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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23화 (23/203)

23화. 사천당가 (2)

“으음, 돈이 많으면 좋은 거 아닌가요?”

삼랑이 특유의 긴장감 없는 어투로 물었다.

“좋기야 하지.”

예결은 하나도 안 좋다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는 중원 물가에 어두웠다. 전생의 예결은 태어날 때부터 고아였다. 기억이라는 게 날 무렵부터는 항주의 사파가 관리하는 거지 패에 소속돼서 구걸하러 다녔다. 철전 한 푼 손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상납금이라는 명목으로 빼앗겼고 쓰레기를 간신히 면한 남은 음식을 먹으며 살았다. 머리가 굵어지기 전이라 동냥한 돈을 빼돌려야 한다는 생각도 못 했다.

손에 쥔 돈도 없는데 어디 뭘 사보기나 했겠는가. 단내가 풀풀 나는 당과 가게 앞에서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다가 새끼 거지 때문에 장사가 안된다며 쫓겨나기 일쑤였다.

만약 그대로 나이를 먹었다면 소매치기가 되었을 거다. 다행스럽게도 예결은 배수 노릇을 하기 전에 곤륜에 들어가게 됐다.

그 후에는 돈 걱정을 할 일이 없었다. 구파일방 중 하나인 곤륜은 부유한 편이었다. 도복이 언제나 기본으로 지급되었으니 해진 옷을 기워서 입고 다닐 필요가 없었고 삼시세끼 굶을 일도 없었다.

구걸에 실패하면 굶거나 맞아야 했던 예전에 비하면 도원경이 따로 없었고 예결은 그 상황에 무척 만족했다.

가족이 있는 곤륜의 제자는 종종 용돈을 모아서 외출할 때 쓰곤 했다. 그러나 고아인 예결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었다.

‘가족이 챙겨주지 않으면 사부님이 챙겨주기도 한다지만…….’

백양진인은 재능도 변변찮은 제자에게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환생한 후에는 대사형한테 몸을 완전히 의탁해 버렸으니.’

의원이 왕진하는 데 쓰는 돈, 저를 살리는 데 들어갔을 약값이 얼마나 들었는지 완전히 깜깜했다. 먹는 거 입는 거 하나 허투루 챙겨주지 않았으니 식생활비도 적잖이 들었을 터다.

그때는 그냥 갚을 빚이 늘어나면 대사형에게 질척하게 얽힐 생각이 만만이었다.

“그런데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단주라니, 그건 좀 곤란하잖아?”

예결이 냉소적인 투로 중얼거렸다. 진영이 보여주는 장부를 보면서도 상단의 규모나 재정 상태까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금이니 은이니 적혀 있어도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근데 철전 서너 개면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니.

“상단이 제법 크지?”

예결이 건들거리는 투로 물었다. 흡사 뒷골목에서 수금하는 깡패 같았다.

“규모가 좀 있죠.”

삼랑은 부정하지 않았다.

“혹시 상단이 너무 잘나가면 문제가 되나요?”

달성하려 노력할 필요도 없이 이미 목표를 이뤘으면 좋은 일 아닌가?

삼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목표물이 혼자 자빠져 죽어주면 좋을 거 같은데.’

그럼 수면 시간이 좀 늘어나지 않겠는가.

“그럴 리가.”

예결은 빙그레 웃고는 전투적으로 젓가락을 움직였다.

돈이 많고, 상단의 규모가 크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결은 슬슬 의아해졌다.

대사형의 정체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건 이제 확신하고 있었다. 백양진인의 반응을 미루어 보아 파문당한 이유도 마냥 단순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예결은 제하량이 어디의 누구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건 자신을 대하는 대사형의 태도다.

여러 겹으로 감춰진 진실에 다가갈수록, 제하량이 자신에게 무얼 원하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안 되니까, 몸으로 때우자.’

결론을 내린 그는 소면 그릇을 들고 국물까지 먹어 치웠다. 젓가락을 탁 내려놓자 죽엽청을 즐기고 있던 삼랑의 눈이 동그래졌다.

“벌써 다 드셨어요?”

“응.”

야무지게 식사를 마친 예결은 씩씩하게 답했다. 진영의 뇌를 통째로 갈아 마신다고 해서 갑자기 행정 능력이 생기지도 않을 텐데 끙끙거려 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일단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자신이 제일 잘하는 걸 하면 된다.

장원으로 돌아온 예결은 열심히 피해 다니던 진삼과 마주쳤다. 아까와는 다른 점이 있다면 예결이 웃는 낯으로 그를 맞이했다는 점이다.

“저녁을 드시고 오셨다니, 아쉽습니다.”

“뭘요. 제가 성도를 둘러보고 싶다고 하니 호위가 안내해 주었을 뿐입니다.”

“이런, 문 공자님께서 초행길이시니 제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예결의 태도 변화를 어찌 받아들인 건지 진 행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예결은 그의 자질구레한 수다를 귀찮은 기색 없이 받아줬다.

삼랑은 그의 뒤에서 조용히 호위인 척 따르며 예결의 태도 변화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 문 공자님도 겪어보셔서 아시겠지만, 당가가 호위 비용 문제에 강경하게 나와서 큰일입니다.”

진 행수는 예결이 드디어 마음을 열어 주었다고 생각했는지 심각한 낯으로 걱정을 털어놓았다.

