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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31화 (31/203)

31화. 흑귀 (3)

예결이 잠들어 있는 걸 확인한 삼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조용한 움직임에 예결의 팔 쪽에서 금빛 뱀이 고개를 슬쩍 내밀고 혀를 날름거리는 게 보였다.

방을 나서자 건장한 무인 둘이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이 복도를 따라 세워둔 호위는 그보다 더 많았다. 흑점에 온갖 보물이 모여 있다지만 지금 여기보다 더 경계가 삼엄한 곳은 없으리라 생각하며 삼랑은 걸음을 옮겼다.

몇 번 모퉁이를 돌자 삼랑이 걷던 길은 완만하게 기울어지는 경사로로 변했다. 어지간한 이의 감각에는 그 사실이 느껴지지도 않을 것이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든, 무언가를 노리고 잠입한 도둑이든 결국 개미굴 가장 깊숙한 곳에 갇히게 되는 구조였다.

하나 삼랑은 예외였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거짓 창이 붙어 있긴 했으나 빛 한 점 들지 않는 복도의 끝에 거대한 철문이 버티고 있었다.

삼랑은 제 앞에 놓인 문을 보고 심호흡했다. 팔을 뻗자 그 무게가 무색할 정도로 가볍게 열리는 문을 넘어 그녀는 성큼성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로 향하는 이 길의 끝에는 어둠을 두른 사내가 서 있었다.

“음.”

인기척에 몸을 돌린 흑귀가 천천히 삼랑을 향해 걸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왜소하던 어깨가 넓어지고 키가 훌쩍 커졌다. 앞으로 기울어 있던 등이 곧게 펴지는 것과 동시에 흑귀는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인피면구가 떨어져 나가며 반듯한 이마와 날카로운 코, 그리고 서늘하게 가라앉는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하량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왔군.”

삼랑은 그의 어깨 너머 자리 잡은 인영에 흘깃 시선을 주었다.

특유의 독특한 덩치가 아니라면 본디 거악왕산이었다는 걸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진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손만 멀쩡하군요.”

거악왕산이 이런 꼴이 되리라는 건 삼랑도 이미 짐작한 바였다. 하나 정작 예결을 쥐고 흔든 바로 그 손만 온전한 건 의외로 다가왔다.

“어떻게 할지 고민이 되더군.”

하량은 툭 내뱉으며 삼랑이 건넨 영견에 손을 닦았다.

“그래서 저자가 무얼 제일 고통스럽다고 여기는지 알아보다가……. 결국 손이 가장 마지막에 남았다.”

그 음성에는 즐거움이나 탐구심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매일같이 해온 일과를 다루듯 성실하고 무감할 따름이다.

“어찌 그 아이만 두고 나를 찾으러 온 것이더냐?”

“죄를 청하러 왔습니다.”

“애초에 결이를 혼자 둬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이더냐?”

“곤륜에서 문 공자님이 길들인 영물이 제법 유능하더군요. 상궤를 벗어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랑은 녹림도의 산채가 벼락을 맞고 타오르던 광경을 가감 없이 설명했다. 제하량의 시선이 깊어졌다.

“어린 뱀이 그 아이를 잘 따르긴 하더군. 홍여가 적뢰를 길들인 것도 드문 일로 알고 있건만, 사제에게 운이 따르는 모양이야.”

주군이 호통을 치거나 벌을 줄 기미가 느껴지지 않자 삼랑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흑점이 주군의 것이라곤 하나 제가 지나치게 방심하여 귀한 분을 상하게 했습니다. 부디 벌해 주십시오.”

매양 실실 웃고 다니던 얼굴에서 미소가 가신 삼랑의 얼굴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자삼랑.”

삼랑은 몸이 절로 굳는 걸 느꼈다. 주군의 입에서 그녀의 성이 나온 건 몇 년 만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문과 연을 끊고자 한 삼랑의 뜻을 존중해주던 제하량이 이리 나온다는 것은 경고였다.

“너는 본좌의 눈이고 손이며 발이다.”

질타가 아니라 묵직한 신뢰가 엎드린 그녀의 목 위로 떨어졌다. 언제나 여유롭던 삼랑의 손끝까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눈이 잘못 보았다고 파내지 않는다. 손이 잘못 선택했다고 잘라내지 않고, 발이 잘못 갔다고 꺾어버리지 않지.”

말만 들으면 진정 자상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삼랑은 차라리 채찍질을 당하는 것이 덜 두려울 거라 생각했다.

“네가 하는 잘못은 곧 본좌의 잘못이니, 내 어찌 너를 탓하겠느냐?”

손을 내밀어 삼랑을 일으킨 제하량이 말했다.

“본좌의 말을 이해했다면 다시는 그 아이를 눈에서 떼어놓지 말거라.”

삼랑은 얼어붙은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였다.

“……존명.”

***

흑점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청해로 돌아오는 길 내내 예결은 안달이 나 있었다. 삼랑이 예결은 강행군을 버티기엔 연약하다는 이유로 말을 천천히 움직였기 때문이다.

