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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24화 (24/203)

24화. 사천당가 (3)

예결이 부탁한 대로 삼랑은 사천의 표국 몇 군데를 알아왔다. 그 와중에 예결의 험담도 적당히 퍼트려 놨는지 일꾼들의 시선이 영 곱지 않았다.

철모르는 어린아이 보듯 얕잡아보는 게 반, 한심하게 여기는 게 또 반.

상단주라는 신분까진 모를 테지만 결정권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높은 위치라는 건 대충 퍼져 있었다. 진삼에게도 안 붙은 개인 호위가 따라다니니 내부인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던 것이다.

한데 그렇게 귀하신 분이 거래가 얼마나 잘 되고 안 되고에 관심이 영 없고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이유로 섣불리 다른 표국을 알아보고 다닌다.

상단 사정에 따라 일자리가 있다가도 없어지는 일꾼으로서는 예결이 영 밉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당가에서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심부름꾼 소년이 나타나 알리자 진삼이 어슬렁어슬렁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어제와 꼭 같은 방에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예결은 심드렁한 낯으로 앉아 붓을 손에 쥐었다.

진삼과 당서악의 실랑이가 재개되었다.

“여전히 비용을 더 올려 받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다른 문파와 달리 당가는 독이며 암기가 소모품인지라 충돌이 잦아질수록 손실도 커집니다.”

“아이고, 당 대협. 기존의 호위 비용은 이미 해당 사안을 고려하여 책정되지 않았습니까?”

“요새 독물의 가격이 심상치 않습니다. 천년뇌각망이 나타난 일 때문에 다들 좀 영험하다 싶은 동물을 사재기하고 있으니까요.”

‘긁지 않은 복권 같은 건가?’

예결은 손목을 긁는 척 옷소매 속에 숨겨진 뱀뱀이의 머리를 간질여 주었다. 촉촉한 콧잔등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촉이 퍽 사랑스러웠다.

필요해서 데려오긴 했는데,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퍽 정이 갔다. 괜히 영물이 아닌지 똑똑하기도 엄청나게 똑똑했다.

“그래도 호위 비용이 이렇게 올라가면 저희는 손해가 더 큽니다.”

“위에서 내려온 명을 방계에 지나지 않는 제가 어찌 뒤집을 수 있겠습니까?”

당서악이 우는소리를 하자 진삼이 조심스럽게 준비해온 것을 꺼내 들었다.

“그래도 제가 당 대협의 체면을 고려하여 어제보다 나은 절충안을 준비해 봤습니다. 이걸 한번 봐 주시겠습니까?”

“음…… 진 행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사락사락 종이 넘기는 소리며 대화가 이어졌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당서악이 의미심장하게 예결 쪽을 힐끗하더니 물었다.

“말씀하시지요.”

“저희가 호위하는 상행에 문제가 생기면 지불하기로 한 위약금을 올리지요.”

어쩔 수 없이 그쪽의 사정을 봐준다는 듯, 시혜적인 태도가 묻어나는 발언이었다. 동시에 예결이 드리운 낚싯대에 입질이 온 것이기도 했다.

‘이것 봐라?’

예결은 붓을 놀리는 척 고개를 숙인 채로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애타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냉큼 미끼를 물 줄은 몰랐다.

“음…….”

행수가 고쳐 앉았다. 예결에게는 시선 한 자락 주지 않았으나 마음이 기운 티가 여실히 드러났다.

[엎을까요?]

삼랑이 조용히 전음을 보냈다. 혹시 이 계약을 멈춰야 하냐는 질문이었다.

‘확실히 눈치가 빨라.’

잘한 건 삼랑임에도 대사형의 안목만 극찬한 예결은 붓을 움직여 가만히 있으라는 의사를 전했다.

결국 예결의 코앞에서 계약서에 도장이 찍혔다.

당가의 호위 비용을 더 치르는 대신, 상행을 안전히 지키지 못할 경우 소실된 물건의 위약금을 두 배 이상으로 물어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당가에게만 이득이 되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여우가 떼를 지어 몰려다녀도 범을 당해내지 못하듯, 다른 곳도 아닌 사천에서 당가의 행사를 방해할 세력은 없었기 때문이다.

자리가 파하느라 소란스러운 중, 당서악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진삼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예결에게 말을 걸었다.

“당 대협께서 저희를 만찬에 초대한다고 하시는군요. 문 공자도 함께 가시지요.”

“만찬?”

“예. 사천의 삼대기루로 꼽히는 오향루에 귀빈실을 예약해 두셨다고 합니다.”

자기가 초대하는 것도 아니면서 진삼의 어깨가 퍽 으쓱해 보였다.

“당가의 손님 대접은 후하니 분명 문 공자도 좋아하실 겁니다.”

기루는 무슨 놈의 기루.

하자 많은 에스퍼로 태어나 완벽한 가이드를 만났다면 순결한 몸이라도 바쳐야 할 거 아닌가.

이능력의 부작용을 잊으려고 더 큰 자극을 찾아다니던 문란한 선배 에스퍼들의 말로를 뼈와 살에 새겨온 예결은 그 말만으로도 질색했다.

이를 티 내지 않기 위해 일단 그는 점잖은 투로 거절의 말을 꺼냈다.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아서 못 갈 것 같은데. 아쉽지만 초대에 응할 기력이 없어. 진 행수가 대신 다녀오도록 해.”

