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흑귀 (4)
한편 예결은 그야말로 정신이 혼미했다.
센터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상종하지 말아야 할 에스퍼의 종류가 몇 가지 있다.
대표적으로 가이드 울려본 놈, 기절시킨 놈, 그리고 꿇려본 놈이다.
울려본 놈이나 기절시킨 놈은 그나마 밤일이라는 정상참작할 사유라도 있다. 하지만 꿇려본 놈? 이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튼튼한 에스퍼 몸에 멍 좀 생긴 게 뭐라고 자기 가이드의 무릎을 꿇게 한단 말인가?
“어, 얼른 끝내주세요.”
눈을 질끈 감고 손목을 내밀자 웃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많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구나.”
손목 위에 연고가 부드럽게 발리는 게 느껴졌다. 일부러 눈을 감은 탓에 하량이 부드럽게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는 감촉이 한결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손끝에서부터 옮아오는 가이딩도.
“세상 어느 사제가 제 사형을 무릎 꿇린단 말입니까?”
그럴듯한 연기를 해내겠다는 의지마저 사시나무처럼 파들파들 떨리는 중이었다. 외려 그 탓에 정말 긴장했다는 티가 났다.
“글쎄…….”
하량의 답이 모호했다. 중원이 넓으니 그런 일도 있을 법하지 않다던가, 같은 말을 덧붙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는 고요했다.
손목을 빙 둘러 연고를 바르는 데 열중하는 눈치였다.
“오른손.”
예결은 굼실굼실 다른 쪽 손을 내밀었다. 처음엔 제하량이 한쪽 무릎을 꿇은 것에 대경실색했는데,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에 사르르 녹아내리고 말았다.
아낌 받는다는 기분이 이런 걸까.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마.”
“대사형이 한 일도 아니잖아요.”
“글쎄. 호위가 부족했던 것일지도 모르지.”
농인가 싶어 바라보는데 제하량의 시선은 진지했다.
하량은 예결의 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이제 다 되었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내를 들킨 사람은 도망치기 마련이었다.
예결은 뒤돌아 걸음을 옮기려 하던 하량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 큰 덩치에 예결이 잡아끄는 대로 끌려온 하량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일부러 힘을 뺀 티가 났다. 자신이 버티다가 사제가 다치기라도 할까 매사에 조심하는 행동에 예결은 자신감이 뿌듯하게 차오르는 걸 느꼈다.
“쓰다듬어 주세요.”
금세 중심을 잡은 사내를 올려다보며 예결은 당당하게 요구했다.
돌아온 직후에 달려들면 한번 끌어안아 주기라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줄 법도 한데 제하량이 유난히 접촉을 피했다. 안아주지도 않고 연고를 바르자마자 손을 딱 떼버리는 것도 그렇고.
어쩌면 흑귀로서 얻은 정보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결도 훤칠한 편이었으나 하량은 그런 예결을 제 품속에 쏙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어깨도 넓고 가슴도 컸으니까.
“너는…….”
하량이 말꼬리를 잠시 흐리더니 연고가 담긴 통을 옆에 내려놓고 손을 뻗었다.
사락사락,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소리와 함께 달짝지근한 친애의 가이딩이 예결의 몸을 야금야금 잠식해 나갔다.
“음. 좋아…….”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싫게 느껴지던 약초 향이 달콤하게 비강을 훑었다.
에스퍼에게 가이드는 그런 존재였다. 외따로이 떨어진 방 안에 틀어박힌 이들을 위해 세상으로 난 창문 하나.
오로지 그 창을 통해서만 이 세상이 달고, 짜고, 떫고, 시고, 맵고, 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손이 많이 가는구나.”
“싫어요?”
물끄러미 시선을 던지는 예결의 옅은 갈색 눈에 어느새 불안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아니.”
하량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웃는 것 같진 않았다.
“마음에 드는구나.”
그는 무방비하기 그지없는 사제의 시선에 좀 더 과감하게 손을 뻗어 흘러내린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에 예결은 가만가만 눈을 감았다.
저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손길에 하량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니 예결은 구렁이 담 넘듯 자연스럽게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말갛고 무방비한 얼굴을 내려다보는 동안, 생소한 갈증이 하량의 목구멍을 두드렸다.
흑점에서 그를 찾아온 삼랑은 예결이 예민한 편이라고 보고했다. 잠자리도 가리고 먹는 것도 편식이 심한 데다가 옷도 쉽게 고르지 않는다고.
하지만 예결은 하량의 앞에서만큼은 그런 모습을 일절 보이지 않는다. 반짝이는 시선으로 이쪽을 보는 예결을 마주할 때면 곤혹스러우면서도 놀라웠다.
뱀이 파놓은 굴이 아늑한 둥지라고 착각하는 어린 새를 보는 기분이었다. 비를 피하러 와서 맹수를 만나놓고, 보드라운 깃털이 아니라 차가운 비늘을 가진 뱀을 어미로 착각하여 살을 바투 비벼오는 연약하고 순진한 것.