앞질러 간 대사형이 장원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안장에 올린 엉덩이가 저절로 들썩였다.

“대사형!”

장원의 대문 앞에 서성이는 하얀 옷차림의 사내가 보였다. 예결은 제하량을 목격하기가 무섭게 날듯이 말에서 뛰어내려 그에게로 달려갔다. 온몸을 내던지다시피 하량의 품에 덥석 안긴 예결은 저도 모르게 헤헤 웃어버렸다.

강아지처럼 뛰어와 폴짝 안긴 예결을 마주 안으려던 하량의 손길이 잠시 주춤했다. 이내 대사형은 예결의 어깨를 살짝 잡고 밀어냈다.

제하량의 가이딩에 호흡을 흠뻑 적시던 예결은 밀려난 충격에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손목부터 보자꾸나.”

짐짓 엄한 말투에 예결은 우물쭈물 두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원래대로라면 빠르게 나아서 흔적도 없을 테지만 그간 가이딩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별일 아닌데…….”

고개를 반쯤 돌린 예결은 삼랑에게 눈을 흘겼다.

물론 예결은 제하량과 흑귀가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이건 그저 고의성 다분한 퍼포먼스였다.

“그새 대사형에게 말씀드린 거야?”

추궁이 깃든 형형한 눈빛에 삼랑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주군이 직접 밝히지 않은 이상 자신이 나서서 흑귀가 제하량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설령 흑귀와 제하량이 별개의 인물이었대도 그녀는 주군의 수하지 문예결의 사람은 아니었다.

“결아.”

하량이 그를 나직하게 불렀다.

“무도한 자가 너를 건드렸는데 숨길 정도로 이 대사형이 미덥지 않더냐?”

“그…… 다 끝난 일이고, 제가 암시장에 가보고 싶다고 삼랑을 조르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잖아요. 천방지축 날뛴 게 부끄러워 숨기고 싶었어요.”

“손을 이리 주렴.”

예결은 결국 두 손을 내밀었다. 소매를 걷어 본 제하량은 다른 이의 흔적이 남은 그 살갗을 내려다봤다.

곤륜산의 눈에 벌겋게 익을 겨를조차 없었던 하얀 피부 위에 남겨진 시퍼런 멍은 그때 당시의 고통을 말해주는 듯했다.

하량의 속은 한없이 시끄러웠으나, 그의 시선은 한없이 고요했다.

그는 다른 사내가 남긴 자국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윽……!”

예결은 신음을 내뱉었다. 대사형이 무의식중에 힘을 준 탓이었다.

그러나 하량을 올려다보는 예결의 시선에는 한 점 원망조차 서리지 않았다.

“사형?”

“아.”

조금 느릿느릿하게 손을 거둔 하량이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도 자국만 요란하지, 부러지진 않은 것 같구나. 내게 좋은 약이 있으니 가져가렴.”

“직접 발라주시면 안 돼요?”

이런 기회는 또 놓칠 수 없어서 치대자 제하량이 아연하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불그스름하게 남은 손자국을 응시하는 하량의 눈이 가라앉았다.

무심코 고통을 준 것이 조금 전의 일이다. 그러나 예결은 그런 일 따위는 없었다는 듯 스스럼없이 다가와 제 팔을 내밀었다.

하량은 예결이 이토록 무방비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네. 사천까지 다녀왔으니까 대사형한테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드릴 선물도 있고……. 안 되나요?”

재잘재잘 이야기보따리를 꺼내놓고 아차 싶었는지 눈치를 살피자 하량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안 될 리가. 따라오렴.”

예결이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곁을 내준 하량은 삼랑에게 눈짓했다. 이번 사천행 후 평소보다 기합이 들어간 삼랑은 지체 없이 물러났다.

상행을 다녀오는 길에 먹은 매운 음식이며 처음 봤던 이색적인 식물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두 사람은 어느새 제하량의 거처에 당도해 있었다.

멀쩡한 교의를 놓아두고 대뜸 침상에 털썩 주저앉는 예결을 보고도 하량은 타박 한마디 하지 않았다.

잠시, 하고 자리를 비운 하량은 건넛방에 다녀오더니 하얗고 동그란 함을 들고 있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함의 뚜껑을 열자마자 나는 진한 약초 향에 예결은 코끝을 찡그렸다. 에스퍼라 예민해진 후각에 이런 강렬한 향은 불편하게 다가왔다.

“손을 이쪽으로.”

예결이 팔을 위로 들어 올렸다. 하량이 키가 큰 탓에 벌이라도 서는 모양새가 되었다. 혀를 찬 하량은 대뜸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 사형!”

옆자리에 하량이 앉아줄 거라 내심 기대했던 예결은 훌쩍 달라진 눈높이에 당황했다.

“얼른 끝내려면 가만히 있어야지.”

내내 기분이 저조해 보이던 하량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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