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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8화 (18/203)

18화. 원대한 포부 (2)

“오셨으면 깨우시지!”

아침에 일어난 예결은 불만을 토해냈다. 하량의 기척을 느끼면 바로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서인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만약 하량이 얼굴을 만졌다거나 손을 잡았더라면 가이딩 때문에라도 바로 깼을 텐데, 정말 담백하게 자는 모습만 보고 간 모양이었다.

“잘 자고 있는데 깨우고 싶지 않더구나.”

“진영에게 대사형을 기다리느라 일찍 자러 가겠다고 말해뒀는데, 그가 알려주지 않았나요?”

“그는 내 수하니 내게 복종할 수밖에 없단다.”

손수 과일을 깎아낸 하량은 예결의 앞에 놓인 접시에 이를 내려놓으려다가 입을 벌리고 있는 사제의 모습에 주춤했다.

“먹여달라고?”

“아.”

예결은 당황한 척 눈을 끔벅였다.

“그, 먹여 주시려는 줄 알았어요. 죄송해요.”

“아냐. 아니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하량은 손사래를 치며 예결의 입술로 과육을 가져갔다. 달짝지근하면서도 마무리가 시큼한 게, 한국에서 먹어본 적 없는 맛이었다.

“마음에 드니?”

“독특한 맛이에요.”

“바다 건너 섬에서만 자란다는 과일이란다. 네가 원한다면 다음 선박에 가득 채워오도록 하마.”

하량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으나 이 시대의 배가 얼마나 귀한지 아는 예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떡하지? 자신은 맨몸으로 중원에 돌아오는 바람에 가이드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큰일인데…….’

에스퍼가 가이드를 사로잡는 방법이라는 비공식 저서에 따르면 1조는 재력으로 가이드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라는 거였다.

가이드에게 건물 한 채 정도는 해줄 수 있다는 마인드의 에스퍼에게 둘러싸인 채 살아왔던 그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만약 여기가 한국이었다면 이야기가 다를 텐데…….’

예결은 S급 에스퍼였기 때문에 월화수목금토일 요일에 따라 마세라티나 부가티 베이론 같은 차를 바꿔가며 타도 통장 걱정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 대사형에게 얹혀사는 중이다.

‘그래도 이제 뱀뱀이가 있으니까 낭인 노릇이라도 해볼까?’

상념에 잠긴 채 턱을 타고 흘러내린 과즙을 손가락으로 훔쳐서 핥아먹는데 하량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슬슬 네 거취를 정하려 한다.”

그 말에 예결은 반듯하게 고쳐 앉았다.

“상단 일을 돕고 싶다고 하였지?”

“예.”

짤막하게 긍정하자 하량은 기다렸다는 듯 선언했다.

“네가 이제부터 청해상단주다.”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혼수를 넘겨주는 하량의 큰 배포에 뻔뻔한 예결마저 당황하고 말았다.

“상단을……. 저한테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자신에게 덜컥 이런 걸 쥐여주면 어쩐단 말인가?

‘대사형은 본인이 일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이제 숨길 생각도 없는 건가?’

“저는 정말로 허드렛일하고 싶다고 말씀드린 거였어요.”

남에게 내보이려는 내숭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자신이 상단을 홀라당 말아먹으면 어쩌려고 저런단 말인가?

“그리고 상단주라는 게 이렇게 쉽게 남에게 줄 수 있는 자리인가요?”

“애초에 청해상단주는 측근 몇 명에게 외부 업무를 담당시키고 본인은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사람이란다.”

“뭐 그런…….”

“상계에는 그런 괴짜가 한둘이 아니라 사람들도 그러려니 한단다.”

예결은 어깨를 움츠렸다.

“잘 해낼 자신이 없어요. 대사형이 공들여 키워놓은 상단에 누가 되면 어쩌죠?”

“네가 배워야 하는 건 상단 일이 아니라 제대로 된 수하를 두는 법이다.”

그리 말한 하량이 기둥의 그림자 쪽으로 턱짓했다.

“삼랑.”

기둥 뒤에서 사람이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거기에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던 예결은 애써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청해신의 삼랑이랍니다.”

나긋나긋한 게 아니라 느릿느릿한 어조에 예결은 그녀가 누군지 단번에 떠올렸다.

