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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28화 (28/203)

28화. 사천당가 (7)

말 그대로 경천동지할 일을 저질러 놓고도 그는 불장난을 한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예결은 입맛을 다셨다.

삐죽빼죽한 흥분이 머리끝까지 솟아올라 잘 가라앉지 않는다. 힘을 쓴 직후에는 그 전능감에 취하게 된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짜릿한 고양감, 그리고 이 힘에 몸을 맡기고 싶다는 충동이 맞물려 그를 부추겼다. 하지만 예결은 천천히 손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숨을 고르니 주변의 공기가 한결 따갑게 느껴졌다. 세상이 그에게 부딪혀오는 소음도 한결 커졌다. 숲을 헤집고 내달리는 바람 소리가 예결의 귀를 따갑게 찔러댄다. 하량의 가이딩 덕에 잠잠하던 에스퍼의 천형(天刑)이 돌아오고 있었다.

‘대사형 보고 싶다.’

고작 이 정도로 폭주하진 않는다. 하량의 너른 가슴에 안긴 채 한숨 푹 자면 피로가 싹 풀리겠다는 생각이 좀 커질 뿐이다.

한편 삼랑의 낯은 예결을 만난 이래 가장 굳어 있었다.

천년뇌각망이 뇌전을 다루는 영물이라는 건 알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힘이라니……!

산채에 불을 지르는 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만한 넓이의 건물을 전부 태우려면 꼼꼼히 기름을 칠하고 불씨를 옮겨주어야 한다. 게다가 불길이 커지기까지 드는 시간은 또 어떻고?

‘천년뇌각망이 아니라 천년뇌각룡 아닌가?’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분명 상단주님의 눈이 황금색이었는데…….”

“황금색?”

예결로서는 금시초문이다. 봉인 때문에 힘을 써본 건 무림에 넘어오기 직전이었고 매번 제 얼굴을 비춰볼 만한 곳도 없었다.

‘강한 속성을 가진 에스퍼는 종종 눈 색이 변하기도 한다더니…….’

“번갯불이 눈에 반사돼서 그렇게 보였나?”

삼랑은 덩달아 고개를 갸우뚱하는 예결의 모습에 맥이 풀렸다. 너무도 한순간에 지나간 일인 데다 온 사방에 벼락이 가득했었다.

사람이 직접 뇌전의 힘을 다루는 건 삼랑이 가진 상식선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물며 벼락이 쏟아지기 전, 천년뇌각망이 고개를 쑥 내밀고 무언갈 하지 않았던가.

석연치 않음을 고이 갈무리하며 삼랑이 혀를 내둘렀다.

“……번개를 부리는 영물을 길들이다니, 정말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해치우셨군요.”

이래서 연출은 중요하다.

예결은 일부러 거창하게 뱀뱀이를 불러제낀 스스로의 선택을 자화자찬했다. 조금 낯 뜨거운 짓이긴 했지만, 수치심보다는 목숨이 더 소중했다. 예결의 목표는 사마외도로 낙인찍혀 죽을 때까지 쫓겨 다니는 삶이 아니라 제하량과 단둘이 오붓한 노후를 즐기는 거였다.

‘뭐, 뱀뱀이도 끼워줄까…….’

눈을 도르륵 굴리며 계산을 마친 예결은 어깨를 으쓱한 뒤 덧붙였다.

“강호의 역사가 짧지 않으니 누군가는 나보다 좋은 친구를 만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디 무림인이라는 족속이 자신이 만난 기연을 주절주절 떠들고 다니던가?”

삼랑은 이제 완전히 수긍한 기색이었다.

“산채는 당가의 추적을 피우려고 태우신 겁니까?”

“걔들이 위약금 물어주기 싫으면 뭔들 못해. 이렇게 산채랑 같이 보물도 타버렸다. 그러니까 애초에 빼앗긴 당가 잘못이다. 하고 못을 박아야지.”

예결이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산적 놈들이 돌아갈 곳을 없애야지.”

어디 증거만 없앤다고 완전범죄인가? 증인도 없애야 한다.

“암시장 갈 때까지 짐꾼으로 잘 부려 먹고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는 걸 알면 이쪽에게 책임져 달라고 하겠지. 그럼 어디 잘 숨겨놨다가 나중에 비슷한 일 있으면 부려 먹자고.”

