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20화 (20/203)

20화. 원대한 포부 (4)

“뭐, 청해상단은 주군의 것이니 주군 맘대로 하는 게 옳지.”

그리 말하는 삼랑은 남의 것이라도 강탈해서 제하량의 앞에 바칠 이였다. 홍여는 그래도 상식이라도 있으나 삼랑은 그나마도 비틀려 있는 인간이라 영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웠다.

착잡해진 진영을 일깨운 것은 바람 소리였다.

장지문이 차례대로 열리더니 제하량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저벅저벅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그 소리에는 묘하게 사람을 긴장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목덜미에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이 닿아 있는 것처럼.

비도 내리지 않는 날이었으나 하량은 우장을 두르고 있었다. 색이 어둡기 때문일까, 차가운 밤이 서 있는 것 같았다. 하량이 우장의 여밈을 풀어내자 진영은 성큼 다가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우장의 한 귀퉁이에 무언가 검붉은 것이 묻어나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진영의 낯에는 망설임이나 불쾌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우장을 벗어 던지니 그 아래로 하얗고 청수한 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허리띠에 은근히 들어간 구름무늬가 어딘지 모르게 곤륜을 연상시켰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정돈한 하량이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명했다.

“삼랑, 우관루에 네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 다녀오거라.”

“존명.”

산뜻하게 고개를 숙인 삼랑은 사뿐사뿐 하량이 열어놓은 문 너머의 어둠으로 사라졌다. 아무도 손대지 않았음에도 장지문은 스르륵 닫혔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이 방 안은 온전히 고립된 공간이 되었다. 진영은 하량이 자리에 앉자 따뜻한 찻주전자를 가져와 다탁에 내려놓았다.

잔에 연한 녹색 찻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리던 하량은 진영이 찻주전자를 내려놓자 입을 열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구나.”

오래 알고 지낸 만큼, 그는 수족의 습관을 익히 알고 있었다. 진영의 버릇 중 하나는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차를 대접하는 거였다.

“정말 문 공자에게 청해상단을 맡기실 생각입니까? 만약 일이 잘못 돌아가더라도 개입을 금지하셨기에 걱정됩니다.”

교의에 앉아 찻잔의 향을 음미하던 하량은 부드럽게 답했다.

“그 애가 원하는 대로 하게 두거라.”

“주군의 판단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청해상단 건에 대해서는 재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진영은 제하량을 주군으로 모신 이래 그가 걷는 패도에 한 점 의혹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주군의 결단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에 열이 무엇인지 잊은 짐승이 한 소년 앞에서 다정을 시늉했기 때문이다. 애써 흉내 낸 온기를 믿고 다가온 소년에게 기꺼이 곁을 허락해주고 그의 상처를 핥아주는 모습을 목격한 까닭이다.

입술을 깨문 진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오래 헤어져 있었던 만큼 애틋하고, 또 생명까지 구해준 은인이니 문 공자에게 뭐든 해주고픈 주군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문 공자는 청해상단의 무게를 모릅니다.”

그는 지금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 같은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무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들 갓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에게 진검을 쥐여주지 않듯이 대부호의 집이라 해도 갓 셈을 배운 아이에게 대뜸 금원보부터 건네주지 않습니다.”

진검을 쥔 어린아이는 다른 사람뿐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위험하다. 감당할 수 없는 돈을 가진 아이는 그걸 저도 모르게 낭비하거나 남에게 빼앗기기 마련이다.

예결에게 청해상단을 내준다는 건 그에 얽힌 이문과 욕심까지 떠맡게 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물론 손실은 메꿀 수 있겠지요. 다치면 치료하면 그만이고 돈을 낭비하면 다시 금고를 채워 넣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주군.”

진영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속삭였다.

“사람이 망가집니다.”

부모의 권세가 자신의 권세인 줄 아는 망나니는 어딜 가나 존재한다. 그 망나니가 태어났을 적부터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려고 마음을 먹었겠는가?

“이가 빠진 검은 쉽게 고칠 수 있어도 망가진 사람은 쉬이 고칠 수 없습니다.”

진영의 우려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제하량이 웃었다.

그 조용한 미소에는 난처함이나 깨달음, 심지어 발끈하는 기색마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내 사제에게 퍽 호의를 품고 있구나.”

