보군.’
온 무림에서 찾아 헤매던 음혼귀마와 천년뇌각망이 곤륜산 정상에서 발견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천년뇌각망에게 당한 음혼귀마는 죽음을 맞이했고 그 영물은 곤륜산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았나. 사라진 천년뇌각망을 찾고자 하는 이들은 전부 곤륜에 모여들 거다.
남궁세가를 필두로 한 정파를 자처하는 이들의 방문 요청이 쇄도하고 있으리라. 사파나 마도의 인물도 남몰래 숨어들려 할 테니 곤륜파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일개 제자에게 신경 쓸 이는 아무도 없다.
뱀뱀이가 갇혀 있던 케이지를 굳이 전류로 뜯어냈을 때부터 예결은 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 대사형을 만나면 좋겠다.’
식어서 더 쓰게 느껴지는 약을 꿀꺽꿀꺽 마신 예결은 눈을 감았다. 몸에 기운은 하나도 없었으나 곧 제하량이 찾아올 거라는 생각에 마음만은 가벼웠다.
재회를 꿈꾸며 잠든 예결은 다음 날 밤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약에 몸을 보하는 효능뿐이 아니라 수면제도 포함되어 있었던 눈치다. 빠른 회복을 위해서라면 푹 자는 게 맞겠지만, 하루를 홀라당 도둑맞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는 머리맡에 그림자가 하나 서성이고 있었다. 백양진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지켜보다가 떠나려 했는지 시선이 마주치자 노도사의 미간이 좁아졌다.
“사부님……. 아파요.”
“의원을 불러오마.”
무미건조하긴 해도 차갑진 않은 음성이다.
“대사형에게 소식은…… 없나요?”
백양진인의 입매가 차갑게 비틀렸다.
“이미 곤륜의 품을 떠나 세속의 품에 안긴 이에게 대사형이라니.”
“하지만…….”
“내 너를 계도해보려 했으나 그 배신자의 이야기가 네 입술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구나.”
배신자?
백양진인의 비난에 예결은 눈을 끔벅였다.
“근묵자흑이라 하였다. 더러운 것에 가까이 가지 말거라. 네가 아무리 내 제자라 하여도 용서받지 못할 일이 있는 법이다.”
청수한 도사가 그를 준엄하게 꾸짖고 있다. 남이 본다면 예결이 크나큰 잘못을 한 것으로 보이리라.
하나 예결은 그저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제자는 사부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직접 네 몸, 아니지. 문예결의 몸을 거둬 화장했다. 그런데 살아 돌아왔다니, 그 배신자 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했지. 강시술을 쓸 시신도 없을 텐데 대체 어떻게…….”
예결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죽은 전생의 몸이 어찌 되었을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은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는데 그 몸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니, 기분이 묘했다.
중요한 건 이걸 대사형이 아는지의 여부다.
“네가 어디의 누군지는 묻지 않겠다. 내 제자를 닮은 탓에 놈에게 끌려가 세뇌당한 불쌍한 아이겠지. 이 사부님의 말을 잘 들으면 내가 너를 놈의 마수에서 구제해주마.”
백양진인의 말에 예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제자는 혼란스럽습니다. 사부님. 제가 이미 죽었다니요? 이렇게 살아 있는데.”
“불쌍한 것. 가엾은 것……. 두 달이나 지켜봤지만 네가 곤륜파의 정보를 외부로 빼돌리려는 기미도 없었으니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거겠지.”
노도사는 혀를 찼다.
한편 예결은 치열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고작 상인이 되었다고 제하량을 배신자라 칭할 리는 없다. 곤륜파가 그렇게 도량이 좁은 문파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사형이 결정적인 무언가를 했다는 소린데……
지나가는 정파무림인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걸 딱 하나만 꼽아 보라면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할 만한 게 하나 있었다.
‘천마신교.’
곤륜에 혈사를 일으킨 바로 그 마교. 주기적으로 정마대전을 일으켰다. 만약 제하량이 마교에 발을 들였다면 작금의 상황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여기엔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대사형이 천마신교에 들어갈 동기가 없잖아.’
하지만 그럴 동기가 있다면 곤륜파의 새 시대를 열어갈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던 제하량이 파문당한 것도, 그가 다시는 사문의 땅을 밟지 못하게 된 것도, 백양진인이 이토록 대사형을 경멸하는 것마저도 전부 설명이 된다.
심지어 백양진인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강시술을 거론하지 않았던가.
하늘 아래 그 금지된 비술을 가진 문파는 손에 꼽힌다. 하나는 오래전 마교에 짓밟혀 사라진 모산파고, 남은 하나는 모산파를 멸문시킨 바로 그 마교다.
이상하리만치 대단한 무인을 거느리고 있던 상단주 제하량을 떠올리며 예결은 눈을 내리깔았다.
“제자에게 시간을 주세요.”
가냘픈 음성이 예결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상대가 알아서 저를 오해하고 있는데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었다.
“제자는 대사형, 아니 그 사람이 사부님께서 암시하는 것처럼 끔찍한 인물이라 믿기 어렵습니다.”
“너를 지배하는 거짓을 이겨내야 한다.”
예결의 손목을 쥔 주름진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에는 전생의 예결이 본 적 없는 기이한 뒤틀림이 존재했다.
“……머리가 아파요.”
예결은 거짓 신음을 내뱉었다. 백양진인은 천천히 그를 내려다보다가 금창약을 침상 옆에 내려놓았다.
“내가 알던 아이와 네가 비슷하다면 분명 현명한 선택을 할 거라 믿는다.”
백양진인의 말에 예결은 고개를 끄덕이는 척 쓴웃음을 숨겼다.
‘일말의 애틋함이나 정도 주지 않았던 제자를 잘도 팔아먹네.’
눈앞의 사내는 배움이 늦는 제자에게 손을 올리는 스승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기대를 거두고 방치하는 인간이긴 했다. 어차피 전생의 일이고 이젠 잘 기억도 나질 않으니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자꾸 대사형과 제 사이를 이간질하려 든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예결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곧 남궁세가의 귀빈들이 오실 예정이라 자주 들르지 못할 것 같구나. 몸조리하고, 의원이 다 나았다고 하면 돌아오너라.”
“예.”
백양진인은 그 당부를 마지막으로 의약당을 나섰다.
예결은 일부러 눈을 감고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러나 어질러진 머리가 번잡하고 잘 정리도 안 되니 쉴 겸 눈을 감았다.
잠든 환자를 가장하고 있던 예결이 눈을 뜬 건 자정 무렵의 일이었다. 음혼귀마를 상대한 직후라 그런지 예민해진 청각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걸려들었다.
일단 다시 자는 척 눈을 감은 예결은 상대가 조심스럽게 침상으로 접근하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뚜벅, 뚜벅, 뚜벅.
쿵, 쿵, 쿵.
보보(步步)마다 맞물리는 제 심장 소리가 기이했다. 어느새 침상 곁에 상대가 서 있었다.
밤손님인 줄 알았던 이가 떨리는 손으로 예결의 뺨을 어루만졌다. 예결은 상대가 소리를 내기도 전에 그 정체를 알아봤다.
“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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