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사천당가 (1)
“덥긴 진짜 덥네.”
예결은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중얼거렸다. 땀도 많이 나고 말을 오래 타고 와서 그런지 엉덩이도 아팠다. 안장 자체는 아주 고급품이었지만 워낙 이 시대의 길이 잘 닦여 있지 않은 탓이 컸다.
“더위를 많이 타시는군요.”
예결과 삼랑은 청해상단의 상행 가장 앞에서 말을 타고 있었다. 하량은 예결에게 마차에 탈 것을 권했으나 그는 이번 기회에 승마에 익숙해질 생각으로 말을 택했다.
“추위를 타는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더운 게 더 싫네요.”
예결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래도 전생에 곤륜의 제자였던 기억 때문인지 추운 건 버틸 만했다.
흐느적거리는 예결의 모습을 바라보던 삼랑은 무언가 위화감을 깨달았다. 두 팔을 늘어트린 통에 말고삐도 제대로 안 잡고 있는데 용케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똑바로 움직이고 있었다.
가만히 관찰하니 예결의 옷소매에서 얼굴만 삐죽 내민 천년뇌각망이 고삐를 물고 있었다.
“와……. 적뢰도 제법 똑똑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뱀뱀이는 더 대단하네요.”
예결은 어깨가 으쓱해지는 걸 느꼈다.
힘들어서 늘어지니까 뱀뱀이가 고삐를 입에 물기에 뭔가 했었다. 그런데 예결이 하는 양을 보고 그 잠깐 사이에 말을 어찌 다뤄야 하는지 익힌 모양이었다.
“무림인들은 내단 빼먹을 생각만 하니 몰랐겠지.”
삼랑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녀도 그 ‘무림인’의 범주에서 자유롭진 않았다.
“그도 그렇네요.”
뱀이 대신 말고삐를 쥔 것도 제법 진풍경인데 흐느적거리는 예결이 절대로 낙마하지 않는 것도 묘했다. 진맥할 때 확인하기로는 무공을 익힌 몸은 아니었다. 그런데 균형 감각이 어지간한 무인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신기한 분이란 말이지.’
습관적으로 상대하는 이의 정보를 뇌리에 새겨넣던 삼랑은 저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상당히 큰 규모의 성곽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곧 사천 성도에 도착합니다. 사천에는 청성파와 아미파, 그리고 사천당가가 공존하고 있지만 성도에서만큼은 당가의 힘이 큽니다. 눈에서 녹광(綠光)이 흐르는 사람을 주의하셔요.”
“사천당가의 무인 말이야?”
“충돌이 일어나면 귀찮습니다. 게다가 독 쓰잖아요. 재수 없으면 해독약 제때 못 구해서 장기 일부의 기능을 잃을 수도 있지요. 그나마도 내공이 받쳐주는 무인이나 살아남지, 평범한 사람은…….”
삼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뭐, 저들도 청해상단에 소속된 이를 함부로 건드리진 않을 겁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피하기 위한 가벼운 조언이라며 삼랑이 나긋하게 웃었다.
원체 긴장감 없어 보이는 이가 하는 경고인 만큼, 예결은 나름 새겨들었다.
나름.
“뱀뱀이는 잘 숨겨두셔요. 워낙 자그마한 크기니 눈여겨보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걱정하지 마.”
삼랑이 뱀뱀이라는 이름에 기겁했으면서도 천년뇌각망이라 칭하지 않는 이유를 잘 아는 예결은 옷소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건 뺏길 생각 없으니까.”
희미하게 묻어나는 독점욕에 삼랑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정면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참 이상한 일이지, 출신만 두고 보면 명문정파의 직계 제자였던 예결이 가깝게 느껴지곤 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황천에 몸을 반쯤 담그고 있었고 여전히 진기 한 줌 느껴지지 않는 몸인데도 위험한 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미있네…….’
삼랑은 살면서 제 위기감을 의심한 적이 없다. 본능은 언제나 그녀를 생존으로 인도했다.