청해상단을 예결에게 떠맡길 때, 하량은 예결에게 좋은 스승이 될 진영 대신 삼랑을 붙였다. 그녀는 하량이 예결에게 옥새를 훔쳐다 줘도 그러려니 할 인물이다. 하지만 진영은 고민을 한다.

그래서 도덕관념이 희박하고 명령이 최우선인 삼랑을 택한 것이다.

“그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정말 많이 생각했단다.”

정말 많이 생각했다.

십만대산에 포로로 끌려가며 맨발로 달궈진 사막을 가로지를 때, 살아남는 한 명은 원래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말에 함께 잡혀 왔던 일대제자의 손에 목이 졸렸을 때, 마의라는 자의 손에 넘겨져 강제로 마공을 익히고 주화입마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때, 해를 보지 못한 지 수 년이 되어갈 때, 저 같은 이들이 널려 있는 그 동굴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다며 애걸하던 동문의 피를 손에 묻혔을 때…….

하염없이 사제를 떠올리고, 또 생각했다.

고독이 심어져 놈들의 개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맡은 임무에 성공했을 때, 포로로 끌려온 정파인을 감시하다가 탈출하던 이를 죽였을 때, 자의로 더 강력한 마공에 손을 댔을 때, 십만대산을 나서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중원으로 나갔다가 먼발치에서 곤륜산을 바라봤을 때…….

스스로를 잃어버릴 것처럼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예결은 그의 안에서 더없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죄책감에 지나지 않던 몸부림은 점차 습관이 되었다. 사제를 떠올리는 동안에는 숨을 쉬어도 될 것 같았다.

‘그 아이가 내게 살라 하였으니까.’

그렇게 이십 년이 지났다. 하량을 위해 몸을 던진 사람은 문예결이 처음이었으나 그가 마지막은 아니었다. 심지어 눈앞의 진영조차 하량의 대역을 섰다가 치명상을 입고 보름 동안 자리보전을 한 일이 있다. 삼랑은 또 어떤가? 그녀는 제하량을 위해 혈육의 숨통마저 끊어낸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량은 가장 최초의 시작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지금의 그는 다시는 옛 시절의 제하량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슬픔은 너무도 닳고 닳아 싸구려가 되었다. 다시는 문예결을 위해 울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울어주지 못하리라.

이런 면에서 보면 값싼 아편에 취해 고통을 잊고 칼을 휘두르는 삼류 낭인이나 만마의 주인인 제하량이나 그렇게 다를 것도 없었다.

“이제는 좀 보고 싶구나.”

위진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제하량은 이미 했던 말을 반복했다.

“무엇이든, 결이가 원하는 대로 하게 두거라.”

사람은 망가져도 죽지 않는다.

“…….”

진영은 몇 번이나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리라.

처음에 그는 주군이 예결을 살피는 게 부모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궁극적으로 그가 독립해서 본인의 두 다리로 서야 한다는 걸 듯하다. 한데 그의 주군은…….

‘영영 일어서지 못한 채 주저앉아도 상관없다는 것 같지 않은가?’

“혹 문 공자가 주군을 원망하기라도 한다면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제하량이 흐린 미소를 지었다.

“곤란한 질문이구나.”

원망? 고작 그 때문에 어찌 후회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결은 죽은 사람이었다. 그 심장이 뛰고 두 눈을 뜬 채 원망이든 증오든 저를 향해 쏟아낼 수 있다면 그건 차라리 기껍기만 했다.

“사실 난 그 애가 뭘 해도 좋기만 할 것 같으니…….”

중심이 없으니 균형도 잡을 수 없다. 그래서 곤륜으로 보내야 했던 거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때 예결을 보냈어야 했다.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울타리 속에서 보호받았어야 했는데, 그러나 이젠 너무 늦고 말았다.

이번 사건으로 자신의 품이 아닌 곳에서 예결이 안전할 수 있을지 의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은 버틸 수 없으리라.

제하량은 나약한 인간이었다. 비 내리는 처마 아래에서 만난 어느 소년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래서 네가 아니라 삼랑인 거다. 약을 써야 하는 곳이 있고, 독을 써야 하는 곳이 있듯이.”

조곤조곤한 하량의 음성은 진영에게 충분히 닿았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였다면 진영이 목숨 걸고 충언을 올릴 이유도 없다. 예결에게야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게 될 테지만, 어차피 진영에게는 그의 주군이 우선이었다.

마침내 진영은 고개를 숙였다.

“……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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