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6화 (16/203)

16화. 뱀뱀이 (4)

“대사형.”

예결의 부름에 제하량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곤륜의 땅을 다시는 밟을 수 없다는 사내가 그 금기를 어기고 예결의 앞에 서 있었다.

제 뺨을 타고 흘러드는 가이딩에 예결은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이 상황이 못내 만족스럽다.

‘역시 나를 버리지 않은 거야.’

하량의 답을 기다리며 찰랑찰랑 고였던 슬픔은 백양진인이 숨겨놓은 서찰을 발견하고는 분노가 되어 화르르 타올랐다가 이제는 기쁨이 되어 사르륵 녹아들었다.

“어쩌다가 이런…….”

그의 뺨을 어루만지는 하량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병장기를 휘두르는 무림인에게 수전증이 오는 건 지극히 드문 일이니 이는 대사형의 감정이 갈무리할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요동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냥, 운이 조금 나빴을 뿐이에요.”

예결은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몸에 칼자국이 남는 게 싫어서 음혼귀마의 공격을 계속 피했던 게 후회가 됐다.

‘얼굴에 상처가 생겼다면 대사형이 좀 더 흔들렸을 텐데.’

“대사형 탓이 아니니 그런 얼굴 마세요.”

오히려 더 참혹하게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그가 가장 듣고 싶어 할, 그리고 가장 듣기 싫을 말을 엄선한 보람이 있었다.

“그냥 운이 조금 나빴을 뿐이에요.”

“운이 나빴다니, 그런…….”

예결의 연이은 발언에 하량은 숨을 쉬는 것마저 버겁다는 얼굴이 되었다.

“고작 운이 나쁘다는 그런 이유로 네가 이렇게 상해서는 안 된다. 터럭 한 올 다치지 말라고 곤륜으로 보냈는데 어찌 이런…….”

하량의 뺨을 타고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달빛에 반짝이는 눈물을 처음 본 순간에는 착각이라 생각했다.

대사형이 눈물 같은 걸 흘릴 수 있는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게 환상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제나 단단하고 견고하던 사내의 눈은 못 견딜 정도로 처연하게 느껴졌다. 품에 끌어안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야료를 부린 거라며 이실직고해야겠다는 사명감까지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예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에스퍼는 가이드를 찾는 것과 동시에 양심도 되찾는다더니.’

대사형의 손을 잡아본 게 다인데 벌써 양심이 돌아와서는 곤란하다.

“사부님의 심부름을 하다가, 곤륜에 숨어든 마두를 마주쳤어요. 조금 다친 거니까 대사형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예결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이어갔다. 증인이라 봤자 음혼귀마뿐인데 그는 땅에 파묻혔다.

저를 도우러 온 붉은 말과 대사형에게 딸려 보낸 뱀뱀이는 인간과 의사소통할 수 없을 테니 괜찮았다.

“편지…… 보냈는데 보셨어요?”

그 편지가 여전히 백양진인의 서가에 숨겨져 있다는 걸 빤히 알고 있으면서 던지는 질문이었다.

하량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답했다.

“……그래.”

예결은 대사형의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 나와주었으면 했으니까.

“왜 답장하지 않으셨어요. 많이 기다렸는데.”

투정하듯 그의 옷소매를 살짝 붙잡자 하량이 이마를 찌푸렸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예결이 협박이라도 당하는 줄 알겠지만, 예결은 그게 곤혹스러워서임을 쉽게 읽어냈다.

멀게만 보던 영웅과 가까워지니 이토록 알기 쉬운 인간이었을 줄은 몰랐다.

“……신강의 상행에 문제가 있어서 오가느라 편지를 아주 늦게 받았단다. 한데 네가 홍여의 피리로 적뢰를 불렀다는 소식에 답장할 겨를조차 없이 달려왔다.”

“그 말의 이름이 적뢰였군요.”

붉은 말이 쏜살같이 움직이는 모습에 붉은 번개를 떠올리긴 했으나 그게 정말 이름일 줄은 몰랐다.

“한혈보마와 천리마의 혈통을 잇는 준영물급 말이란다. 적뢰 덕에 내 뒤늦게나마 도착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와주셔서 기뻐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예결은 하량을 위로하듯 손을 뻗었다. 그때 옷소매가 스르륵 흘러내리며 예결의 손목이 드러났다.

당연한 말이지만 백양진인이 세게 쥐며 새파란 멍을 남긴 바로 그 손목이었다. 예결은 뒤늦게 이를 깨달은 척 움찔하며 옷소매 아래로 손을 감췄다.

하지만 하량의 입매는 단단히 굳어진 뒤였다.

“……누가, 누가 네게 이런.”

하량의 음성이 참혹하게 떨렸다. 그는 예결의 손을 끌어당겼다.

“아무,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결은 도리질하며 손목을 등 뒤로 숨겼다. 그러나 ‘평범한’ 예결이 어찌 무림인 제하량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벌건 두 눈으로 예결의 손목을 확인한 제하량은 연거푸 마른세수했다. 예결은 그의 시선을 피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곤륜으로 돌아올 수 있게 손을 써주신 대사형께는 죄송하지만……. 돌아가고 싶어요.”

