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원대한 포부 (3)
“어?”
방에 들어선 삼랑의 표정이 묘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급훈’의 위치에 시선이 머무른 직후의 일이었다.
“꿈이 참…… 소박하시네요.”
얼핏 빈정거린다고 착각하기 쉬웠으나 순수한 감탄처럼 들렸다.
“출근 첫날부터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느껴지는군.”
소박하다는 말은 이 정도야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 아니겠는가.
“무어, 제가 한 적극 하지요.”
삼랑은 나무늘보가 누님 소리 할 정도로 느긋한 어투로 호호 웃었다.
“그럼 상단주님께서는 앞으로의 계획을 어찌하실 예정입니까?”
“일단 청해상단이 주로 하던 게 중간 유통이라니까 그쪽을 알아보려고 해요. 어떤 물건을 어디로 보내는지 같은…….”
예결이 가장 강한 과목이 제2외국어였다면 가장 약한 과목은 수학이었다. 어제 겨우 중원식 장부 표기법을 배웠을 뿐이라 대단한 일을 해내는 건 불가능했다.
갑자기 전임 관리자가 숨겨둔 이중장부를 찾아낸다거나, 돈이 새는 구멍을 틀어막는다거나 같은 건 어렵다.
쉽게 쉽게 몸으로 때우려다가 머리를 쓰게 된 판국이다.
“근데 볼수록 신기하네.”
집무실에 놓인 장부를 휙 휙 넘기던 예결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떤 부분이 마음에 걸리십니까?”
“아니. 그동안 실패한 상행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게.”
현대에서조차 물류 배송 사고가 나기 마련이다. 하물며 중원은 칼 든 도적과 칼 안 든 도적이 번갈아 가며 설치는 무법지대 아닌가.
산으로 다니면 녹림이, 강으로 가면 수적이, 그리고 관도로 다니면 탐관오리를 만나게 된다.
도로명주소 같은 것도 없고 포장된 도로는 지극히 한정된 시대에 배송 사고가 이렇게까지 없다니.
“끝내주게 유능한 표국을 쓰는 건가?”
예결의 말에 삼랑이 웃었다.
“각지의 터줏대감이나 다름없는 표국과 연계해서 안전하게 상행을 진행하고 있어서랍니다. 그들은 녹림이나 장강수로맹과 인연을 맺고 있지요. 또 여러 관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서 저희 상단을 잘 보호해 줍니다.”
“이렇게 잘 굴러가는 상단에 내가 손대봤자 망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유능한 사람을 쓰면 된다고 해도 위에 앉은 사람이 멍청하면 답이 없다.
차라리 표국 같은 거였다면 또 모른다. 예결은 자신이 이끄는 모든 표행을 성공시킬 자신이 있었으니까.
‘내겐 무적의 뱀뱀이가 있다고.’
그러나 상행은 조금 다르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물건이 유행할지 내다보고 움직여야 한다. 중원은 넓기는 더럽게 넓어서 실시간으로 각 지역의 물가를 확인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일타강사 진영에게 속성으로 〈상단주, 이것만 알면 된다!〉 코스를 사사하긴 했으나 짧은 시간에 머리에 꽉꽉 들어찬 정보가 오히려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음…….”
눈을 살짝 굴린 그녀가 속삭였다.
“모로 가도 목표만 달성하면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라고?”
“상단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청해신의잖아요. 아주 끝내주는 약이 하나 있는데…….”
솔깃했던 예결은 끝내주는 약이라는 말에 몸을 뒤로 뺐다.
그의 뇌리에 진영의 평가가 떠올랐다. 삼랑은 수단과 방법 안 가리고 예결을 도와줄 사람이라고.
“불건전한 방식으로는 안 돼.”
“-이게 말을 오래 타는 표사나 군인, 그리고 오래 앉아서 공부하는 학자들의 고질병에 아주 특효랍니다.”
삼랑이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어쩐지 휘말린 기분에 예결은 침음했다.
“약효를 제대로 증명해낼 수 있다면 상단의 판매 상품에 포함시키지.”
“좋아요.”
삼랑이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자, 그럼 다음 지시를 말씀해 주세요.”
“아…….”
예결은 멈칫했다. 삼랑이 끝내주는 약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에 그가 조타륜을 잡을 수 있게끔 유도한 거다.
“진짜 유능하네…….”
“에이, 그래도 진영에 비하면 저 정도는 거북이지요.”
엉금엉금하고 기어가는 시늉에 예결이 웃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 일단 작은 것부터 시작해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예결은 계약 건이 정리된 죽간 중 붉은 실로 동여맨 것을 끌어다가 펼쳐놓았다.
“이거, 사천으로 가는 상행인데 동행해보고 싶어.”
예결도 여러모로 숙고한 사안이다. 청해에서 사천으로 넘어가야 하긴 했으나 계약 건 중에서는 가장 가깝다. 게다가 모든 사안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정해져 있었다.
보고 배우기에 이만한 건이 없었다.
“일단 주군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곤륜파에서의 일도 있고 하니 바로 허락이 떨어질지는 모르겠어요.”
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하량과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대사형의 곁에 오래 있고자 한다면 그의 곁에 뿌리박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상단씩이나 되는 걸 툭 던져줬으니 이걸 체하지 않게 잘 소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하량의 믿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
다시 만난 대사형은 비밀을 켜켜이 두르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그저 돌봐줘야 할 사제로 남는다면 하량은 자신이 누군지 영영 숨긴 채 그저 좋은 보호자로만 남을 것이다.
