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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34화 (34/203)

34화. 흑귀 (6)

「진삼 행수는 현재 총관 자리에 오른 것으로 확인됩니…….」

“어째 진 행수가 한동안 연락이 없더라니.”

읽고 있던 죽간을 내려놓은 당서악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앞에 선 당언보가 어깨를 움츠렸다.

평소 능수능란하게 제 감정을 갈무리하던 사촌 오라비의 낯이 어두웠다.

“내 청해상단과 오랜 시간 동안 거래를 이어오며 참 좋은 친우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눈높이가 달라졌다고 이 당 모를 외면할 줄이야.”

당언보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자리를 잡고 나면 다시 연락할 겁니다.”

“그럴까?”

기대 어린 시선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언보는 훨훨 날던 제 사촌 오라비가 만난 고난에 속이 쓰렸다.

사천당가는 직계와 방계의 구분이 엄했다. 당서악과 당언보는 모두 방계 출신으로, 당가타에서 나고 자랐다. 당가에 대한 충성심을 주입식으로 교육받고 세가의 일꾼으로 자라나지만 한평생 투자해도 직계의 수발을 드는 게 그들의 운명이다.

그런데 당서악은, 그녀의 사촌 오라비는 달라도 뭐가 달랐다. 언제나 쉼 없이 노력했으며 타고난 재능을 갈고닦아 직계에 비견할 정도의 무공 성취를 이뤘다. 그뿐이랴, 가문 안팎으로 평판도 좋았다.

직계의 자리를 넘보는 건 불가능할지라도 세가의 어르신들이 당서악을 눈여겨보고 있지 않던가.

그런데 청해상단과의 거래가 틀어지고 큰돈을 물어주게 되면서 그의 견고한 위치가 흔들리고 있었다.

고작 실수 한 번인데, 방계인 당서악에게는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더 제대로 보좌했어야 했는데.’

그간 제 오라비가 고작 행수 한 명의 비위를 맞추려 얼마나 열심이었던가?

입에 맞지 않는 술을 동이째로 마시고 새벽에 게워내러 간 적도 있다. 게다가 난잡한 짓을 즐기는 진 행수 때문에 기루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어야 했다.

그런 날이면 새벽같이 돌아온 당서악은 방에 틀어박혀 잘 나오지도 않았다. 그 대나무처럼 곧은 성정에 사촌 누이 보기 부끄럽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해서 얻은 청해상단과의 연줄이다.

‘진삼 놈, 이 일의 책임을 떠넘기고 잠적하다니 다시 보면 가만두지 않겠어.’

아니지, 아니다.

사실 당언보 자신이 다 망쳤다.

까짓 상행 호위 따위, 몇 번이고 해온 일 아니던가. 오합지졸처럼 보이던 녹림도의 모습에 방심했고 물건을 전부 빼앗겼다.

뒤늦게 구출된 후 망할 산적 놈들을 뒤쫓았으나 불타오른 산채에서 그들의 행적은 완전히 끊겼다. 생각보다 물건의 값어치가 높아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는지 본거지를 버리고 달아난 거다.

“네가 배상금을 일부 내준 덕에 세가 내에서 더 큰 소리가 나오지 않는구나.”

당언보가 개입한 덕에 그는 청해상단에 내기로 한 배상금의 양을 줄여서 말할 수 있었다. 만약 배상금이 이렇게 책정된 이유까지 말하게 된다면 당서악은 큰 곤경에 처했으리라.

“고맙다. 내 반드시 후사하마.”

“아니에요.”

상가 출신의 남자와 결혼한 어머니가 처음으로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제 책임인걸요.”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지만 네가 잘 해낼 거라고 믿는다.”

당서악이 당언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미파와 청성파의 속가문파에 계약이 몇 건 넘어가긴 했지만 그간 당가와 손발을 맞춰온 청해상단은 우리를 선택하게 될 거다.”

아미파와 청성파라는 이름이 당서악의 손길과 함께 묵직한 돌덩이가 되어 내려앉았다.

청성과 아미의 속가문파라곤 하지만 구파일방이 그들을 통해 사천에서의 세력을 확장하려 든다는 건 불 보듯 뻔하다. 어쩌면 본산에서 제자를 파견해서 상행 호위에 합류할지도 모른다.

“혹 새로 청해상단 사천 지부를 담당하게 될 자가 누군지는 알아냈느냐?”

“진 행수가 부리던 일꾼에게 슬쩍 물어봤는데, 저번 상행에 함께 왔던 문 공자라는 사람이 새 책임자로 올 눈치예요.”