“제가 깨어났을 때 몸을 봐주신 의원님이군요. 그땐 감사했습니다.”

“뭘요. 저도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떠서 아주 즐거웠답니다.”

침통에 침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알면 놀랄 거라며 삼랑이 눈을 빛냈다.

태어나서 긴장 같은 건 전혀 해본 적이 없을 것처럼 느긋해 보이는 사람인데 상대를 긴장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삼랑이 너를 도와줄 거란다.”

“성심성의껏 보좌하겠습니다.”

하량이 진영을 붙여줄 거라 생각했던 예결은 삼랑의 등장이 의외로 다가왔다.

“제 신변은 뱀뱀이가 지켜줄 텐데.”

“뱀뱀이…….”

삼랑이 말꼬리를 흐렸다. 단숨에 천년뇌각망을 알아본 그녀에게 뱀뱀이라는 작명은 충격적이었다. 자존심 강한 영물이 그 부름에 순순히 응하는 것마저도.

“뱀뱀이는 영물이니 분명 너를 잘 지켜줄 테지. 하지만 삼랑처럼 인간의 방식을 잘 알지는 못할 거란다.”

과연, 하고 삼랑은 혀를 내둘렀다. 그녀의 주군은 뱀뱀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았다.

“그런 거라면…… 제가 삼랑께 한 수 배우겠습니다.”

“경칭은 생략해 주셔요. 저는 상하 체계가 분명한 게 좋답니다.”

“잘 부탁하지. 삼랑.”

곱게 웃은 여인은 처음처럼 기둥 뒤편의 그림자로 모습을 감췄다. 그녀에게서 들리던 자그마한 숨소리가 정말 멀어지는 게, 이번에는 자리를 비운 눈치다.

하량은 예결의 앞에 손질한 과일이 담긴 그릇을 밀어주었다.

“자, 그러면 청해상단주님, 업무를 보러 가시기 전에 이걸 마저 다 드십시오.”

놀리듯 사용하는 존댓말에 예결은 흠칫했다. 공손하게 구는 제하량은 예결조차 몰랐던 그의 욕망을 충동질하는 구석이 있었다.

“대사형…….”

여유를 되찾은 사내가 느긋하게 웃으며 과육을 예결의 입가로 가져갔다.

“어서.”

어찌할 도리 없이 과일로 배를 채운 뒤에야 예결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

예결은 상단주의 중요 업무를 배우기 위해 진영을 찾았다. 그를 상대해주는 것과 업무를 동시에 해치우는 진영은 마치 초인 같았다.

“왜 당신이 아니라 삼랑이라는 분을 붙여주신 걸까요?”

진영은 그 말에 보고 있던 장부를 정리하며 답했다.

“먼저, 저는 주군에게 대체할 수 없는 아주 유능한 수하입니다. 게다가 믿음직스럽기까지 하니 아무 일이나 맡기지 않지요.”

보통 사람이라면 시켜도 못할 거 같은 뻔뻔한 자화자찬에 예결은 혀를 내둘렀다.

파워숄더라도 입은 사람처럼 진영의 어깨가 봉곳하게 솟아오르는 환각이 보일 지경이었다. 진영은 예결이 제 눈을 의심해 비비거나 말거나 말을 이어갔다.

“삼랑은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 문 공자를 지키는 데 가장 적합한 종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상단 일이 그렇게 위험합니까?”

“경쟁 상단과의 피 말리는 혈투를 겪어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진영이 음침하게 웃었다. 예결은 그 혈투의 승자가 누군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아니, 근데 왜 이런 걸 저한테 물어보시는 겁니까?”

“투덜대면서도 가장 상세하게 설명해줄 것 같아서요.”

“주군께서 더 다정하게 알려주실 겁니다.”

“그건 그냥…….”

예결은 뭐라고 더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아니,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보통 뭘 모르는 티를 내기보다는 잘난 척을 하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의 본능 아닌가?

“이상하게 더 들으면 안 될 거 같군요.”

뭐라 둘러대기도 전에 진영이 중얼거렸다. 시작하기도 전에 거절당한 기분이라 영 좋지 않았다.

“매정하네요.”

어차피 말해 줄 생각도 없었으면서 예결은 투덜거렸다.

“일단, 상단주의 업무는 상단이 어떤 속성이냐에 따라 다릅니다. 청해상단의 경우 신강과 다른 지역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지요.”