이곳은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입구로 밀어내도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예결은 정말로 제하량의 곁을 편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이번 상행에서 네가 데려온 영물이 대활약했다지?”
“네. 뱀뱀이가 많이 도와줬어요.”
저를 부르는 소리에 예결의 옷소매에서 황금빛 뱀이 비죽 머리를 들어 올렸다. 삼랑의 보고처럼 예결의 팔찌인 양 달라붙은 천년뇌각망은 제하량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몸을 움츠렸다.
영물답게 본능이 예리했다.
“좋은 친구를 얻은 모양이구나. 뱀뱀이에게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나 나나 삼랑에게 말하렴.”
뱀뱀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았는데도 장난스럽기보다는 단정하게만 들리는 말씨가 문득 설렜다.
“네.”
예결은 착한 아이처럼 고분고분 답했다.
재회 후 내외라도 하는 양 슬쩍 거리를 뒀던 제하량이 다시 저를 어루만지는 감각에 흠뻑 취해 노닥거리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다.
“사천 음식이 입에 안 맞지는 않았니?”
“향신료가 강해서 혀가 즐겁던데요.”
“그래?”
“곤륜에서는 항상 담백한 음식을 많이 먹었잖아요. 화식을 멀리하다 보니 불을 쓴 음식도 드물었고……. 그래서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는 재미가 있었어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일삼는 사제를 보며 하량은 여러 음식을 예결의 앞으로 밀어줬다.
개중에는 예결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게 뒤섞여 있었으나 그는 하량이 옮겨주는 족족 착실하게 받아먹었다. 후식까지 챙긴 뒤에야 하량은 예결을 풀어줬다.
배가 부르고 가이딩도 충만하니 이대로 잠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지금 자면 내일 아침에 일어날 테니 방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구나.”
“여기에서 자도 되는데.”
졸음기 가득한 음성에 하량이 슬금슬금 허물어지는 예결의 몸을 부드럽게 일으켜 세웠다.
“내 봐야 할 업무가 있어 곤히 잠든 너를 깨울지도 모른다.”
“대사형이 주무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언제 하품을 했냐는 양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자 하량이 예결의 이마 한가운데를 살살 문질렀다. 솔솔 흘러들어오는 가이딩에 예결은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이게 아니라!
“고된 여정을 막 마치고 돌아오지 않았니. 몸이 약하니 푹 쉬어야지.”
예결은 몇 번 입을 벙긋거리다가 포기했다.
무림인 보기에 단전 없는 일반인은 걸어 다니는 젓가락이나 다름없긴 하다. 하물며 그는 하량의 앞에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지 않았던가.
“일 다 마치면 대사형도 쉬실 거죠?”
“그럼.”
하량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계속 방에서 시간을 뭉갤수록 대사형의 휴식이 짧아질 거라는 생각에 예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래다주마.”
“어차피 장원 안인걸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예결은 씩씩하게 답했다.
가이드 무릎 꿇리는 에스퍼가 재활용 안 되는 쓰레기라면 제 욕심에 가이드 컨디션도 안 챙기는 에스퍼는 안 타는 쓰레기다.
에스퍼의 양심은 얄팍하기 그지없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쓰레기 이관왕을 달성할 순 없었다.
‘가장 좋은 것만 줘야지.’
뱀뱀이가 든 쪽의 옷소매를 만지작거린 예결은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진영과 마주쳤다. 그는 손에 죽간본을 잔뜩 들고 있었다.
저것만 두고 보면 제하량이 밤을 새워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다.
“그게 다 대사형이 처리할 일인가요?”
예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그런 편입니다.”
진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애저녁에 손을 댔어야 했는데 주군이 사제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다고 미뤄진 거였다.
“진영. 그렇게 말하면 사제가 걱정하지 않나. 대부분은 자네가 보고만 올리면 끝날 거라는 사실도 알려줘야지.”
“아. 문 공자님이 이런 일에 익숙지 않다는 걸 제가 깜박했습니다. 주군께서 말씀하신 대로 대부분 제가 말씀만 드리면 끝날 겁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처럼 그린 듯한 미소가 진영의 얼굴에 자리 잡았다.
흠잡을 곳 없이 단정하고 완벽하지만 매뉴얼을 그대로 읊는 영혼 없음이 느껴졌다.
‘밤을 새울 예정이군…….’
어쩐지 뭘 하든 오냐오냐 받아주던 대사형이 저를 쫓아내는 게 영 이상하다 싶었다.
내심 혀를 찬 예결은 제 속내를 감춘 채 제하량에게 손을 흔들었다.
“저는 가볼게요! 내일 봐요.”
밤을 지새울 거냐고 추궁해봤자 저 일감이 다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일단 후퇴할 수밖에.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예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얼른 돈 많이 벌어서 대사형을 은퇴시켜야겠다.’
무림의 그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한 업적을 목표 삼은 예결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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