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흑귀 (1)
애처로움과 의문, 그리고 더없는 확신이 맞물려 자아낸 음성은 절박하기 그지없었다.
예결의 부름에 제하량은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 자연스러운 표정과 미간의 주름을 보고 있노라면 진짜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사형, 아니에요?”
혼란스러워하는 얼굴로 애절하게 되묻자 낯선 차림을 한 대사형은 예결을 단호하게 밀어냈다.
“사람을 잘못 봤다.”
예결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냉혹하면서도 무감했다.
문득 예결은 심각해졌다.
‘매정한 대사형도 좋은데……?’
이마저도 즐겁다니, 미친 게 틀림없다. 하지만 예결에게도 나름 논리적인 이유는 있었다.
우선, 제하량이 자신에게 그토록 상냥하게 굴어도 아무나 쉽게 쉽게 받아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게다가 평소의 대사형에게서는 볼 수 없는 냉정한 면모를 관찰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인피면구에 가려진 그의 맨얼굴은 어떨까? 당황했을까?’
막연한 상상이 다디달았다.
상대가 대사형임을 알아챈 건 예결 본인도 의외였다.
어떻게? 하고 자문해봐야 답 같은 건 몰랐다. 그저, 가이드를 알아보는 에스퍼의 본능이 제법 편리하다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축골공을 써도, 인피면구를 뒤집어써도 제하량을 알아볼 수 있다는 소리니까.
“아이고, 공자님!”
때마침 달려온 삼랑이 예결과 제하량을 갈라놨다.
순간 예결의 눈에서 삐죽 불꽃이 튈 뻔했으나 그는 이를 얌전히 갈무리한 채 삼랑의 어깨 너머로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이분은 흑점의 사천 분타주이십니다. 제가 찾으러 간 참이었는데 여기 계셨을 줄이야.”
붙임성 좋게 앞으로 나서는 삼랑의 태도는 그녀가 그저 위험한 사람으로부터 예결을 보호하려는 것만 같았다.
만약 제하량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예결은 상대가 모르는 사람, 그것도 아주 위험한 인물이라고 받아들였으리라.
“이쪽은 제가 새로 모시게 된 공자님입니다. 좋은 거래처를 소개해 달라는 말에 모셔 왔지요.”
삼랑은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웬 미친놈이 예결을 습격한 것만 해도 간 떨어질 노릇인데 이제 그걸 주군이 알아버렸다.
“거래하러 온 손님이었군.”
인피면구를 뒤집어쓴 제하량은 한결 더 정중해진 투로 입을 열었다. 귀찮은 손님에서 상대의 가치를 재는 듯한 태도다.
“마땅히 알려줄 이름은 없으니 그저 흑귀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말투도 한순간에 변했다. 이게 저 ‘흑귀’가 손님을 취급하는 방식인 모양이다.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길 자처하는 제 가이드 앞에서 예결은 입술을 몇 번 벙긋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착각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분과 너무 비슷해서.”
‘대체 어디가?’
예결의 말에 삼랑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생김새야 말할 것도 없고 축골공을 사용해 체구도 훨씬 왜소한 데다가 목소리까지 거칠게 쉬어 있다. 십 리 밖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봐도 사파의 거두였다.
다정이 뚝뚝 떨어지던 시선이나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손길마저 사라진 주군의 무엇을 보고 정체를 알아봤단 말인가?
‘진영이 경계하던 이유를 알 거 같군.’
느슨하던 삼랑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어떤 거래를 하러 오셨습니까?”
“흑점에서 무엇을 다루는지부터 여쭙고 싶은데요.”
상대의 질문에 예결은 또박또박한 투로 답했다.
제하량에게 어리광을 잔뜩 부렸다면 흑귀에게는 자신의 유능함을 어필할 기회 아니겠는가. 보듬어주어야 할 어린 사제로만 남는 건 사양이었다.
“먼저, 흑점에서는 정보를 다룹니다.”
“삼랑.”
예결은 돌아보지 않은 채 삼랑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손에 묵직한 주머니가 올라왔다.
망설임 없이 상대에게 전낭을 내밀자 흑귀는 무게를 가늠해 보더니 답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흑점의 분타주라는 신분으로 가장하고 있기 때문일까, 하량은 평소보다 걸음을 재게 놀렸다. 경박하다기보다는 무언가를 경계하는 듯 곤두서 있는 몸짓이 예결에겐 퍽 흥미롭게 다가왔다.
예결이 아는 원래의 제하량은 자기 자신을 숨겨야 할 이유 같은 건 모르는 사람이었다.
곤륜을 떠나 다른 이의 거죽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살아가게 된 이유가 자꾸만 궁금해졌다. 자신이 모르는 대사형의 과거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성큼성큼 나아간 그들의 정면에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투박한 검은색 광택이 흐르는 문이 퍽 신기했다. 문의 양옆에 서 있던 두 명의 문지기가 용이 검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새겨진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철문이 입을 벌렸다. 예결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말거나 하량은 성큼성큼 그 너머로 걸어 들어갔다.