예결은 고작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저 짐작하고 캐내는 것 이상으로 대사형이 자신에게 비밀을 털어놓게 하고 싶었다.
괜히 어려운 길로 빙 둘러 가는 셈이지만 에스퍼라는 것들은 원래 이렇게 고약한 심보를 타고났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제 가이드의 일에서라면 양보도 타협도 불가능하다.
삼랑이 눈을 빛냈다.
“주군께 가기 전에 천년뇌각망을 잠시만 살펴봐도 될까요? 뇌전의 기운을 사용한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지만,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 궁금해서요. 독을 안 쓰니까 독샘도 없겠죠?”
와르르 말을 쏟아놓는 삼랑은 지금까지 본 모습 중 가장 신나 보였다. 예결은 손목을 슬쩍 들어 올렸다.
얌전하게 팔찌를 가장하고 있던 뱀뱀이는 눈이 마주치자 살짝 도리질을 쳤다.
“세상에, 설마 의사소통도 가능한 건가요? 진짜 엄청나네요. 크기도 작으니까 살짝 벌어진 문틈이나 창문 사이로도 잘 숨어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아, 그래도 색이 너무 눈에 띄려나? 아니지, 비늘에 검댕을 묻히면…….”
삼랑의 눈에서 탐욕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의 입에서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건 혼잣말에 가까웠다.
“얘는 내 호위영물이라 안 돼.”
단호한 답에 삼랑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하지만 영물이 이렇게 사람 말을 잘 듣는 사례 자체가 엄청 드문데…….”
그녀의 눈빛은 퍽 애처로웠다.
“어서 가서 일해야지. 청해상단이 중원삼대상단이 되는 그날까지!”
채찍질이라기보다는 응원에 한없이 가까웠다. 그런 예결을 돌아보는 삼랑의 표정이 이상야릇하게 일그러졌다.
“이렇게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건 처음이네요.”
“괜찮아. 우린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예결은 방긋 웃는 얼굴로 삼랑을 독려했다.
***
“주군이 안 계시네?”
“잠시 외출하셨어. 넌 왜 벌써 온 거야?”
죽간을 훑어보던 진영은 삼랑이 때 이르게 등장하자 의외라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니 내 할 일은 다 한 거 같아서…….”
삼랑은 말꼬리를 흐렸다. 진영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진짜 상단주님은 자기 손에 뭐가 떨어졌는지 모르는 거야?”
바빠 죽겠는데 갑자기 쳐들어온 것으로도 모자라 수수께끼 같은 말만 늘어놓는다.
“아니, 그게 목표가 중원삼대상단이래. 그날이 올 때까지 열심히 일하자고 하시더라.”
“뭐?”
진영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래서 나 백수 됐어.”
삼랑이 두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역시 의원이 될 걸 그랬다며 꿍얼거렸으나 황망한 진영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상단의 장부를 보여줬는데? 읽는 법도 알려드렸고.”
중원에 문맹은 많았으나 예결은 분명 읽고 쓰는 법도 알았으며 숫자를 셈하는 법도 알았다. 심지어 일부는 암산으로 해치워 버리기까지 했다.
진영은 똑똑한 학생을 보며 주군의 선견지명에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 손에 떨어진 게 금원보인지 철전인지 구별도 못 한다고?
“말도 안 돼…… 우리랑 직접적인 거래를 틀 수는 없으니까 눈 가리고 아웅 격으로 내세운 게 청해상단이잖아? 중원 각지의 부호들이 신강 너머 서역에서 넘어오는 물건에 얼마나 환장하는데? 구파일방은 몰라도 그 잘난 오대세가도 모르는 척 청해상단을 이용하고 있고.”
진영은 거의 삼랑의 멱살을 잡을 기세였다.
“향신료며 유리나 각종 이색적인 물건이 얼마나 유행인데?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고! 근데 그걸 유통하는 유일무이한 상단을 손에 쥐고 뭐? 중원삼대상단……?”
“아니, 내가 세운 목표가 아니거든. 왜 나한테 그래…….”
삼랑이 소심하게 종알거렸다. 눈을 희번득하게 뜬 진영이 물었다.
“너라면 문 공자에게 따질 수 있겠냐?”
“그럴 리가.”
삼랑의 답은 단호했다.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문예결이 독 오른 족제비 같기는 해도 그럭저럭 감당할 만했다. 정말 두려운 건 그 뒤의 제하량이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예결 앞에서는 더없이 점잖은 사내처럼 굴지만, 제하량은 무서운 인간이었다.
“교의 자금 세탁까지 청해상단을 통하고 있어서 곧장 동원할 수 있는 금력은 만금전장도 못 따라오는데…….”
심지어 청해상단은 암시장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하오문과 손을 잡고 연 흑점을 통해 벌어들이는 돈으로 십만대산의 모든 교도가 먹고살 정도다.
매출을 속이고 있어서 중원삼대상단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진 못했으나 원한다면 천하제일상단의 자리도 능히 노릴 수 있을 텐데…….
진영의 낯에 망연자실함이 번졌다.
지인에게 애지중지 아끼던 도자기를 선물했더니 그게 강아지 물그릇으로 쓰이는 걸 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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