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원대한 포부 (1)
“앉아.”
황금빛 뱀이 똬리를 틀었다.
“일어서.”
몸을 딱 반으로 나눈다 치면 윗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이 쭉 일어났다.
“뱀뱀이 손, 아니. 꼬리.”
이쯤 되면 짜증을 낼 법도 한데 뱀뱀이는 예결의 손바닥에 자그마한 황금색 꼬리를 툭 가져다 댔다.
“하트.”
몸을 동그랗게 말고 머리와 꼬리를 구부려 하트 모양을 만들어내는 천년뇌각망의 모습은 잘 훈련된 개보다 더 충성스러워 보였다.
“음. 완벽해.”
예결은 손뼉을 치며 좋아라 웃었다.
황금빛 뱀과 노닥거리는 예결의 모습을 본 진영의 표정이 묘해졌다.
주군은 결국 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손님과 함께 돌아왔다. 마도육가의 일부가 획책한 음모를 분쇄하는 중에도 곤륜 쪽에 항상 귀를 열어둘 때부터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아봤어야 했다.
하나 진영도 청해를 난리 통으로 만든 천년뇌각망이 적뢰의 안장에 숨어올 줄은 몰랐다.
‘심지어 문 공자를 이렇게 잘 따를 줄이야…….’
준영물급의 말인 적뢰만 해도 주인을 많이 가렸다. 홍여가 아니면 아예 무시했고 억지로 그의 등에 올라타는 사람을 낙마시킨 뒤 앞발로 짓밟아 버리는 아주 흉악한 말이다.
저 자그마한 황금빛 뱀이 정말 천년뇌각망이라면 상당히 흉포할 텐데, 예결처럼 연약한 인간을 잘도 따른다.
예결은 음혼귀마에게서 구해줘서 천년뇌각망이 자신을 잘 따른다고 설명했으나 아무리 봐도 신기한 건 신기한 거였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할 것 같군요.”
“어떻게 아셨어요? 뱀뱀이 빵!”
예결은 손을 총 모양으로 하고 뱀뱀이를 겨눴다. 빵 소리에 뱀이 철퍼덕 바닥에 쓰러졌다. 진영의 입은 더 벌어질 수도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더니…….”
그러거나 말거나, 예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뱀뱀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황금빛 뱀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손을 타고 오르더니 손목을 팔찌처럼 휘감았다.
더할 나위 없이 안정적인 모습이다.
인간들과 소통할 수는 없지만, 뱀뱀이, 아니 천년뇌각망도 나름의 사정은 있었다.
수십 년 만에 허물을 벗고 가장 연약해졌을 때 숨어 있던 땅굴에서 끌려 나왔다. 이 무뢰한에게서 저 무뢰한의 손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나중에는 몸을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우리에 갇혔다.
급기야 마지막 인간은 추위에 약한 뱀을 데리고 곤륜산의 정상에 올라 몸을 숨겼다. 동면 준비를 할 겨를조차 없이 급속도로 추워진 날씨에 천년뇌각망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추위로 죽는다니, 뱀의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비참한 최후였다.
그때 저 인간이 그에게 뇌전의 힘을 불어넣었다. 그것도 그가 수백 년이나 모아온 기운을 아득히 초월할 정도로 정순하고 강력한 기운이다.
천년뇌각망은 인간의 기운을 읽을 수 있었다. 자신에게 힘을 불어넣을수록 예결의 생명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숨까지 쥐어짜 천년뇌각망에게 힘을 주었다.
그러곤 본인도 얼어 죽을 것처럼 파란 입술을 하고서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덮어주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천년뇌각망은 예결에게로 와 뱀뱀이가 되었다.
인간은 전혀 모를, 천년뇌각망만의 이야기였다.
“대사형은 언제쯤 오실까요?”
예결은 진영에게 물었다. 말씨야 공손했으나 손목을 살짝 흔드는 게 신경 쓰였다.
음혼귀마의 시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미 알고 있는 진영은 저 뱀이 독보다 무서운 벼락을 내리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오늘 밤늦게 도착하실 겁니다. 먼저 잠자리에 드는 걸 지켜보라 명하셨습니다.”
