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원대한 포부 (5)
삼랑에게 사천행의 포부를 밝힌 바로 다음 날, 예결은 하량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사천? 그 덥고 습한 곳에 굳이 가야겠느냐?”
하량의 낯에 걱정이 엿보였다.
“벌레도 많고. 음식도 매운 거투성이라 몸에 좋지 않을 거다. 향신료를 너무 많이 쓰거든.”
“대사형 매운 거 싫어하세요?”
스무 해를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예결의 눈이 동그래졌다.
한국은 혓바닥이 나약한 자는 방심할 수 없는 땅이었다. 크림 파스타를 시켜도 입에서 불을 뿜게 되고 분명히 간장 찜닭을 시켰는데 잘못 씹은 고추 때문에 혀의 감각이 마비된다. 어딜 가든 상에 빨간 반찬이 하나 이상은 오른다.
본디 거지 출신이라 가리는 거 없이 잘만 먹는 예결도 난색을 표할 정도로 매운 음식이 많았다. 그러니 사천 음식 정도는 고향에 돌아온 기분 아니겠는가.
“향신료의 자극이 강하면 재료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없으니까.”
대사형의 말에 예결은 아쉬움을 삼켰다. 매운 음식을 먹고 눈이 그렁그렁해지는 하량을 보고 싶긴 했으나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먹일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향신료가 덜 들어간 음식 위주로 먹을게요.”
약속, 하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하량이 잠시 망설이다가 마주 손가락을 걸어왔다.
오늘치 가이딩 사심을 충족시킨 예결은 착한 사제답게 방긋방긋 웃었다.
‘어떻게 해야 대사형을 뒤로 넘길 수 있을까?’
일단 청해상단을 중원삼대상단으로 만들어서 신뢰를 얻는 게 최우선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른스럽고 유능한 모습을 대사형에게 보여줘야 했다. 풋내 나는 어린애와 연애를 도모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필 사천에 가려는 이유는 뭐지?”
“청해랑 감숙은 너무 외진 지역이라 물류가 흐르는 양이 고만고만해요. 그런데 사천에는 오대세가 중 하나인 당가도 있고 구파일방의 아미파와 청성파가 자리 잡고 있잖아요.”
예결은 눈을 빛내며 덧붙였다.
“흐름을 파악하려면 일단 큰물에 뛰어들어야지요.”
“음…….”
하량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예결의 뺨을 쓰다듬었다.
“얇고 통풍이 잘되는 옷을 새로 맞춰야겠구나.”
이는 곧 허락이었다. 예결은 환하게 웃었다.
“정말 조심해서 다녀올게요.”
“아. 맞아.”
하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곤륜에서 너를 찾고 있다더구나.”
“음.”
“사숙께서 네 생각에 잠도 못 이루시는 모양이야.”
백양진인 이야기를 하는 대사형이 제 낯을 살피는 게 보였다. 예결은 어찌 반응해야 하나 싶었다. 사부님에겐 미안하지만 그래도 대사형 곁이 좋은 사제인 척?
“재미있네요.”
예결의 입술에서 냉소적인 어투가 튀어 나갔다. 스스로를 다잡지 못해서 악감정을 토해낸 건 아니다.
백양진인은 분명 그의 두 손으로 예결의 시신을 화장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연락을 주고받았던 걸 생각하면 백양진인은 대사형에게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예결은 대사형이 백양진인을 못 믿을 사람이라 여기게 할 작정이었다.
“죄송해요. 저를 생각해서 돌려보내 주신 건데, 정작 전 사부님의 마음에 차지 못하는 제자라서…… 대사형만 곤혹스럽게 만든 것 같아요.”
“나를 곤혹스럽게 하다니.”
“제가……. 곤륜에 있었으면 하셨잖아요.”
그때 제하량은 예결을 진심으로 밀어냈다. 어설픈 가증 떨 것도 없이, 예결이 당시 받은 상처는 진짜였다.
“편지를 그렇게나 많이 보냈는데 대사형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제가 대사형에게 뭔가 잘못한 게 아닐까 하고 얼마나 생각했는지 몰라요.”
손에 서신 한 통 쥐어본 적 없는 제하량은 백양진인이 얼마나 훌륭한 거짓말쟁이인지 알게 되겠지.
‘내 손으로 수염 쥐어뜯으러 안 가는 게 전생의 사부님에 대한 최선의 예우입니다.’
다시 곤륜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백양진인이 애지중지하는 서가에 번갯불을 꽂아주리라. 효도하는 차원에서 하얀 수염도 바짝 태워드릴 작정이었다. 그 하얀 수염을 유지하는 데 백양진인이 들이는 노력이 은근히 대단했다. 찻잎이 든 도자기의 뚜껑도 다 열어놓고 습기가 스미게 할 거고, 또…….
나쁜 생각을 하다가 히죽 웃을 뻔한 예결은 황급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다시는 사문의 땅을 밟지 않겠다고 하셨던 대사형이 저를 찾아와 주셔서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몰라요.”
“결아…….”
하량의 손이 그의 어깨를 감쌌다. 턱을 잡고 고개를 들어 올리려 했으나 그 첫 시도에 예결은 미미하게 저항했다. 정말 딱 거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만.
“내가, 이 우형이 많이 잘못했다.”