삼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당가에서 추적할 이들 스무 명을 동시에 숨겨놓고 먹을 것 입을 것 챙겨줄 여력이 될까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픽 웃는 사내의 시선이 예리했다.

“우리 돈 많던데, 내 말이 틀려?”

“물론, 가능하지요.”

삼랑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떠보는 건 또 귀신같이 알고 으르렁거린다.

“무엇보다, 내가 쟤들을 살려 보낸 건데 다시 산적 노릇을 한다고 민간인을 해치거나 당가에서 놈들을 막 고문해서 죽여버리면 잠자리가 나쁠 거 같아.”

악몽 좀 꾼다고 해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이가 뻔뻔하게 말했다.

“평생직장 정도는 보장해 줘야지. 안 그래?”

삼랑은 영원히 예결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녹림도가 안쓰러워졌다.

‘하필 상단주님이 지나가는 길에 터를 잡아가지고…….’

“하면 분부대로 수행하겠습니다.”

양심이 없기에 안타까움도 훌훌 털어버린 삼랑이 경쾌하게 말했다. 평범한 애 보기를 예상하고 이 임무를 맡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은 삼랑의 짐작보다 훨씬 흥미롭고 즐거웠다.

꽁무니에 그을음을 붙인 두 사람은 표표히 산채에서 벗어났다.

사천당가에서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산채까지 추적해왔을 때, 그들을 반기는 것은 타다 남은 건물의 뼈대와 잿더미뿐이었다.

***

“암시장은 처음이야.”

어두운 곳에서 둘레둘레 돌아다니는 밝은 갈색 머리꼭지는 눈에 띄었다. 이를 가만 바라보던 삼랑은 고민에 잠겼다.

아무리 봐도 긴장감 없는 뜨내기다. 벗겨 먹기 딱 좋아 보였다. 게다가 생긴 것도 반반하니 뜯어먹을 거 다 뜯어먹으면 납치해서 팔아먹으려 드는 이도 더러 있으리라.

‘뭐, 납치범이 불쌍하지.’

예결의 손목에 매달린 영물을 떠올린 삼랑은 걱정을 깔끔하게 덜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호위 임무가 아니라 휴가나 다름없었다.

“흑점은 중원에서 가장 큰 규모의 암시장입니다. 사천에만 있는 게 아니라 중경, 호북, 하남, 강서, 안휘 등 각지에서 번갈아 가며 열리지요. 흑점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있어서 사람들은 대륙을 가로질러서라도 찾아오곤 합니다.”

삼랑의 설명에 예결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전생에는 중원의 이런 면까지 탐구해본 적이 없기에 퍽 흥미로웠다.

만약 곤륜파에 입문하지 못했다면 예결은 이런 쪽으로 흘러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제대로 된 복지 정책도 부족하고, 황제의 시선은 중원 구석구석까지 닿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시민 단체가 있기를 해, 아니면 열악한 아동 학대 및 노동의 현장을 공론화할 언론이 있기를 해?’

이 시대엔 태어난 자리가 곧 죽는 자리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다들 강호에 몸을 투신하여 풍운의 꿈을 꾸는 것이다.

흑점의 깊숙한 곳에 접어들수록 복도를 따라 붉은 등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사향 비슷한 내음이 풍기고 오가는 사람들의 면면이 범상치 않다.

삼랑은 그 등에 새겨진 문양을 보며 길을 찾더니 예결을 어느 방 안으로 안내했다.

“여기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흑점의 관리자를 불러오겠습니다. 잠시 혼자 계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여차하면 뱀뱀이가 있으니까.”

예결의 말에 삼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실 그녀가 걱정하는 건 바로 그 뱀뱀이였다.

“흑점에서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분명 후회하게 될 테니까요.”

삼랑의 말은 더없이 의미심장했다.

“알았어. 이런 덴 아주 무서운 사람이 운영한다는 사실 정도는 머리에 넣어놨다고.”

“……그렇죠. 흑점의 주인은 아주 무서운 사람이죠.”

침착하게 맞장구를 친 그녀는 방문을 열다가 멈칫 돌아섰다.

“하지만 이상한 놈이 있으면…… 알죠?”

예결은 그녀에게 왼손을 살랑살랑 흔들어줬다. 산채에서 신나게 번개쇼를 펼칠 때 주연 배우로 활약한 뱀뱀이는 얌전히 손목을 휘감고 있었다.