“여기에 데려다 놓고 처음 오시면서 기다리지도 말라니.”
가만가만 눈을 내리깐 예결이 쓸쓸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진영은 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답할 수 없는 거였다.
제하량은 아직 십만대산 쪽의 일이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예결의 소식을 듣자마자 한달음에 곤륜으로 달려갔다. 밤이슬을 맞으며 돌아온 주군의 품에는 또 만신창이가 된 문예결이 안겨 있었다.
아직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청년이 이렇게 자주 사경을 넘나드는 걸 보면 진영조차도 안쓰러운 마음이 생겼다. 몇 명의 의원은 눈을 가린 채 이 장원의 문턱을 넘었고, 예결을 진맥한 다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처음 곤륜산 기슭의 강가에서 발견했던 때와 예결의 상태는 퍽 비슷했다. 그때보다 심각하진 않았으나 몸이 약해진 티가 났다.
밤새 헛소리를 하며 허공을 헤집던 예결의 손을 단단히 잡아준 하량은 아침 해가 뜨기 직전에 사막으로 떠났다.
예결의 곁에 남게 된 진영은 주군을 대신한다는 마음으로 예결의 회복을 돌봤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오늘 밤이면 얼추 마무리될 것이다.
“야율홍여라는 분도 함께 오시나요?”
“글쎄요.”
진영도 홍여의 거취는 잘 몰랐다. 워낙 뛰어난 기수인 홍여는 멀리 파견되는 일이 잦았다.
야율홍여가 손님에게 건네준 피리가 아니었다면 음혼귀마와의 일을 제때 알아내지 못했을 테니 그의 선견지명이 참으로 대단했다.
‘이젠 손님이라 칭하기도 애매하군.’
조만간 다른 칭호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하며 진영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지금 머무르는 곳이 예전의 그 장원이 아닌데 의아해하는 기색이 없으시군요.”
잠든 채로 옮겨졌는데 깨어난 후에도 여기가 어딘지 물어보는 법이 없었다. 주군의 사제는 연약한 듯 보였으나 기묘하게 대범했다.
“뭐가요?”
“무슨 상단이 이렇게 비밀스럽게 움직이는지 같은…….”
예결은 저를 떠보는 진영의 말에 웃어버렸다.
“그럼 말해주실 건가요?”
빤한 시선에 진영은 단박에 답했다.
“이곳은 숨겨진 안가 중 하나입니다. 주군이 일하시는 곳에서 좀 더 가깝지요. 비밀 통로도 몇 군데 있는데 추후 안내해 드릴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이젠 상단주라는 단어로 얼버무리려는 기색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나저나, 비밀 통로라.
“그런 말을 해줘도 되는 건가요?”
“제 재량 내에서 이 정도는 허락되어 있습니다.”
짐짓 가슴을 펴는 모습이 으스대는 아이처럼 보였다.
“처음 볼 때부터 대사형의 오른팔이라고 생각하긴 했지요.”
진영의 입꼬리가 알기 쉽게 올라갔다. 깐깐해 보이던 첫인상과 달리 꼬드기기 쉬워 보인다고 생각하며 예결은 침상에 파고들었다.
“그럼 저는 미리 좀 자둘게요.”
“이렇게나 밝은데요?”
“밤에 대사형이 얼굴 보러 오면 놀래 주려고요.”
예결이 눈을 찡긋하며 꺼낸 말에 진영은 허허 웃고 말았다. 그래도 문 공자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토끼인 모양이다.
간을 완전히 배 밖에 내놓고 다니니까.
***
제하량은 귀환하기가 무섭게 예결의 잠든 모습을 확인했다. 새근새근 잠든 예결의 모습에 안심했는지 곧바로 진영을 불러냈다.
대기 중이던 진영은 그간 밀린 보고를 올렸다.
“손님은 순조롭게 회복되는 중이십니다.”
회복 속도가 느린 건 제하량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니, 의외군. 처음 사제를 발견했을 적에 비하면 지금은 몸 상태가 훨씬 좋은 편인데…….”
그때만 해도 의원은 환자가 절대 회복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차라리 죽여주는 게 자비로울 거라고.