고개를 푹 숙인 예결의 목소리가 울음을 참는 이처럼 떨렸다.

“곤륜파는 제가 있을 곳이 아닌 거 같아요.”

여의주를 잃은 용을 이무기라 하듯, 제하량이 없는 곤륜파는 예결에게 별 의미를 갖지 못했다.

설령 제하량이 자신의 가이드가 아니었어도 예결에겐 매한가지였다.

애당초 항주의 거리를 전전하던 고아가 청해의 곤륜파까지 간 것도 제하량 때문이었다.

“내가 너를…….”

하량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잔뜩 금이 간 유리 조각을 대하듯 조심스레 예결의 손을 감쌌다.

“내가 너를 어찌하면 좋을까…….”

그 음성에는 괴로움과 번민이 가득했다. 예결은 말없이 그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하량이 영영 보지 못할 황홀한 미소를 머금었다.

‘잡았다.’

***

“먼저, 수색 허가를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헌앙한 귀공자가 곤륜파의 장문인에게 정중히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누가 봐도 귀한 집의 자제로 보이는 사내는 남궁세가의 직계, 남궁운이었다.

마지막 용봉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창천신룡이라는 별호를 얻은 그는 단연 무림의 가장 빛나는 후기지수 중 한 명이었다. 이변이 없다면 다음 대의 천하제일인이 되리라 거론되는 동량인 만큼, 남궁운의 기세는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동석해 있던 백양진인은 어느새 시대의 흐름이 구파일방에서 오대세가로 넘어가고 있음을 여실히 느꼈다.

“곤륜은 남의 것을 탐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찾아왔으니 찾아가실 수 있게끔 문을 열어드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사람 좋게 허허 웃는 장문인을 흘겨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백양진인은 찻잔을 내려다봤다.

아무리 이곳에서 마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는 하나 남궁세가가 곤륜의 앞마당을 헤집고 다니게 허락해주는 장문사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곤륜은 이십 년 전 그날, 이 세상에서 지워진 것만 같았다.

“음혼귀마를 추적해 안휘에서 청해까지 오다니, 남궁세가의 저력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백양진인은 칭찬하는 척 뼈가 있는 말을 건넸다. 음혼귀마가 그렇게 먼 거리를 주파하는 동안 악적 놈을 잡지 못한 남궁세가를 꼬집는 내용이었다.

“음혼귀마 그자가 머리를 제대로 써서 추적대가 여러 갈래로 흩어졌었지요.”

음험한 노인의 수작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궁운은 정광이 서린 눈으로 진지하게 답했다.

“기예단이 데리고 다니는 남만의 구렁이를 금색으로 칠한 다음 휘하의 무인에게 나눠주고 동서남북으로 달아나게 했으니……. 온갖 곳에서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남궁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큰돈이나 힘을 들이지 않고 이렇게까지 남궁세가의 추적자를 따돌렸으니, 참으로 교활한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곤륜의 터에서 놈이 죽지 않았더라면 마교의 손에 들어간 천년뇌각망이 어떤 피 보라를 일으켰을지…….”

백양진인은 파르르 떨리는 입매를 숨기기 위해 잔을 들어 올렸다.

지금 저 어린놈이 그가 건넨 도발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었다. 곤륜파의 영역에 음혼귀마가 숨어들 때까지 곤륜파의 누구도 놈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본인이 집어삼키려 한 보물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다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인 게지요.”

장문인이 끼어들어 은근한 대립을 종결시켰다.

“곤륜의 봉우리는 높고 항상 만년설이 쌓여 있으니 뱀이 움직이기 나쁜 환경일 겁니다. 부디 남궁세가의 젊은 소가주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루고 돌아가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포권을 한 남궁운이 이제 백양진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제자분은 괜찮으십니까?”

백양진인은 눈을 감았다. 음혼귀마가 습격한 제자의 사부가 누군지 파악하고 있는 걸 보면 남궁세가의 정보력이 여간 대단한 게 아니었다.

“무량수불. 지금은 의약당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제자’의 이야기가 거론될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문예결을 최대한 숨기고 싶었던 백양진인으로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남궁세가의 실책으로 놓친 마두 때문에 그리되셨으니 허락해 주신다면 문병하러 가고 싶습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도가 문파인 곤륜의 제자가 이토록 경박하게 구는 꼴을 두고 보지 않는 백양진인이 미간이 저절로 좁아졌다.

“손님이 계시니 지금은 물러가거라.”

“하나 정말 분초를 다투는 일입니다.”

“무슨 일이지?”

안에 들어오기를 허락받은 일대제자는 산봉우리에 쓰러진 예결을 발견했던 바로 그이였다.

“문 사제가 사라졌습니다.”

순간 백양진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상이 넘어지며 찻물이 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는 날듯이 방을 가로질러 일대제자를 추궁했다.

“누가 사라져?”

“일대제자 문예결이 의약당에서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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