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사천당가 (5)
“벌써 돌아가신다니요.”
진 행수는 숙취로 댕댕 울리는 머리를 붙잡은 채로 마중 나왔다. 예결은 말에 올라탄 채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사천에 볼거리가 많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여긴 너무 덥고 어딜 가나 코가 매워서 안 되겠어. 계약 체결되는 것도 봤으니 내가 가도 상관없잖아?”
처음 방문하는 이들은 더러 사천 공기를 매캐하게 느끼기도 했다. 원체 향신료도 팍팍 쓰는 데다가 다른 지방에서 찾아보기 힘든 식물도 여럿 자라기 때문이다.
사천에 도착하는 날부터 예결이 덥다고 투덜거렸던 걸 기억하는 진 행수의 낯이 조금 누그러졌다.
‘벌써 안심하면 안 될 텐데.’
“그래도 문 공자님을 이렇게 혼자 보내기엔 제 마음이 무겁습니다. 상단의 무인이라도 데리고 가시지요.”
“내 호위는 여기 있는 삼랑 한 명으로 충분해.”
나란히 말에 올라탄 삼랑이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호위 대상보다 맥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진삼은 삼랑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자인지 알았다. 청해에서 사천으로 넘어올 적, 야음을 틈타 나타난 맹수의 목을 벼 추수하듯 날려버리지 않았던가.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결국 진 행수는 물러났다. 이미 짐도 다 챙겨서 말에 올랐기 때문에 그가 계속 잡는다고 해서 여기에 남을 것 같지도 않았다. 예결의 말마따나 계약도 다 끝났고 더 볼 것도 없으니 그가 떠나는 게 마냥 이상하진 않았다.
‘이거 원, 변덕스러운 상사를 모시게 되겠어.’
청해상단의 예전 주인은 대리인만 내세운 채 모습을 비추는 법이 없었다. 한데 돌연 상단주가 바뀐다는 소식과 함께 나타난 것이 홍안의 미소년이었으니, 진삼은 참으로 황당했다. 청해상단이 어떤 곳인데 저런 어린 청년이 주인으로 나선단 말인가?
하필 자신이 사천에 갈 때 일을 배울 목적으로 따라온다는 말에 내심 긴장하기도 했었다. 혹시 당가와 자신이 나눈 계약을 알아차리고 따라온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린 공자를 겪으면 겪을수록 그가 딱 보이는 대로의 젊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곱게 자랐는지 세상 물정도 모르고 경험이 적어 속여넘기기도 쉽다.
‘당서악의 접대까지 받게 해야 했는데.’
아쉽긴 해도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다시 뵐 때까지 몸 건강히 지내세요.”
예결은 산뜻한 덕담을 건넨 채 삼랑과 단둘이, 아니 뱀뱀이랑 셋이 장원을 떠났다.
“당가에서 돈은 돈대로 받아먹었지만 그래도 날 걱정하는 건 또 진심 같네.”
성문을 벗어나 산길로 들어선 예결이 꺼낸 말에 삼랑이 웃었다.
본디 곤륜의 제자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과감한 결정을 내려놓고 이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 또 순진하게 느껴진다.
“뇌물 받아먹는 인간들이 전부 천하에 둘도 없는 쓰레기라고 생각하신다면 오산이랍니다. 대체로 평범한 사람들이에요.”
예결은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능력도 평범하고 소신도 평범하고 줏대도 평범하고……. 그러니까 소소한 유혹에 흔들리는 겁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예결의 귀에 숲속에 숨어 있는 이들의 숨소리가 들렸다.
예결은 고삐를 당겼다.
“이쯤 되면 나타날 때가 됐는데.”
삼랑이 샐쭉 웃었다.
“이런.”
호위 대상이 알아채기 전에 먼저 처리할 작정이었다. 적이 암기의 사정거리 내로 들어오길 기다렸던 삼랑은 말에 박차를 가하며 나무 틈으로 쇄도했다.
“뭐야?”
“마, 막아!”
삼랑은 적에게 반격할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애초에 몸을 던진 것 자체가 시선을 자신에게만 집중시키기 위함이었다. 검을 쓸 것처럼 손을 움직였으면서 어느새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나타난 장침이 허공을 갈라 산적의 마혈에 꽂혔다.
저를 향해 날아오는 도끼를 유연하게 피한 그녀는 상대의 무릎을 걷어찼다. 날렵하고 가벼워 보이는 몸놀림이었으나 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묵직했다.
모든 공격을 간발의 차로 피해내는 삼랑은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삼랑을 마주하는 이들은 그녀가 진심으로 즐겁다는 양 웃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잘못 건드렸다!’
나무의 틈으로 삼랑의 그림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질 때마다 녹림도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예결은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느긋하게 말을 몰아 그 앞에 섰다. 말에서 내려오니 숲속에서 얼굴만 멀쩡한 사내가 비틀비틀 걸어 나와 예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살려, 사, 살려줘…….”
“마지막.”
다시 모습을 드러낸 삼랑이 그의 등을 걷어찼다. 바닥에 엎어진 이의 머리 위에 발을 올린 그녀는 상쾌하다는 얼굴이었다.
피 묻은 손이 옷에 닿기도 전에 해결해준 삼랑에게 고개를 까딱여 감사를 전한 예결은 산적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여기 산채의 채주 되는 사람인가?”
“……예, 예! 관에서 오셨습니까? 아니면 무림의 협객?”
남자는 손을 싹싹 비볐다.
