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흑귀 (7)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난 예결은 겉옷을 벗더니 지우산 옆에 펼쳐놓았다. 하량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예결은 그의 손을 잡아끌어 옷 위에 앉혔다.
“여기 앉으세요. 아직 맨바닥은 찹니다.”
배시시 웃자 하량은 예결이 잡고 있던 제 손을 끌어당겼다. 주춤 몸이 기울자 얼굴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하량을 붙잡은 건 예결인데, 왜 역으로 사로잡힌 기분이 드는 걸까?
“너는 누워 있지 않았니?”
다른 쪽 손이 얼굴로 뻗어왔다. 차마 어깨조차 움츠리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데 하량이 예결이 머리카락에서 나뭇잎을 떼어냈다.
단정치 못한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예결의 뺨이 붉어졌다.
“저는 다 목적이 있어서 그랬죠.”
그 말에 하량이 유순한 낯으로 갸웃거렸다.
“목적?”
에라, 모르겠다.
예결은 제하량의 무릎을 끌어다가 그 위에 머리를 뉘었다. 흥미롭다는 듯 저를 굽어보는 대사형과 시선이 마주친 예결은 눈을 꾹 감았다.
“편하니?”
“무척이요.”
솔직히 하량의 허벅지는 바위처럼 단단해서 불편한 축에 들었다. 다만 예결에게는 호텔 침구보다 더 잘 맞을 뿐이다.
“정말 좋아요.”
개다래나무에 취한 고양이처럼 뺨까지 비비적거리니 하량이 느릿하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예결이 녹아내렸다.
“사천에 가 있는 내내 대사형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그럼 냉큼 돌아오지 않고 무얼 했느냐?”
“배를 한 척 건조해 드리기로 했잖아요.”
예결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잠꼬대처럼 속삭였다.
“약속은 꼭 지킬 거예요. 대사형은 손가락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아도 제가 호강시켜 드릴 테니까 기다리세요.”
“……그래? 내 말년은 사제만 믿으면 되겠군.”
아직은 같잖은 허세로 들릴 법도 한데 하량의 음성은 진지했다.
“이런 건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네요.”
“이런 거라니?”
“갓 입문한 어린 제자가 대사형처럼 곤륜의 이름을 강호에 널리 알리겠다고 떠벌리면 언제나 끝까지 들어주시다가 진지하게 격려해 주셨잖아요.”
옛 생각에 예결은 푸스스 웃어버렸다.
“먼발치에서 지켜볼 때마다 얼마나 허황한 꿈을 입에 담아야 대사형이 난처해할까, 하고 나쁜 생각도 했었는데.”
갓 입문한 예결을 데려온 이가 개방도라는 건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예결이 원래는 거지였다는 사실도. 그래서인지 옷을 깔끔하게 입고 다니고 아침저녁으로 씻어도 악취가 난다며 빈정거리던 이도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이보다는 예결을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적당히 피해 다니는 이가 더 많았다.
그의 사부님이 된 백양진인은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 말했다. 그때는 그게 연장자의 현기 어린 조언처럼 들렸다. 예결은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동안에도 시선으로는 항상 대사형을 쫓았다.
애초에 곤륜에 입문한 계기가 바로 제하량이었기에.
한 번도 눈앞의 사내에게 터놓고 말한 적 없는 진실을 삼키며 웃자 하량이 물었다.
“왜 한 번도 다가와 묻지 않고?”
“……혼자 할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놀이 같은 거였으니까요. 대사형한테 말을 걸면 끝나 버리잖아요.”
제하량은 무리에서 은근히 소외되던 예결도 종종 챙겨 주긴 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도 공사다망한 사람이었고, 예결 외에도 숱한 사형제가 그의 관심을 갈구했다.
자연스럽게 예결은 가장 멀리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아쉽구나.”
“네?”
“그땐 네가 나를 어려워한다고 생각했거든.”
예결의 낯을 찬찬히 뜯어보는 그의 시선에는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말이라도 걸어볼 걸 그랬구나.”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말에 예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만약 그랬다면 네가 이처럼 사람에게 안기는 것도 좋아하고 그런 재미있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하량은 연거푸 중얼거렸다.
“참으로 아쉬워.”
“대사형이 저를 배려해주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대사형은 어딜 가나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마지막 순간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게 아니었다면 제하량은 자신 같은 인간이 존재했다는 건 기억조차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제하량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니.
꽃잎이 가슴 속을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양 간지러웠다. 너무 헤벌쭉해 보이지 않으려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자신이 잘 해내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재회한 날, 너를 두 손으로 안고 있는데도 도무지 믿기지 않더구나. 대체 누가 네게 이런 짓을 저질렀을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아서 계속 고민했다만, 너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속이 쓰렸다.”
하량의 낯은 참으로 쓸쓸했다. 빈말로도 서시나 왕소군이 떠오르는 가냘픈 미모가 아님에도 예결은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맥없이 휘둘렸다.
“……그.”
“혹 누가 네게 그렇게 무도한 짓을 저질렀는지 기억해낼 수 있겠니?”