한데 이번에 데려온 의원은 예결의 원기가 크게 쇠했으니 제때 요양하고 쉬지 않으면 평생 골골거리며 살 거라고 진단했다.
오히려 지금 회복 속도가 느려진 게 하량으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사제의 과거 행적을 캐는 건 어떻게 되어가지?”
“삼랑의 과거 연줄까지 동원해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것 같다더군요.”
“…….”
하량은 침묵했다.
“그 외에 돌아가는 상황은 어떻지?”
“아직 중원 전역은 아니어도 청해 일대에 여러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진영은 그간 삼랑의 부대가 수집해온 정보를 짤막짤막하게 요약했다.
“개중에 가장 신빙성 있게 돌아다니는 건 마교에서 천년뇌각망을 회수하기 위해 정예를 파견했고, 그 과정에서 목격자인 곤륜의 제자를 죽였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산 사람으로 만드느라 공을 들였는데 이젠 죽은 사람이 됐군.”
제하량은 자조적인 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주군의 낯에서는 불쾌함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기묘한 만족감이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사제가 곤륜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아봤나?”
“지금은 다들 경계가 드높은지라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영은 하량의 눈치를 살폈다. 결국 언젠가는 전해야 할 이야기였다.
“이대제자가 전부 모여 훈련을 받는 연무장에는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고 식사도 언제나 홀로 했다는 일꾼의 증언은 확보했습니다.”
하량의 손이 교의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의 검미는 미동조차 없었으나 방 안에 느릿느릿 살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사숙께서…… 이렇게 경우 없는 분일 줄은 몰랐는데.”
하량의 음성은 냉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진영은 눈을 내리깔았다.
예결의 손목에 남은 시퍼런 멍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하량은 그날 이래로 그 손자국을 잊어본 적이 없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사제 같은 이를 키워낸 스승이라면 분명 존경할 만한 구석이 있으리라 여겼는데…….”
진영은 문예결의 일이라면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주군의 판단력에 더는 놀라지도 않았다.
“백양진인의 서가에 숨겨진 사제의 서한은 회수했나?”
“예. 총 열한 통입니다.”
하량은 진영이 건네는 봉투를 확인했다.
한 자 한 자 공들여 적어 내려간 글자의 획이 마무리되는 부분을 보면 먹을 아껴가며 쓴 티가 났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지만, 사제의 글씨가 아주 훌륭하군.”
하량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원하는 것, 먹는 것, 입는 것 아껴가며 쓰라고 곤륜에 보낸 게 아니었다.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을 정도의 사치를 시켜줄 수 있음에도 곤륜에 보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이젠 제 머릿속에서도 아득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사제가 음혼귀마를 만난 날, 그 봉우리에 왜 올라갔는지는 알아냈나?”
진영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백양진인이 차 끓일 물이 다 떨어졌다며 만년설을 퍼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고 합니다.”
예결에게 큰 호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주군이 애지중지한 손님을 남이 마구 부려 먹는 건 탐탁지 않았다.
하량은 무서우리만치 조용했다. 방 안에 너울너울 차오르던 살기마저 한순간에 사라졌다.
일견 침착해 보였으나 진영은 하량의 손이 교의의 손잡이 가운데를 쓱 파고드는 걸 목격했다. 마치 물에 젖은 모래사장에 손가락을 꽂아 넣는 양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저게 내공조차 끌어 올리지 않은 순수한 악력이라는 걸 생각하면 눈앞의 사내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새삼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한 차례 심호흡한 하량이 입을 열었다.
“곤륜에 넣던 지원을 끊는다.”
하량의 낯에 냉소가 어렸다.
“그렇게 청빈하고 고상하게 살고 싶으시다면야. 내 소원을 들어드려야지.”
“존명.”
이미 그는 곤륜지약을 어겼다. 매번 사문의 배신자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죄책감에서 이어오던 곤륜에 대한 후원을 끊는다 한들 저세상에 간 옛 사부님이 하량을 비난하진 않을 것이다.
아니, 설령 비난한대도 이젠 상관없었다.
지금 그에게 남은 건, 한 줌 움켜쥘 수 있는 건 문예결밖에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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