당언보는 눈을 딱 감고 상단의 일꾼을 탈탈 털어 이 정보를 알아냈다. 일꾼은 내부 집기를 완전히 갈아엎는 통에 알게 되었다며 문 공자의 이름을 내뱉었다.

아무리 청해상단의 지부 소속이라지만 사천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당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보다 약한 자를 억압하는 건 뒷맛이 좋지 못했으나 당언보는 애써 이 떨떠름한 기분을 무시했다.

“분명……. 이름이 문예결이라 하였던 거 같은데.”

당서악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린 채 기루에서 진삼이 주절주절 떠들던 말을 떠올렸다.

대충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가 나타나 청해상단의 명운을 틀어쥐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어찌나 입단속을 단단히 당했는지 그 이상은 말해주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진삼조차 모르는 비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입 싼 사내는 맨정신으로도 제 능력이나 지위를 과시할 기회가 있다면 결코 놓치지 않는 성격이었으니까.

“일단 적당히…… 만날 기회를 찾아봐야겠구나.”

당서악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번에는 절대 오라버니를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언보야. 그리 말하지 말렴.”

그는 아직 쓸모가 많은 패를 다독이며 덧붙였다.

“비록 먼 친척 간이라곤 하나 우리는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겠니?”

“오라버니……!”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당언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얼굴을 들어 올렸을 때, 그녀는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은 상태였다.

“반드시 그 잡것들을 찾아내서 살점을 씹어먹고 말겠습니다.”

당언보의 눈에 형형한 녹광이 서렸다.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갚는 사천당가의 일원다운 기백이었다. 당서악은 만족스러운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든든하구나.”

***

“가기 싫군.”

후원의 풀밭에 늘어져라 누운 채로 중얼거리자 그의 배 위에 똬리를 틀고 있던 뱀뱀이가 고개를 들어 올리고 혀를 날름거렸다.

“안 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가는 쪽이 더 이득이거든.”

예결은 뱀뱀이의 콧잔등을 어루만지다가 슬쩍 제 기운을 불어넣었다. 몸에 힘이 차오르자 뱀뱀이의 눈이 금빛으로 번쩍였다.

다른 건 평범한 뱀과 다를 바 없는데 뱀뱀이의 눈이 번쩍일 때면 예결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동질감을 느끼곤 했다. 인간은 아니지만 예결과 같은 힘을 느끼고 사용하는 존재가 있다는 건 퍽 위안이 되는 기분이었다.

“여기는 영물학자 같은 거 없나.”

천년뇌각망에 대해 뭘 알고 싶어도 손에 넣을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다. 뭘 찾기만 하면 광고로 주르륵 도배되던 검색엔진이 그리워졌다.

이만한 영물의 생태를 알아내려면 세월에 너덜너덜해진 고문헌을 파고들거나 심산유곡에 숨어 사는 기인을 찾아내야 할 게 분명하다. 하오문이나 개방 같은 정보 단체를 통하는 것도 방문이지만……. 그 순간부터 사라진 영물의 주인이라는 이유로 온 강호의 관심을 받게 될 거다.

SNS 스타는 광고를 해서 돈이라도 받지, 강호의 스타는 목이 따인다.

“그래도 서로 말귀는 알아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지?”

예결이 웃으며 손가락을 내밀자 뱀뱀이가 턱을 비비적거렸다.

뱀뱀이는 영물이라 그런지 제때제때 기운을 보충해주면 식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걸 알아내는 건 은근히 오래 걸렸다.

그의 새 반려동물은 뭐든 잘 먹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뱀뱀이가 뭘 먹을지 고민하며 고기며 과일, 새 알이며 생선, 심지어 벌레까지 잡아 왔었다. 날이 지나고 보니 고기와 과일, 새 알, 생선, 그리고 벌레까지 전부 사라진 뒤였다.

가만 살펴보니 먹으라고 주면 전부 먹을 수는 있었다. 그래도 개중에 선호하는 건 새 알과 과일이었다.

제 머리통보다 큰 알을 와앙 하고 삼키던 뱀뱀이를 지켜보던 예결은 제 손으로 번개에 튀겨버린 핸드폰이 그리워졌다.

“여기 있었구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예결은 바닥을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뱀뱀이는 예결의 배에서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꽃들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저렇게 가게 둬도 되니?”

지우산을 든 하량이 물었다.

“잠시 자리를 피해준 거예요. 한 바퀴 돌면서 사냥할 만한 게 있나 살피고 돌아올 겁니다.”

하량은 그 말에 지우산을 예결의 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둘이 퍽 친해진 모양이구나.”

대사형이 자신의 옆에 앉을 기미를 알아챈 예결이 그를 제지했다.

“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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