“저희 상단이 이처럼 쉽게 사천 성도를 드나들 수 있는 건 당가의 비호 덕분인데, 저들의 제안을 계속 거절한다면 앞으로 번거로워질 겁니다.”

다 죽어가는 소리를 하는 진 행수의 말은 예결이 듣기에도 퍽 그럴듯했다. 현대처럼 연락 수단이 잘 정비되어 있지 않은 시대다.

먼 곳에 있는 황제보다 가까이 있는 주먹이 더 두려운 게 사람의 마음이니 성도에서 당가의 세력은 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녹림은 또 어떻고요. 놈들이 저희 상단이 귀한 물건을 취급하는 걸 알면서도 설설 피해 다니는 건 사천당가의 녹색 깃발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녹림은 중원 각지의 산에 흩어져 이른바 ‘영업’을 하는 산적들의 연합이다. 이렇게 말하면 녹림의 규모가 상당하고 힘도 셀 거 같지만 녹림십팔채라고 불릴 정도로 강한 열여덟 개의 산채 외에는 다들 고만고만한 오합지졸의 모임이다.

사천 근방의 산채 중에서는 오대세가 중 하나인 사천당가와 척지면서까지 약탈을 감행하려 드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러다가 당가와의 거래가 파투 나고 다른 표국을 고용하게 되면 산적과의 마찰이 불가피합니다. 자칫 정면충돌이라도 일어나면 서역에서 들여오는 값비싼 세공품이 망가질 겁니다.”

진삼의 우는 소리에 예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소면 한 그릇에 철전이 세 갠데, 호위 비용을 금전 단위로 올려달라는 게 말이 되나?”

“예?”

순간 예결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진 행수가 반문했다. 반쯤은 혼잣말이었기에 예결을 혀를 찬 뒤 자신이 한 생각을 차근히 늘어놨다.

“늘 해오던 일이잖아. 세상에 도둑놈이 많으니까 내는 돈이잖아. 훔치는 놈이 없어도 맨날 돈은 똑같이 내는데, 훔치는 놈이 좀 늘어났다고 대뜸 올려받는 건 너무하잖아. 심지어 이 호위 건을 맡아주는 대신 청해상단이 당가에 납품하는 물건은 좀 저렴하게 넘기고 있던데, 안 그런가?”

말하다 보니 정말 사천당가가 도둑놈으로 업종을 전환한 게 아닌가 싶었다.

진삼은 예결이 생각보다 사천당가와의 거래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서 놀란 눈치였다.

“예. 아무래도 당가에 넘기는 건 좀 더 값싸게 넘기는 편이긴 하지요.”

“혼자만 손해 보기 싫은 티를 내는데, 어떻게 믿고 계속 거래를 하겠어. 최소한의 반대급부라도 들고 오든가, 이건 뭐.”

예결은 툴툴거렸다. 이 상단이 오롯이 제 거였다면 좀 더 관대한 마음이 됐을지도 모르겠는데, 무려 대사형이 저를 믿고 맡겨준 상단 아닌가.

“문 공자님의 의견을 참고하여 최대한 절충안을 끌어내 보겠습니다.”

진 행수가 진지한 낯으로 약속했다. 아직 상단주 자리에 정식으로 오르지도 않았는데 예결의 말을 거의 머리에 이고 다닐 작정인 것처럼 보였다.

상단치고는 참 충성도가 높다고 생각하며 예결은 덧붙였다.

“어디까지나 내 사견이니까 자네는 자네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하도록 해. 내일도 참관할 생각이니 오늘처럼 내가 상사라는 티는 너무 내지 말고.”

“말씀 깊이 새기고 현명히 처신하겠습니다.”

진삼 행수는 사람 좋게 웃으며 본인의 방으로 돌아갔다.

삼랑은 진삼과 대화를 마친 예결을 의외라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은근히 고압적이고 냉랭하다. 아랫사람 부리는 것에 익숙지는 않지만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남을 관찰하는 게 습관인 삼랑에게도 예결은 영 아리송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진영이 수상쩍다고 생각하는 거지만.’

아직 예결이 제3의 세력과 접촉하는 걸 보지 못했다.

유일하게 발견한 특이점이라면 상단의 업무를 보는 중에 종이에 뭔가 독특한 문양을 그리는 거였다. 그냥 낙서였는지 위에 새까맣게 먹칠을 했기 때문에 뒤늦게 그게 뭔지 알아보기란 요원했다.

‘아무튼 비밀 참 많은 분이라니까.’

공교롭게도 예결이 제하량에게 품은 생각과 그리 다르지 않은 평가였다.

“대사형 보고 싶다.”

“전서응을 날릴까요?”

“당장 와주실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애먼 새 괴롭혀서 뭐 해. 얼른 사천당가랑 협상 끝내고 청해로 돌아가면 그만이지.”

삼랑이 묘하게 웃었다.

“만약 협상이 길어지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그거야 뭐……. 다른 표국이나 알아볼까.”

청해상단을 중원삼대상단의 반열에 올리겠다던 원대한 포부를 밝힐 때는 언제고 설렁설렁 일을 해치우려는 눈치다.

“뭐 해? 얼른 가서 괜찮은 표국 알아봐야지.”

“고작 하루 지났는데 벌써 말입니까?”

“아직 엉덩이에 불이 안 떨어진 거 같으니 내가 붙여주려고.”

예결이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알아보면서 좀 투덜거려도 돼. 모시는 공자가 어려서 완전 제멋대로라고 욕해도 봐줄게.”

삼랑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아아. 관대하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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