“다시는 지나가는 무고한 양민을 습격하지 않겠습니다. 손을 씻고 평범한 농사꾼으로 돌아갈 테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평소 연습이라도 하는지 참으로 심금을 울리는 읍소였다. 성악에 재능이 있어 보였다.
“손 씻으면 곤란한데.”
“예?”
“초면이지만 일단 사업 이야기를 해보려고 왔거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예결은 그가 알아들을 수 있게끔 아주 또박또박 말해줬다.
“내가 여기 접수하러 왔다고.”
***
“음. 그래서, 이게 철질려라고?”
“예. 여기에 독을 발라서 길에 깔아 놓으면 지나가는 사람이나 말이 밟고 콱-”
채주의 설명이 제법 쫄깃쫄깃했다. 성악가의 재능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홈쇼핑 쇼호스트를 해도 될 인재였다.
“콱 뭐? 죽는다고? 이거 아주 나쁜 놈이네.”
예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난하자 한껏 과장해서 도적질용 소품을 소개하던 채주가 자리에서 펄쩍 뛰더니 두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뇨. 그런 즉효성 독은 아주 비쌉니다. 평범한 마비 독입니다. 일다경 정도 몸이 굳는 게 전부입죠. 니예.”
일다경이면 십오 분이다. 그 정도면 산적들이 행인을 제압하기 충분한 시간이다.
“그래서 정말 사람은 한 명도 안 죽였다?”
채주는 뻘뻘 흐르는 식은땀을 닦을 겨를조차 없이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그러믄요. 그러믄요. 사천에는 당가부터 시작해서 아미파와 청성파도 있으니 함부로 유혈사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무림 문파 근처에 잦은 소요가 발생하면 제자가 파견된다. 주변의 치안을 관리해서 인망을 사는 겸 젊은 세대의 경험치를 채워주는 토벌 이벤트 취급당하는 거다.
“좋아. 이번 한탕 마치면 목숨만은 살려줄 테니 잘 협력하도록 해.”
고분고분 머리를 숙이며 채주는 눈물을 삼켰다.
손바닥에 굳은살 하나 없이 말랑말랑한 게, 척 보기에도 곱게 자란 도련님이다. 납치해서 몸값 받기 딱 좋다고 견적을 냈는데, 저 뒤에 버티고 선 호위가 보통 무시무시한 게 아니었다.
“저희가 무슨 일을 해 드리면 될깝쇼?”
“별로 힘든 건 아니야. 평소 잘하던 일을 하면 돼.”
“잘하던 일이라면…… 산적질 말씀입니까?”
“맞아. 곧 이 길을 타고 상행이 지나갈 예정이거든. 사천당가가 호위하고 있긴 한데 녹림의 영웅들이라면 비벼볼 만하지. 안 그래?”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 말하는 예결의 말에 혹했던 채주는 사천당가라는 말에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사천 다, 다, 다, 당가의 무인이 호위하는 상행을 습격하라고요? 그것도 사상자 한 명 내지 말고?”
“응. 엄청 값비싼 서역의 물건을 옮긴다더라. 그거 뺏어서 팔면 팔자 펴는 거야.”
그리 말한 예결이 뒤를 향해 손짓했다. 삼랑은 눈치껏 앞으로 성큼 걸어 나왔다. 느슨하게 맨 검대에 손을 올리자 채주가 히이익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어깨를 움츠렸다.
‘저렇게 겁이 많아서 채주 노릇은 어떻게 했담?’
“나도 양심이 있으니까 여기 이 친구를 빌려줄게.”
삼랑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채주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사천당가란 말입니다. 그들은 독을 씁니다. 시체조차 안 남고 한 줌 독수에 녹아내릴지도 모른다고요!”
예결은 답하지 않은 채 웃었다. 그 미소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두 팔을 늘어뜨린 채주가 힘없는 투로 물었다.
“정말 해야 합니까?”
예결이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게 될 거야.”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린 그의 음성은 퍽 의미심장했다. 채주는 지나치게 겁에 질린 나머지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뒤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삼랑은 예결의 뒷모습에 흥미로운 시선을 던졌다.
“상행이 오기 전에 좀 쉬어볼까? 얘도 물 좀 챙겨주고. 여기 나 앉을 자리도 좀 마련해봐.”
예결은 본인이 타고 온 말고삐를 채주의 손에 넘겨준 뒤 녹림도 사이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정말…… 천연덕스럽기가 천하제일 고수 같군.’
아무리 삼랑에게 잔뜩 얻어맞고 겁을 집어먹은 오합지졸이라고 해도 적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짓이다.
그런데 예결에게서는 조금의 긴장이나 공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채주가 벌벌 떨고 있긴 했지만 나름 사파의 무인인데, 두렵지 않으십니까?”
그의 뒤에 조용히 따라붙은 삼랑은 슬쩍 예결을 떠봤다.
“대사형이 붙여준 삼랑이 있는데 뭐 하러? 기미가 수상하다 싶으면 내가 위험해질 겨를조차 없이 처리해줄 거잖아.”
이건 삼랑보다는 제하량에 대한 믿음에 가까웠다.
“호가호위 최고.”
예결의 말에 삼랑이 피식 웃었다.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지만……. 믿어 주신다니 기쁘군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상단주님의 애완동물도 믿겨 맡겨 주신다면 이 한 몸 바쳐-”
“아아. 갑자기 달걀이 먹고 싶네!”
예결은 못 들은 척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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