하량으로부터 따스한 가이딩이 흘러 들어왔다. 마치 흐드러지는 봄의 한가운데에 내던져진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위로 먹먹하게 젖어드는 봄비가…….
“……대사형?”
품에 안긴 채 눈만 빼꼼 내민 예결은 하량의 낯에 번진 고통에 당황했다.
‘아, 아니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으면 어떡해요. 선배들!’
“버린 적 없단다. 정말이야. 한 번도, 내가 어떻게 너를 내려놓을 수 있겠니.”
“대사형…….”
예결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이젠 하량이 놓아주지 않았다. 제법 숨 막히고 좋았다.
너른 가슴에서 벗어나려는 척 얼굴을 기댄 채 예결은 살살 녹아내렸다. 진짜 위험할 정도로.
“윽.”
때마침 뱀뱀이가 새끼손가락을 깨물어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제하량을 덮쳤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예결이 신음을 내뱉으며 움찔 몸을 떨자 하량은 그제야 사제를 놓아주었다. 탐탁지 않다는 시선이 예결이 손목으로 향했다.
“많이 아프니?”
하량의 눈이 어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적뢰의 등에 딸려온 뱀뱀이를 보고 대사형은 예결이 올 때까지 그를 보호해 줬다. 그 결정에 흰 담비 털 외투가 한몫하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예결을 데리고 돌아온 하량은 천년뇌각망이 그에게 딱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도, 종래에는 손목을 휘감고 팔찌 노릇을 하는 것도 떼어놓지 않고 가만히 지켜봤다.
“밥 먹을 때가 돼서 이러나 봐요.”
“딱히 살의가 느껴지지 않으니 네 말대로 데리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지만…… 계속 물면 말하렴.”
“어떻게 하시게요?”
“버릇을 가르쳐 줘야지. 다시는 네 손을 물지 않게.”
예결은 그만 웃어버렸다.
상인이라면서 온 무림인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다는 영단을 앞에 두고도 탐욕을 드러내지 않는다. 기껏해야 예결의 애완동물 취급하는 게 다였다.
값진 걸 보고도 팔아넘길 생각을 하질 않으니 결국 진실은 둘 중 하나다.
정말 형편없는 상인이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상인이 아니었거나.
‘형편없는 상인이라면 청해상단 같은 걸 나에게 덜컥 넘길 리가 없지.’
애초에 상단을 차릴 수완도 없을 테니까.
지금 예결은 아주 큰 퍼즐을 맞추는 중이었다. 몇 조각은 하량에게서, 또 몇 조각은 진영에게서, 그리고 나머지는 백양진인에게 얻었다.
진실은 서서히 윤곽을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예결은 이를 제 손으로 완성하고 싶지 않았다.
‘대사형이 직접, 자기 입으로 인정해야지.’
짝사랑은 일단 들켜야 하는 것처럼, 이 관계는 하량이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고자 마음먹어야만 시작할 수 있다.
예결 본인은 뭐 끝내주는 거짓말쟁이로 남을 생각이었다. 그러니 균형을 하량이라는 추로 맞춰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것도 감수하지 않고 예쁨만 받고 싶다.
이기적이고 못난 생각이라는 걸 예결 본인도 잘 알았다.
21세기의 한국에서 본 픽션 속 영웅의 조형은 다양했다. 평범한 사람일 때도 있고 에스퍼거나, 때로는 가이드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악당은 항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반드시 에스퍼가 맡는다.
에스퍼는 태생적으로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다.
“뱀뱀이는 앞으로 말 잘 들을 거예요. 그렇지?”
천년뇌각망이 말 잘 듣는 개처럼 머리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하량은 사제가 길들여온 영물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뗐다.
“그래. 그래도 내가 네 안전에 안심할 수 있게 된 건 저 영물 덕도 있으니까.”
예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 하량이 덧붙였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어디에서든 개의치 않고 말하렴. 내가 없어도 항상 삼랑은 곁에 있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삼랑은 어디에 있어요? 대사형에게 말을 전해주러 간다고 나간 뒤로 한 번도 못 봤는데.”
예결이 고개를 갸웃하자 하량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예전에 좀 알던 사람들을 만나러 갔단다.”
“이 시간까지요?”
“오랜만이라 많이 반가운 모양이야.”
“흠. 어제 그렇게 빠릿빠릿하게 출근하더니 하루 만에 지각이네요.”
하량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녀 말로는 자기가 백수가 됐다던데, 혹시 무슨 소린지 아니?”
예결의 눈이 동그래졌다.
“해고한 적도 없는데 백수라뇨? 아, 맞다. 대사형도 저 일하는 곳 보러 오셔야죠.”
하량의 손을 거의 잡아끌다시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간 예결은 벽에 떡하니 붙여놓은 제 원대한 포부를 자랑했다.
“어때요?”
“중원삼대상단이라. 이제 나는 사제만 믿고 일선에서 물러나도 되겠어.”
하량이 머금은 미소가 녹아내릴 듯 황홀했다. 예결은 미남이긴 해도 언제나 차가워 보이던 하량의 얼굴이 이렇게 봄볕처럼 따스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뭘 해도 좋으니, 너 하고픈 걸 하렴.”
갈색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는 손길에서 묵직한 애정이 묻어났다.
“몸 건강히, 내 시선이 닿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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