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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27화 (27/203)

27화. 사천당가 (6)

녹림의 산적들은 예결의 변덕스러운 명령에 혼비백산했다.

달걀 가져와라, 여긴 왜 앉는 자리가 이렇게 변변치 않냐. 무슨 채주 의자에 호피 하나 없느냐, 여기에 매복해라, 저기에 매복해라…….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 보니 왜 이 명령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싹 사라진 채 그저 몸만 움직이게 된다.

산적의 기운을 쏙 빼놓은 예결은 가도가 잘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가져다 놓은 의자에 몸을 편히 기댔다. 녹림의 채주라면 호랑이 가죽 정도는 둘러놓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없다며 사슴 가죽을 얹어주었다.

“오. 온다. 와.”

예결은 팝콘이 없다는 게 아쉬워졌다. 곧 영화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상행을 호위하는 사천당가의 무인 중 예결이 아는 얼굴은 없었다. 당서악은 말 그대로 책임자고 휘하의 무인이 파견되는 모양이었다.

선두에 선 이는 노련해 보이는 인상의 무인이었다. 그녀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멈추고는 뒤따르는 이들에게 명했다.

“정지. 앞에 장애물이 있다.”

쇼호스트, 아니 채주가 야심 차게 준비한 철질려 선물 세트는 간파당했다.

사천당가의 무인이 나서서 철로 된 지렛대 따위로 이를 걷어내는 모습에 예결은 김이 빠졌다.

“용케 너희들 밥 안 굶는구나. 아니, 살아 있는 것도 신기하다.”

“하하. 저희가 내빼는 재주는 있어서.”

“우리 삼랑한테 따라잡혀 놓고?”

“…….”

덩치 큰 중년 남자가 풀이 죽는 건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예결은 그의 등을 쿡 찔렀다.

“뭐 해? 안 나가보고. 어서 손님맞이 해야지?”

산들바람처럼 상냥했으나 결국 협박이다. 채주는 울며 겨자 먹기로 허리에서 박도를 뽑아 들고 외쳤다.

“가자! 얘들아!”

“와아아아!”

그가 앞장서서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가자 산적들이 그 뒤를 따랐다. 예결은 그 흙먼지 사이로 슬쩍 합류했다.

“녹림인가.”

“그렇다!”

채주가 우렁차게 외쳤다.

‘잘 골랐네.’

그냥 가장 가까운 산채 아무거나 하나 잡아서 쓸 생각이었던 예결은 잘 얻어걸린 느낌에 뿌듯해졌다.

“우리가 이 길을 관리하고 있단 말이지! 그러니, 돌아가 주시면 안…… 될까, 요?”

“뭐?”

협박을 하든가 아니면 애초에 나서지 말고 물러나든가.

사천당가의 무인을 지휘하던 당언보는 누굴 놀리나 하는 얼굴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전음을 쓸 정도로 내공이 심후하지 않은 채주는 입만 뻐끔거렸다.

‘제발!’

그 입술을 읽은 당언보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퍽!

날계란이 날아와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깨진 껍질 사이로 흘러내린 노른자가 무인의 이마를 적셨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감각이 그렇게 모욕적일 수가 없었다.

‘아뿔싸!’

채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쩐지, 난색을 표하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 공자가 실실대며 웃었더랬다.

인제 와 자신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어디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정파 무인에게 있어서 녹림도 목숨은 파리만도 못했다. 사정 설명을 듣기는커녕 머리와 몸통을 분리해놓을 테지.

그럴 바에야 예의 공자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눈을 뜬 채주의 눈동자에서는 초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예결을 만났으니 혼이 쏙 빠질 수밖에.

“물건을 다 내놓고 꺼지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속이야 어떻든, 그는 아랫배에 힘을 준 채 있는 힘껏 외쳤다. 여전히 그는 저 당가 무인의 앞으로 달려가 발등에 입을 맞추고 살려달라고 빌고 싶었다.

그러나 터진 계란 노른자가 당언보의 이마를 타고 주룩 흘러내리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선명했다…….

이건 돌이킬 수 없다.

이를 으득 간 당언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전원, 전투 준비.”

서슬 퍼런 암기가 녹림 측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삼랑은 그중 치명적인 것을 유연하게 쳐내며 저쪽의 움직임을 견제했다.

‘역시.’

예결은 차가운 눈으로 전장을 바라봤다.

독보다는 암기 위주의 공격이 날아오고 있었다.

이미 예결이 짐작한 바이기도 했다. 여기는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다. 파티원이라도 같은 편의 눈먼 검에 맞아 죽을 수 있다. 특히 넓게 퍼지는 독은 아군도 중독시킬 수 있다.

그러니 당가가 제아무리 독한 독을 가지고 있더라도 용독술은 자제할 수밖에 없다. 일행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청해상단의 인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예결은 치명적인 순간에 정전기를 일으켜 무인이 무기를 놓치게 했다. 여기까진 자신이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미약한 뇌전을 흘려보낼 때 생기는 자성을 이용해서 암기의 각도를 틀어버리는 건 예결이라도 집중해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 그는 이 판을 일종의 실험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만큼의 힘을 사용할 수 있을지, 또 얼마나 은밀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

소규모 전투인데다가 삼랑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감시의 시선이 없다시피 하다. 이런 기회가 어디 자주 오겠는가.

‘생각보다 할 만해.’