한데 비도 한 자루 날려보지 못한 채 비무장한 일반인한테 당할 거라는 생각이 들다니, 오래 동고동락한 육감이 드디어 망가진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건 당연했다.
직감과 사고 능력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면 삼랑이 선택할 쪽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청해상단의 행렬은 성문에서 한 번 멈췄다. 그러나 그간 만들어놓은 견고한 연줄 덕에 검문은 빠르게 끝났다.
예결은 새삼 청해상단이 대단하구나 싶어 눈을 끔벅였다. 공항 검색대에서도 이렇게 쉽게 통과해본 적이 없었다.
한국은 한국대로 출국한 S급 에스퍼가 타국에 눌러앉을까 두려워해서 출국 심사 때마다 그를 주저앉혔다. 외국에서는 예결의 존재를 잠재적 위협으로 봤다. 봉인된 상태라곤 하나 가이드가 배정되지 않은 미성년 에스퍼가 폭주하거나 반 에스퍼 연합의 테러리스트일 확률을 엄중히 심사했다.
서너덧 시간의 심문을 견디고 나오면 녹초가 된 부모님이 예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경험이 몇 번 반복되자 매년 다니던 가족 여행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냥 평범한 분들이셨던 거지.’
돌연 S급 에스퍼로 각성한 아들을 감당하려 애썼으나 균열의 조짐은 군데군데 스며 있었다.
청해상단은 성도의 장원 하나를 빌려 숙소로 삼았다. 다루는 물건이 귀한 만큼 보통 객잔에는 머무르지 않는 눈치였다.
상단 사람들이 짐을 부리기가 무섭게 눈에 은은한 녹광이 서린 무인이 마중을 나왔다.
“청해상단의 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토록 빨리 달려온 걸 보면 과연 성도에서 사천당가가 얼마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만했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등장한 걸 보면 정보력이 보통이 아니다.
“청해상단의 행수 진삼이요. 당가의 책임자는 누구십니까?”
진삼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예결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
“하하, 진 행수님, 오랜만입니다.”
당가 측에서 서글서글해 보이는 낯의 사내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기운 자체는 잘 갈무리했으나 눈이 녹색으로 보일 정도로 독 기운이 짙었다.
“당 공자, 이거 오랜만입니다.”
“이젠 공자도 아닙니다. 곧 혼례를 올릴 예정이라서요.”
“이거, 축하주를 마셔야겠군요.”
두 남자는 잘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자연스럽게 청해상단이 빌린 장원 내로 들어선 그들은 거래에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결은 천연덕스럽게 동석했다. 애당초 제하량에게 말한 대로 상행이 돌아가는 모습을 배우기 위해 거래를 기록하는 중이었다.
자잘한 사담을 주고받으며 분위기가 풀리자 당서악은 그쪽의 용건을 꺼냈다.
“당가에서 호위를 위해 파견하는 이들의 비용을 좀 올려받아야 할 듯싶습니다.”
조용히 붓만 놀리는 예결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소 젊은 편이긴 했으나 글을 쓸 줄 아는 이는 드물었기에 동행시키는 게 그리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진지하게 대화 내용이나 흐름을 받아적었다. 그러나 금액 협상이 시작되자 실랑이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점점 영양가 없는 내용에 심드렁해진 예결은 진지한 얼굴로 딴짓을 시작했다.
「대사형 보고 싶다.」
「자진해서 사천까지 오다니,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상사병으로 죽은 에스퍼가 되는 건가?」
「언제부터 에스퍼가 그렇게 정정당당하게 가이드를 꼬셨다고, 그냥 치사하고 비열하게 승부할 걸.」
「아니다. 목표는 기사멸조니까 신중하게 접근해야만. 중원에는 위치추적기가 없다고.」
「예전에도 대사형 가슴이 그렇게 컸나?」
그야말로 의식의 흐름이었다. 다소 엄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낙서는 한국어로 적고 있으니 누가 훔쳐보더라도 무슨 내용인지는 모를 터다.