“호위는 두고 오셔야 합니다.”
예결이 뒤를 쫓으려 하자 흑귀의 음성이 그를 멈춰 세웠다.
고개를 돌린 예결은 삼랑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신은 흑귀가 대사형이라는 걸 모르는 상태여야 했으므로 대신 삼랑에게 뱀뱀이가 들어 있는 옷소매를 슬쩍 흔들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삼랑은 그제야 안심한 척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예결은 심호흡하고 안에 들어섰다. 마치 박물관에 현장학습을 간 날처럼 뺨에 서늘한 공기가 와 닿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등 뒤로 육중한 문이 닫혔다.
어둑한 방 안을 밝히는 것은 몇 안 되는 촛불과 그 빛을 반사해내는 금붙이의 존재였다. 그저 뺨에 와 닿는 빛만으로도 이곳에 값진 물건들이 가득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청해 상단만 해도 예상 못 한 규모였는데 이젠 흑점까지…….’
갈수록 오리무중에 휩싸이는 대사형의 정체에 예결은 흥미로워졌다.
“앉으십시오.”
하량이 자리를 권하자 예결은 망설임 없이 교의에 착석했다.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이 안의 공기는 밖보다 더 차가웠다.
“내부를 둘러보면 알 수 있겠지만 흑점에서는 온갖 것을 다룹니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죽간본이 예결의 앞에 펼쳐졌다.
금은보화에서부터 시작해서 이국의 향신료, 오래된 고서, 명필의 서간집, 장인의 손이 닿은 기물, 영약과 오래전에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비급…….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역시 사람이지요.”
차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죽간본을 덮은 사내의 목소리가 슬쩍 낮아졌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는 거군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 상대가 누군지는 별로 중요치 않으니까요.”
말하자면 흑점은 신뢰를 담보로 장사를 하는 셈이다.
“잘됐네요. 그런 곳을 알아보고 있었어요.”
예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서역에서 들여온 값진 물건을 흑점을 통해 유통하고자 합니다.”
대담한 제안에 분타주를 가장한 대사형이 몸을 슬쩍 뒤로 뺐다.
“서역의 물건이라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살 사람들이 넘쳐나지 않습니까? 그쪽과 선을 댈 수완이 있으면서 부득이 흑점을 찾으신 이유를 모르겠군요.”
사제가 무얼 하고 다니다가 암시장까지 손을 대게 된 건지 궁금해할 법도 한데 하량은 시침을 뚝 뗐다. 예결은 그런 대사형을 보면 볼수록 입꼬리가 허물어지려 했다.
“장물이거든요.”
어깨를 으쓱한 예결은 상대의 반응을 집요하게 살폈다.
원래대로라면 제하량에게 이실직고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제하량이 아니라 흑귀 아닌가.
대사형은 정체를 숨기는 한 예결에게 왜 그랬느냐 직접적으로 추궁하지 못할 거다. 동시에 그가 왜 이런 일을 저지른 건지 궁금해하겠지.
“장물의 경우 일반 거래보다 수수료가 추가될 겁니다.”
무려 오대세가 중 한 곳이 거론되었음에도 흑귀 노릇을 하는 하량의 말투는 심드렁했다.
“사천당가가 눈에 불을 켜고 찾을 겁니다.”
예결이 슬쩍 떠보듯 건넨 말에 제하량은 흑귀의 인피면구를 구기지조차 않은 채 덤덤한 투로 답했다.
“수수료를 더 받아야겠군요.”
어느새 주판을 꺼내 튕기는 모습이 그야말로 돈 귀신처럼 보였다. 인피면구를 뒤집어쓴 상태긴 하지만 평소의 하량에게서 볼 수 없는 색다른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래서 다들 애인의 직장에 찾아가고 싶어 하는 걸까?
“그리고, 사람을 숨겨놓을 만한 적당한 장원도 필요합니다.”
예결은 슬쩍 새로운 패를 꺼내 놓았다. 원래는 삼랑이 알아서 해주기로 되어 있었지만 계속 평이한 반응을 보이는 대사형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몇 명이나 됩니까?”
대사형의 태도는 여전히 침착했다.
“스무 명 정도입니다.”
“마땅한 곳을 선별한 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 이야기가 마무리되자마자 예결은 후, 하고 심호흡한 뒤 고개를 숙였다. 몇 번 어깨를 들썩이다가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렸다.
건너편에 앉은 흑귀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예결의 눈에는 그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간 게 보였다.
“저기, 괜찮으면 잠시만.”
우물쭈물 망설이던 예결이 두 손을 내밀었다. 흑귀를 가장한 제하량은 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무엇입니까?”
저 냉혹하고 무감한 시선에 예결의 등허리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역시 에스퍼는 자신의 가이드를 만나면 변태가 되는 게 틀림없다.
“흑귀 님을 만나기 전에 당했던 일 때문에 조금 불안해서요.”
음험한 상상을 숨기기 위해 살짝 눈을 내리깐 예결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혹시 잠깐만 손을 잡고 있어도……. 그래도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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