“저런, 푹 쉬십시오.”

진삼은 아쉬운 양 입맛을 다시며 물러갔다.

예결은 부르르 떨었다. 제하량이 저 반만 질척거렸어도 완전 감사합니다! 하고 먹어 치웠겠지만 진 행수에겐 관심 비슷한 것도 없었다.

방에서 나서서 단둘이 되자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삼랑이 물었다.

“언제부터 의심하신 건가요?”

어젯밤 갑자기 진삼에게 친근한 척 말을 걸던 예결의 행동이며 방금 계약서를 쓰기까지 진삼과 당서악의 대화 내용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깨달은 눈치였다.

예결은 차분한 투로 답했다.

“첫날.”

“첫날이요?”

삼랑은 놀라워하는 낯으로 예결을 바라봤다.

“알고 보니 상단주님이 타고난 상재가 있으셨던 건가?”

예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 여기 도착한 날 진 행수가 당서악이 누군지 알면서도 책임자를 물었잖아.”

“맞아요. 그랬죠.”

분명 진삼은 여기 책임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진삼이라는 자가 사천을 담당한 게 몇 년인데, 당가 쪽 책임자를 못 알아보는 건 너무 속 보였지.”

진 행수는 청해상단에서도 사천 거래를 담당하는 사람이다. 일부러 경험 많은 이의 상행을 선택해서 따라온 예결은 이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서악은 그가 이 무리를 이끌고 있다는 티가 났다. 당가 무인의 시선은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마다 당서악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하필 걔가 돈 더 달라는 소리를 하네?”

예결은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중원에 와서 한 번도 안 잘랐는데 길이가 변하지 않은 게 새삼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꽁지에 불 좀 붙여봤지.”

화르르, 하고 불붙이는 소리를 흉내 내며 예결은 입꼬리를 쓱 끌어 올렸다. 모르는 이가 보면 그냥 천진해 보이는 미소일 테지만 귀에 들리는 어조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등골이 오싹오싹해지는 감각에 삼랑은 즐거워졌다.

‘아, 이거 알면 진영이 기절하겠네…….’

일단 주군이 주워온 게 가녀린 새가 아닌 건 확실했다.

“그랬더니 사천당가에서 어마 뜨거라 하면서 위약금 내자는 조건을 가지고 왔네?”

성도에 들어서자마자 청해상단이 어디에서 뭘 하는지 알고 달려온 당가다. 새 표국을 알아봤다는 것도 그들의 귀에 들어가리라고 이미 짐작했다.

일부러 삼랑을 통해 철부지 같다는 소문까지 퍼트렸다.

계산적인 사람은 이성적으로 판단할 테지만 그냥 집에 가고 싶다는 애새끼는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전자는 계산에 넣고 움직일 수 있어도 후자는 그냥 변수다.

“내가 그냥 병풍처럼 세워놓은 신입이 아니라는 걸 안다는 소린데, 삼랑도 알듯이 이 상행에서 내가 누군지 아는 건 딱 셋이잖아.”

예결은 손가락을 하나씩 펼치면서 입을 벙긋거렸다.

문예결, 삼랑, 그리고 행수 진삼.

딱 그렇게 셋이다.

“과연 당서악이 누구 엉덩이를 걷어차면서 얼른 계약서 쓰자고 했을까? 이불 덮고 잘 자던 나? 아니면 바로 옆에서 호위 서던 삼랑?”

예결은 이마를 딱 때리며 신음했다.

“아, 맞다. 뱀뱀이를 빼먹었네. 우리 뱀뱀이도 내가 청해상단주인 거 아는데. 얘가 몰래 나가서 꼬리에 먹물 묻혀서 ‘범인은…….’ 이렇게 쓰면 당서악이 알고 사천당가가 알고 온 성도가 다 알았을 텐데.”

진심인 양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얼굴이 참으로 천연덕스러웠다.

“진삼이 사천 쪽 상행을 오래 담당해 왔으니 당가와 유착 관계가 되어도 이상하진 않지요.”

기루 운운하는 걸 보니 진 행수는 당서악의 초대에 익숙한 눈치였다. 그러니 당가가 손님을 후하게 대접한다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이리라.

“대사형 다니는 길에 돌부리가 나와 있어서 좀 치워보려고 했더니 왜 바윗덩어리가 따라 나오지…….”

예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제 어떻게 하나요?”

“대사형 보여드릴 증거 찾아야지.”

“문 공자의 계획을 듣고 싶어요.”

그 말에 예결은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머리가 나쁘니까 몸으로 때울래.”

진심이었다.

“무공도 안 익히신 연약한 분이 어떻게 몸으로 때우실 생각입니까?”

삼랑이 그녀답지 않게 걱정이 담긴 어조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하량의 수하 삼인방 중 예결을 환자로 만난 건 삼랑뿐이었다.

“음, 맞아. 내가 연약하지. 그럼 어쩔 수 없네.”

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일단 여기에서는 무공도 안 익힌 연약하기 그지없는 에스퍼 아닌가? 함부로 나섰다가는 대사형의 귀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삼랑은 어서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라는 듯 어깨를 넓게 폈다. 주군이 예결의 수족이 되라고 명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녀가 활약할 기회였다.

그러나 예결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옷소매를 걷었다. 얌전히 금빛 찬란한 팔찌 노릇을 하던 천년뇌각망, 뱀뱀이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라, 뱀뱀이. 너로 정했다!”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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