고등학교 다닐 적 모의고사를 풀고 시험지 한 귀퉁이에 한자로 「점심밥 돼지 두루치기」 하고 끼적거리던 추억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나이를 하나도 안 먹은 걸 두고 기연을 만났다고 하셨는데, 무슨 기연?」
와중에 심각한 고민도 끼워 넣었다.
“아무래도 요새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녹림만 해도 기승을 부리는데 장강수로맹의 준동이 심상치 않다더군요.”
무심코 한글로 녹림과 장강수로맹이라 적을 뻔했다. 예결은 아차, 하고 한자로 바꿔 적었다.
“일단 좀 더 생각해보고 연통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진 상단주님께서 부디 현명한 결정을 하시길.”
마침내 당서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권을 한 그는 당가의 무사를 이끌고 장원을 빠져나갔다.
“어떠셨습니까?”
행수 진삼이 예결에게로 와 정중히 물었다.
“무척…….”
예결은 자신이 적어 내린 낙서 위를 붓으로 쓱쓱 그어 검게 먹칠했다.
비싼 종이를 낭비하는 꼴이다. 그러나 진 행수는커녕 누가 이를 지적할 수 있겠는가?
그는 엄밀히 말해 행수의 수행원이 아니라 일을 배우러 내려온 낙하산이었다. 한국이든 중원이든, 회장님 직속 낙하산에게 딴지를 걸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흥미로웠습니다. 하지만 속도가 생각보다 더디군요.”
“사천당가는 오대세가 중 하나이니 그들의 체면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렵군요.”
예결이 겸양을 위해 꺼낸 말에 진삼이 허허. 하고 웃었다.
“차차 배워 나가시면 됩니다. 이 진삼이 돕겠습니다.”
이후는 괜히 달라붙는 진삼을 떼어놓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말로는 일을 알려 주겠다고 하는데 척 보기에도 상단주에게 줄을 잘 보이려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모든 에스퍼가 그렇듯이 제 가이드 외에는 관심도 없는 예결은 귀찮을 정도로 달라붙는 진삼에게 학을 떼며 삼랑과 함께 사천 구경을 한다는 명목으로 장원에서 달아났다.
“엄청 집요하네.”
밥때가 거의 다 됐는데 식사도 안 하고 장원을 나섰다.
“밥 먹을 때 건드리면 화날 거 같아서 일단 나오긴 했는데, 배고파.”
“저기 객잔으로 가지요. 소면이 괜찮습니다.”
사천에 몇 번 다녀온 경험이 있는지 삼랑은 복잡한 거리를 잘도 누비더니 예결을 한 객잔 앞으로 이끌었다.
시끌시끌한 가운데 점소이는 용케 손님이 새로 들어온 걸 알아채고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이십니까?”
“둘이네. 합석은 됐고. 오늘은 소면 가격이 얼마지?”
“예. 소면 한 그릇에 철전 세 개입니다!”
삼랑의 질문에 점소이가 힘차게 말했다.
“여기 소면 세 그릇에 죽엽청 하나.”
예결을 대신해 삼랑이 주문을 넣었다. 그는 점소이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멍해진 상태였다.
자리에 앉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릇이 앞에 놓일 때까지도 예결의 눈은 여전히 탁했다.
“소면 한 그릇에 철전 세 개. 세 개라…….”
고기 한 점 찾아볼 수 없고 국물도 제법 맑은 편이라지만 간도 되어 있고 적당히 속을 채워줄 정도의 양이다.
일식집에서 사이드로 시키는 우동과 비슷한 가격이라 치면 대충 삼사천 원 정도. 그럼 철전 하나에 얼추 천 원이다.
‘철전 백 개가 있어야 은전 하나, 은전 백 개가 있으면 금전이 넷…….’
젓가락으로 그릇을 휘휘 젓다가 이를 내려놓은 예결이 심각한 얼굴로 삼랑에게 말했다.
“어쩌지? 우리 돈이 너무 많은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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