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흑귀 (2)
“동행하신 분이 여기가 어떤 장소인지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은 모양입니다.”
차가운 대꾸였다. 쇠를 긁는 듯 탁한 음성도 이렇게 들으니 제법 적응이 되는 게 신기했다.
예결은 움츠러들지 않으려 애쓰는 척 입을 열었다.
“위험한 곳이라는 말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삼랑은 대사형이 제게 직접 붙여준 사람입니다. 그런 이가 저를 흑귀 님과 단둘이 남겨 두었으니 당신은 ‘안전한’ 사람이겠지요.”
그렇죠? 하고 제법 발칙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제하량은 헛웃음을 삼켰다.
“상호 협력 관계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호위의 판단력을 너무 신뢰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녀가 당신을 홀로 남겨놓은 까닭에 봉변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대사형은 제법 위협적인 투로 으르렁거렸다. 화가 난 거 같진 않지만, 자신에게 경고를 새겨주려는 것만큼은 똑똑히 느껴졌다.
“하지만.”
예결은 살짝 입술을 달싹여 놓고는 뜸을 들이다가 속삭이듯 덧붙였다.
“흑귀 님이 도와주셨잖아요.”
‘어때 대사형? 미치고 팔짝 뛰겠지?’
예결은 눈을 내리깐 채 상대의 반응을 기다렸다.
아무나 믿는 사제를 보고 속을 까맣게 태웠으면 좋겠다. 타인의 모습을 한 자신을 알아본 사제 때문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면 그것도 좋다. 모르는 이에게 매달리는 모습에 질투라도 해준다면 온종일 제하량을 업고 다닐 거다.
“흑점은 무엇이든 다룬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막연한 상상을 키워나가다 보니 애가 달았다. 매달리듯 꺼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이맛살을 찌푸린 흑귀가 답했다.
“흑점이 온갖 것을 다룬다지만 제 손까지 내드리진 않습니다.”
“역시 기분 나쁘시겠지요.”
“……하지만 공자님께서 겪으신 일에는 저희 측의 실수도 있으니 적당히 어울려 드리지요.”
그래도 수수료는 받을 거라며 덧붙였다.
돈 귀신이라는 설정에 충실한 제하량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대사형은 그게 안도해서라고 생각했는지 별로 의심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감사합니다…….”
예결은 투박하게 변한 제하량의 손을 꼭 잡았다. 흉터가 뒤얽힌 손등은 징그러울 법도 했으나 예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조금 불안정하던 호흡이 가지런하게 변하자 흑귀의 낯을 한 제하량이 툭 내뱉었다.
“좀 더 의지가 되는 사람을 찾는 게 좋을 텐데요.”
“……대사형은 여기 없으니까요.”
예결은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매번 도와달라고 매달리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질리게 될 거예요.”
어느 정도는 경험담이었다.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매달리는 건 괜찮습니까?”
어떤 수를 썼는지 몰라도 낯설게만 들리는 목소리가 더없이 차가웠다.
“수수료 받으신다면서요.”
예결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한동안 흑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맞닿은 손에서 느껴지는 가이딩 에너지가 일렁이고 있었다.
이 불안정한 파장은 대사형이 적잖이 동요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노련한 가이드라면 등급과 무관하게 본인의 파장을 조절할 줄 안다. 그러나 가이딩의 개념 자체가 없는 제하량은 예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제하량은 고등급 가이드이기까지 하니 그의 파장은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내 무엇이 그를 건드렸을까.’
“……아까 공자님이 만난 무뢰한은 다시는 흑점 밖을 나서지 못할 겁니다.”
“그럼 안심이네요.”
어쩔 도리 없이 상냥한 대사형이라고 생각하며 예결은 쓴웃음을 지었다.
“혹 거악왕산과 안면이 있으신 겁니까?”
“아니요.”
예결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흑귀의 시선이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지나치게 겁에 질리신 것 같군요.”
“흑귀 님은 정말 무서운 분이시네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자 상대의 눈이 가늘어졌다.
“흑점에서 무얼 다루는지 여쭤본 걸로 정보 값으로 전낭을 하나 가져가시더니, 정작 제 비밀은 맨입으로 알아내려 하시잖아요.”
에두른 거절이었다. 이를 빤히 알아들었을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제가 이리 손을 잡아드린 것 대신 공자님의 정보를 받기로 하지요.”
“그건 됐습니다. 모르는 사내가 손 한번 잡아보자고 하면 흠씬 두들겨 내쫓을 법도 한데 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셨으니까요. 대신…….”
예결은 슬쩍 말꼬리를 흐렸다. 눈치를 살피는 기색에 흑귀는 말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삼랑과 안면이 있으니 어쩌면 당신은 제 대사형을 아실 수도 있겠지요?”
“글쎄요.”
흑귀의 답은 모호했다.