중간 유통을 담당하는 상단인 건가?

예결은 나름의 방식대로 이해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특성상 표국과의 연계가 상당히 중요한 편입니다. 믿음직한 표국과 장기간 거래를 하거나, 여러 표국을 모아 입찰 경쟁을 시킬 수도 있지요. 어느 쪽이든 선호하는 방식을 선택해 주십시오.”

“그간 거래해온 표국과의 장부를 보고 싶은데요.”

예결의 말에 진영이 눈을 빛냈다. 아예 모르겠다면 기존에 어떤 방식으로 일이 처리되었는지 살피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가르치기도 전에 학생이 알아서 착착 습득하니 자신은 참 유능한 스승이라고 생각하며 진영은 장부를 가져왔다.

“이거 읽는 법도 알려주세요.”

예결이 웃으며 진영을 한껏 부려 먹었다.

이 수업은 날이 저물 때까지 이어졌다.

식사 때라며 찾아온 하량은 기진맥진한 진영과 남의 정기를 빨아먹기라도 한 듯 한껏 해사해진 예결을 발견했다.

“수업이 재미있는 모양이구나.”

“제가 집요한 학생이라 스승님을 너무 힘들게 하진 않았을까요?”

“진영은 유능하니 이 정도로 지치지 않을 거다.”

하량이 숨 쉬듯 당근을 채찍처럼 휘두르자 진영이 애써 몸을 일으키더니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붓을 쥐었다.

예결은 그 좀비 같은 모습에 눈을 빛냈다. 위에 있는 사람은 수하를 잘 다뤄야 한다더니, 하량은 이런 일을 많이 해본 눈치였다.

“그래도 건강 챙기는 건 잊지 말고, 쉬엄쉬엄하도록.”

“괜찮습니다. 주군. 식사를 여기로 올려달라고 부탁해 두었으니 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머리가 삐죽 흘러나왔는데 필사적으로 반듯한 모습을 하는 진영을 보며 예결은 몸을 꾸벅 숙였다.

“많이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진영은 그 공손한 태도에 의외라는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흐리게 미소 지었다.

“좋은 학생을 만난 덕이지요.”

그에게서 처음 듣는 겸양의 말 비슷한 것에 예결은 픽 웃어버렸다. 학부모 앞에서 학생을 칭찬해주는 선생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제하량과 나란히 걸음을 옮기던 예결은 그의 옷소매를 살짝 끌어당겼다. 대사형은 그가 뭘 하려는 건지도 모르면서 순순히 몸을 숙여왔다.

예결은 그의 귀에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속삭였다.

“제가 돈 많이 벌어서 대사형에게 새 배를 사 드릴게요.”

‘마세라티도 안녕. 부가티 베이론, 롤스로이스, 페라리, 람보르기니 모두 모두 안녕.’

중원이라 슈퍼카는 무리고, 적뢰보다 좋은 말을 구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 예결은 대사형에게 배를 한 척 뽑아줄 작정이었다.

에스퍼가 칼, 아니 뱀뱀이를 뽑으면 배 한 척 정도는 해와야 하는 법이다.

낭인 일로 돈을 벌어 보려다가 상단을 통째로 받았는데, 이 정도는 해내야 하지 않겠는가.

“새 배?”

하량이 놀랐다는 듯 반문했다.

“네. 그리고 바다 건너에서 대사형이 저에게 주신 과일을 가득 실어 올 거예요.”

오늘 제하량이 한 말이 고스란히 그에게 돌아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하량은 예결의 갈색 머리카락을 내려다봤다.

사제를 보고 있노라면 차분해지려 노력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아직 예결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는데 고작 그 말 몇 마디에 기쁨이 차오른다.

생소하기 그지없는 감각이다.

‘낳지도 않은 자식을 키우는 기분이 이런 걸까.’

만약 예결이 알았다면 비명을 질렀을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하량은 그의 손을 잡았다.

“내 기대하마.”

***

다음 날, 본인의 사무실로 점찍은 방에 출근한 예결은 일필휘지로 글을 휘갈겼다.

뒤편의 벽에 그 종이를 붙여놓으니 고등학교 시절 칠판 위에 걸어놓던 급훈이 생각났다. 예결은 몇 걸음 물러나 자신의 작품을 감상했다.

「목표는 중원 삼대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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