삼랑은 가벼운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손님만이 드나들 수 있는 층인지 주변은 고요한 축에 들었다. 먼 데서 아련한 비파 소리가 들렸다. 예결은 언젠가 들어본 가락이라 생각하며 눈을 감고 흥얼거렸다.

마냥 그 노래가 좋아서는 아니었다.

가끔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그들의 호흡과 말소리 따위가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소음이라 하기엔 아직 약했으나 좀 쉬어보려는 예결의 신경줄을 갉작갉작 긁어댔다. 이를 노랫소리로 뭉개려는 거였다.

그러나 짧은 평화는 오래지 않아 끝났다.

“……아.”

무시해볼까, 하고 고민하는 손등을 뱀뱀이가 촉촉한 코로 꾹 눌렀다. 눈꺼풀을 들어 올린 예결은 한숨을 쉬었다.

“어딜 가나 진상이 있네.”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전부터 누군가가 씩씩거리며 복도를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지나는 문마다 열어젖히며 누군가를 불러댔다.

예결이 머무르는 방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흑두는 어디 있나! 감히 이 거악왕산에게 사기를 치고 흑점으로 도망치다니!”

힘세고 목소리가 크고 무식한 인간이라는 완벽한 삼박자를 갖춘 이였다.

“여기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나가세요.”

예결의 목소리에는 부쩍 기운이 없었다. 유약해 보이는 어린 청년의 모습에 거악왕산이라 자칭한 자가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건 이 왕 모가 직접 확인해 봐야 할 일이지. 가만, 설마 너 흑두가 데리고 다닌다는 미동이냐?”

문짝을 뜯어내다시피 한 장한의 폭거에 예결의 입술이 씰룩였다.

‘태워버릴까.’

충동이 예결의 속을 지글지글 끓였다. 에스퍼로 각성하면서부터 그의 기저에 똬리를 틀고 있던 감각이다. 뭐라 반응하기 전 상대가 예결의 손목을 덥석 낚아챘다.

“네놈을 데려가 내 흑두를 끌어낼 미끼로 써야겠다!”

‘망할 무림인!’

신법을 익힐 수 없어 무림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는 점을 좀 보완해야 할 텐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좁은 복도, 자신을 거칠게 이끄는 손에 아주 오래전의 무력감이 돌아와 그의 머릿속을 주물러댔다.

“손대지 마!”

예결은 발작하듯 상대를 쳐냈다. 그러나 외공을 위주로 익힌 놈인지 어지간한 힘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뱀뱀이를 불러내려고 한 순간,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엉망이군.”

거의 동시에, 무언가가 날아와 거악왕산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예결을 붙잡고 있던 이의 몸이 반쯤 날아가며 벽에 처박혀 쓰러졌다.

어느새 복도는 고요에 잠겨 있었다.

숨을 쉬는 법조차 잊은 채 고개를 들어 올린 예결은 그 끝자락을 응시했다. 왜소한 체격의 사내가 언제부터인가 붉은 등의 시작점에 서 있었다.

반쯤은 어둠에, 남은 반은 요요한 불빛에 파묻힌 이는 무척 작아 보임에도 동시에 형용할 수 없이 거대한 존재로 보였다. 예결은 그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입 안을 바싹 마르게 하는 긴장감은 상대가 더 없는 강자임을 알려주었다.

낯선 얼굴에 낯선 체격이다. 심지어 목소리마저 낯설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어서 정리해라.”

나직한 명령에 그의 뒤에 도열해 있던 흑점의 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쓰러진 거악왕산을 끌어냈다.

‘세상에.’

예결은 흐물흐물 풀어지려는 입매를 애써 단속했다. 홀린 듯 그 사내에게로 향하려는 시선을 거두며 그는 벽을 짚은 채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방에 돌아가려는 척 걸음을 옮겼다. 위태롭긴 해도 꿋꿋한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쓰이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예결은 도착할 장소를 코앞에 두고 부러 발을 헛디뎠다.

“아!”

휘청이며 무너지려는 몸을 어느새 다가온 사내의 손이 단단히 지탱하고 있었다.

예결은 기다렸다는 듯 익숙한 품에 몸을 기댔다. 오싹한 감각이 그의 머리를 들쑤시며 등골을 짜릿하게 훑고 내려왔다.

입술을 달싹이자 애써 가장하지 않아도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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