“행여라도 후일 대사형이 제 비밀을 묻거들랑 함구해 주세요. 오늘 있었던 일도. 이것만 약속해주신다면 말씀드릴게요.”
대사형한테 비밀을 털어놓으면서 대사형에게만큼은 말하지 말아달라 하는 셈이다.
그 말뜻이 혼란스러운 탓인지 흑귀는 한 발짝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량한 사파 나부랭이의 말이 믿음직하긴 어려울 테지만, 여기에서 제가 들은 일이 다른 사람에게 새어나갈 일은 없을 겁니다. 내 약조하지요.”
“장사꾼의 신의는 황금만큼 무겁다지요.”
그들 사이 오고 갈 거래가 한둘이 아니니 그 돈을 믿어 보겠다는 뜻이었다.
예결은 슬쩍 시선을 흑귀의 얼굴 옆으로 빗긴 채 말했다.
“다른 사람이. 특히 저보다 덩치가 큰 남자가 저를 억압하거나 질질 끌고 다니는 걸 무서워합니다.”
입술을 살짝 축인 예결이 툭 덧붙였다.
“……나쁜 기억이 있어서요.”
다시 태어난 삶에서 만난 부모는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전생의 부모와 달리 그를 버리지도 않고 굶기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평범한 사람이라서, 아들이 특별하다는 걸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배우지도 않은 타국의 언어를 사용하고, 지도상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곤륜산을 거론하는 아들을 힘겹게 느꼈다.
그러다가 아들이 에스퍼로 각성하자 억누른 스트레스가 터져버린 거다.
에스퍼가 가이드를 제때 만나지 못하면 환청과 환각 등에 시달릴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부모님은 예결을 각성자 전문 특수 병원으로 보냈다.
따지자면 그들 나름대로 노력을 한 거였다. 일반 병원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에스퍼를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까지 알아보고 백방으로 뛰어서 ‘특수한’ 아들에게 걸맞은 ‘특수한’ 병원을 골라낸 거다.
그러나 그 병원은 겉보기만큼 멀쩡한 장소는 아니었다.
각성자 인권 조례가 발표된 후, 미성년 에스퍼를 상대로 하는 모든 연구는 금지되었다. 하지만 병원의 탈을 쓴 채 연구를 진행하는 단체가 몇 군데 암약하고 있었고, 하필 예결이 보내진 곳이 딱 그런 케이스였다.
봉인 상태라고는 하나 각성자를 데리고 불법 실험을 일삼는 이들은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예결이 만나는 연구자나 그들을 보조하는 사람들은 강압적이거나 폭력적인 편이었다.
“묶여 있거나, 끌려다니거나……. 아니면 모르는 약을. 음.”
다행히 한 간호사가 신고해준 덕에 예결은 구출되었다. 그 후부터는 에스퍼 센터에 정기적으로 드나들게 되었다.
부모님은 죄책감에 몇 주 동안 아들 면회를 올 때마다 눈물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미 삐걱거리던 가족은 밥풀로 붙여놓은 깨진 사기그릇처럼 엉망으로 변한 뒤였다.
만약 제대로 된 병원에 갔더라면 모든 게 괜찮아졌을지도 모르겠다.
“그 ‘대사형’이라는 자는, 그런 과거가 있다는 걸 모르고?”
확인하듯 질문을 던지는 쇠 긁는 음성에 예결은 어설프게 웃었다.
“계속 모르셔야지요. 비밀을 지켜 주시기로 했잖아요?”
흑귀는 느릿느릿 예결을 놓았다. 자칫 힘을 줄까 봐 손을 갈무리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 감질나는 가이딩에 예결은 애가 달았다. 돌아가면 사형의 등에 딱 매달려서 코알라가 될 거라 다짐하며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처음 중원에 돌아왔을 때만큼 짧다.
만약 자신을 지상에 묶어두는 가이드의, 제하량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예결은 이 모든 것이 한바탕 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주 어린 날부터 이어져 온, 부모조차 허상이라 말하며 그를 병원에 집어넣고 친구에게는 미치광이 취급당하던 바로 그 꿈.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흑점에서는 여러 품목을 다룹니다. 꼭 손에 잡히는 물건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정보를 다루듯이, 사람을 다루는 일에도 능하지요.”
복수를 제안하며 정보를 캐내려 하는 대사형의 깜찍한 행태에 예결은 애써 웃음을 참아야 했다.
아니 진짜, 지난 이십 년간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람이 이렇게 음험해졌담?
“생각해 볼게요.”
거절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선뜻 흑점을 믿고 맡기긴 어렵겠지요. 이해합니다.”
흑귀는 순순히 물러나는 듯했다.
“다만, 대사형이라는 분에게 끝까지 비밀로 남기고 싶다면 흑점을 통해 의뢰하시는 게 현명할 겁니다.”
예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시선을 피하며 흑귀에게 간신히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안은 기억해 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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