청해를 떠나기 전 하량과 딱 붙어 다닌 덕분이다. 그러니 이런 묘기를 시도해볼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더불어, 천년뇌각망 뱀뱀이에게 제힘을 가득 덜어준 것이 능력을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언제나 찰랑찰랑 넘치고 있던 물을 바닥에서부터 채우면서 자그마한 양의 힘을 활용하는 것에 보다 능숙해진 거다.

‘정전기…… 생각보다 괜찮은 거 같아.’

승부는 찰나에 갈린다. 무림인이 손에서 무기를 놓치게 된다면 그는 걸어 다니는 시체나 마찬가지다.

예결은 너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쓰며 흐름을 지켜봤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 역시 삼랑이었다. 녹림의 옷을 입고 그들 사이로 스며든 삼랑은 위기에 처한 산적을 위험한 경로에서 슬쩍 밀어냈다. 사천당가 무인의 발목을 착실하게 잡는 신법이 신묘하기 그지없었다. 암기가 다 떨어지면 적의 품에 들어 있는 무기도 천연덕스럽게 강탈해서 사용하는 삼랑은 도발에도 능해 보였다.

언제나 소리 없이 나타나고 소리 없이 사라지는 삼랑은 살수 계열의 무공을 익힌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전면전에서 사천당가의 무인을 가지고 노는 걸 보면 보통 비범한 게 아니었다.

‘역시 너무 강하다니까.’

삼랑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움직였다. 예결의 은밀한 원조가 있었기에 그녀는 수월하게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 더불어, 산적들이 악착같이 당가 무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 것도 한몫했다.

대기 중일 때 만약 패배해서 당가에 끌려가면 평생 독의 실험체로 사용될지도 모른다고 겁준 것이 저들의 의욕에 불을 지른 게 아닐까 싶었다.

“제길! 고작 산적 따위가!”

당언보가 이를 악문 채 외쳤지만 삼랑의 보법에 농락당해 암기를 전부 소진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마침내 승리한 산적들은 당언보를 포함해 사천당가의 인물을 전원 제압해서 묶어놓았다.

그러곤 사천당가의 인물을 전부 매달아 놓고 상단의 인물도 꼼꼼히 묶어 빠져나오기 힘든 구덩이에 집어넣었다. 치명상을 입은 자는 없으니 적당한 때에 구조될 수 있게끔 손을 쓰면 죽는 이도 나오지 않으리라.

“모두 옮겨라! 조심해서!”

채주가 명령했다. 삼랑이 전음으로 놈을 조종하고 있는 눈치였다.

청해상단의 물건을 가지고 산채로 돌아온 채주는 예결을 만난 이래 가장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하! 우린 부자입니다! 부자!”

“우리?”

예결이 생글생글 웃으며 묻자 채주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 물론 그 대협이 부자인 거지요.”

“농담이었어. 수고비는 쳐 줘야지.”

주인인 예결이 직접 턴 거긴 했지만 그래도 청해상단의 물건을 도적질해 놓고 너무 신나 보이는 채주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었을 뿐이다.

삼랑의 눈이 여우처럼 가늘어진 걸 보니 그녀도 이를 짐작한 기색이었다.

‘대사형 귀에만 안 들어가면 되지. 뭐.’

예결은 마차에 쟁자수까지 동원해서 옮겨야 했던 짐 쪽으로 턱짓했다.

“들고 따라 나와.”

“예?”

“돈 받아 가려면 팔아야 할 거 아니야.”

채주는 허둥지둥 짐을 부려놓는 수하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이를 다시 마차에 올렸다.

“어디에서 팔 작정이신가요?”

어느새 다가온 삼랑의 질문에 예결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답했다.

“그건 삼랑이 안내해 줘야지. 사천에서 가장 큰 암시장이 어디야?”

“암시장이요? 그것도 제일 큰?”

드물게 당황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장물이잖아. 이거 팔아넘겨야지. 위약금은 위약금대로 챙기고 이렇게 비자금을 마련해야 상단 재정에 도움이 되지 않겠어?”

“오…….”

삼랑의 음성에 감탄이 서려 있었다.

“안내해 드리죠.”

“일단 쟤들부터 먼저 보내놔.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삼랑은 표표히 움직였다. 채주와 다정하게 어깨동무한 그녀가 몇 마디를 속삭이자 산적 두목은 수하들을 데리고 후다닥 산을 벗어났다.

“쟤들 감시하러 안 가?”

“잘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예결은 픽 웃었다.

뭐, 어차피 자신이 할 일은 숨길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대사형의 수하가 있는 곳에서 노골적으로 보여줘도 상관없으리라.

왼손을 들어 앞으로 내밀자 흘러내린 옷소매 아래로 뱀뱀이가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삼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예결을 바라봤다.

“잘 부탁해.”

예결이 소곤거렸다. 천년뇌각망의 몸을 타고 푸르스름한 뇌전이 타탓, 하고 튀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전류는 점점 더 덩치를 불려갔다.

“상단주님!”

삼랑이 경악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가 마주한 예결의 두 눈은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금빛으로 맹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예결으로부터 벼락이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연달아 허공을 가로지른 번개에 나무로 된 산채의 건물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번진 화마는 온 건물을 집어삼켰다.

무림에 온 이래 이렇게 힘을 끌어다 쓰는 건 두 번째다.

“자알 탄다.”

예결은 경박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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