예결은 그간 이런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사형은 예결이 기억이 잘 안 난다고 둘러댔다는 걸 알아챘음에도 그를 배려해 모든 걸 불문에 부쳤기 때문이다.
설령 뒷조사를 했더라도 곤륜혈사 후 제 행적은 완벽하게 끊겼을 거다.
‘내가 직접 네 몸, 아니지. 문예결의 몸을 거둬 화장했다.’
스승 백양진인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예결은 몸을 웅크렸다.
“결아?”
만약 대사형이 그 사실을 알아내면 지금의 자신은 버려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니 몸이 저절로 떨렸다.
비이성적인 걱정이고 공포였다. 가이드에게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에스퍼의 본능이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제가.”
계속해서 입술을 달싹여도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인간이라니, 그걸 누가 믿는다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 누구도.
심지어 예결 그 자신조차 스스로의 기억을 종종 의심하게 되었다. 혹 이게 가이드를 만나지 못한 에스퍼의 광증이면 어쩌나, 하고.
“예결아!”
양어깨를 움켜쥔 대사형이 그의 몸을 일으켜 앉혔다.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가 그 위에 앉은 꼴이 된 예결은 하량의 품에 파고들었다.
“저는, 잘…….”
“괜찮다. 괜찮아. 내 잘못했다. 다시는 묻지 않으마.”
애가 탄다는 듯 하량의 목소리가 바짝 조여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련? 응?”
예결은 하량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도리질을 했다. 분명 표정이 최악일 텐데 그걸 어떻게 보여주냔 말이다.
“이 우형이 잘못했다. 한 번만 용서해다오.”
“그런 말 마세요.”
예결은 눈만 빠끔 내밀었다가 창백해진 하량의 낯을 보고 깜짝 놀라 손을 뻗었다.
“대사형은 잘못한 게 없어요.”
또박또박 건넨 말에 갑자기 하량의 눈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은 비에 젖은 나비의 애잔한 몸짓 같았다.
“만약 누가 네게 금제를 가한 거라면.”
예결이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하량이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대답하지 말라는 뜻이다.
희게 변한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형용할 수 없는 괴로움이 느껴졌다.
무림의 금제란 보통 사술과 고독으로 나뉜다. 어느 쪽이든 인간의 정신을 주무르고 강압하는 데 효과적이다. 금제 당한 정보를 발설하거나 행동으로 옮기면 지독한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전자의 손에 목숨이 달려 있어서 착실한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된다.
“내 반드시 찾아내서 부숴주마.”
아무리 생각해도……. 흑점에서 흑귀로 마주쳤을 때 예결이 고백한 트라우마 때문에 이런 질문을 꺼낸 눈치였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자취가 없던 사제가 만신창이로 나타났던 재회에서부터 이런저런 퍼즐을 꿰맞추던 하량은 온갖 걱정을 한 아름 삼켰으리라.
그런 걸 생각하면 눈앞의 사내가 애틋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금제 같은 건 당한 적 없어요.”
예결은 또박또박 말했다.
대사형이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뒤를 쫓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건 사양이었다. 예결은 그의 모든 감정이 자신에게로 귀결되길 원했다.
“그래. 그럼 됐다. 그럼 됐어.”
하량은 다시 예결을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사제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신을 위한 것인 양 비틀린 절박함이 느껴졌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단단한 품 안에서 예결은 안온함을 느끼며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지우산이 만들어놓은 아주 야트막한 그늘에서 두 사형제는 한 몸처럼 얽혀 있었다. 태양은 그들의 위로 찬찬히 흘러갔다.
“……대사형.”
예결은 망설이다가 그의 가슴을 짚은 채 상체를 들어 올렸다. 나지막한 부름에 잠든 이처럼 눈을 감고 있던 하량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누가 대사형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적이 있나요?”
돌연 금제 이야기를 꺼내고, 예결이 말을 하기도 전에 그가 말을 못 하게끔 막았다.
그게 어떤 건지 잘 아는 사람처럼.
사술이니, 고독이니 하는 이야기가 강호에 떠돌긴 해도 대체로 괴담에 가까웠다.
정파무림에서 마두를 잡아 없애듯 마공도 비급을 찾아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한번 금기라 규정하면 실체가 사라질 때까지 악착같이 쫓아가 없애버린다. 고독이나 사술도 무림의 금기에 속했다.
하량이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이가 내 뜻을 강제하는 것처럼 보이더냐?”
“아뇨.”
예결은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누군가가 하량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면 청해상단 같은 걸 덥석 자신에게 내주진 못했을 거다. 노예가 귀한 재산을 남에게 줘버리는 꼴이니까.
“하물며, 사술이나 고독은 죽지 않는 이상 벗어날 수 없단다.”
하량에게서는 그 어떤 고통의 기색도 읽히지 않고 침착하건만, 어쩐지 붉은 피가 흐르는 상처 위에 손을 가져다 댄 것만 같았다.
예결이 무심코 하량의 뺨에 손을 가져가자 그는 사제의 손등을 감싸며 속삭였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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