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남궁운 (1)
“큰일 났네.”
예결이 작은 면경에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비가 미리 꾸려놓은 예결의 행장을 가볍게 들어 올리던 삼랑이 의아한 낯으로 그를 바라봤다.
“뭐가 말입니까?”
“눈 밑이 퀭하잖아. 얼굴이라도 잘 가꿔야 한다고 했는데…….”
예결은 제 눈가를 가리키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그런 말을?”
삼랑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예결은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삼켰다. 그녀의 반응에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 중원이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얼굴이라도 잘 가꾸란 건 선배 에스퍼들의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었다. 가이드를 사로잡으려면 반반하게 타고난 낯짝까지 이용하는 게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하다못해 키우던 반려동물까지 동원해서 수작 부리던 인간이 어디 한둘이던가.
본디 예결은 선배들이 부산을 떠는 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얼굴보다 인격 도야가 시급한 양반들이 피부과 정보를 공유하는 걸 보고 있자니 한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이드를 만나고 나니 자꾸 거울을 들여다보게 된다.
예결은 그림자가 진 제 눈가를 꾹꾹 눌렀다.
밤새 악몽에 뒤채느라 다크서클이 생겼다. 하량과 나눈 대화가 원인이었다.
“혹시 곤륜에서는 들어온 소식 없어?”
“주군께서 그쪽과는 선을 끊으셔서요.”
삼랑이 입을 가리며 호호하고 웃었다. 조만간 백양진인의 목을 따러 가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눈 덮인 산을 오를 채비까지 마쳤는데 결국 하량은 아무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옛 사문에 대한 마지막 예우일 거라 어렴풋이 짐작했는데, 이게 웬걸, 하량은 그 후로 곤륜에 들어가던 지원을 전부 끊어버렸다.
몰락 직전까지 간 곤륜의 도사들이 산 위에서 구름 위를 노니는 신선 흉내를 낼 수 있었던 건 결국 주머니가 든든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물주가 사라졌으니…….
‘의도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그 후로 사라진 문 공자를 찾겠다는 수색도 흐지부지됐지.’
“그랬구나.”
당장은 서로 소식이 안 닿는 거 같아 다행이었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있는 힘껏 백양진인과 하량의 사이를 이간질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예결은 심술궂은 질문을 하나 던졌다.
“아, 근데 대사형은 청해상단을 내게 준 후에는 무슨 일을 하시는 거야?
처음에 소개받을 때만 해도 제 상단주님, 하고 부르더니 그 호칭은 얼마 못 가 사라졌다. 예결에게 청해상단이 넘겨진 후의 일이었다. 진영이나 삼랑이나 거리낌 없이 주군, 주군 하고 부르는 게 애초부터 숨길 생각이 없었던 사람 같았다.
“투자를 하고 계십니다. 중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유망해 보이는 사람이나 사업에 돈을 대 주고, 그들이 얻게 된 이익을 적당히 받아내지요. 그래서 자주 장원을 비우시는 겁니다.”
“아아.”
그런 설정이군.
예결은 적당히 이해했다는 얼굴로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당황할 줄 알았는데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유려한 대답이다.
“상단주 노릇과 병행하기에 무리가 따랐는데, 믿음직한 사제가 온 덕에 짐을 덜어냈다며 참 다행이라고도 하셨지요.”
“내 덕분이라고?”
“그럼요. 유능한 사람보다 찾기 어려운 게 믿음직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삼랑에게는 간신의 재능이 있어 보였다. 폭군의 자질이 넘치는 예결은 그녀의 간언을 덥석 받아 삼켰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그런 말씀을 하고 다니셨다니…….”
영악한 예결이 얼굴까지 붉히며 쑥스러워하는 모습은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살수는 큰 감흥을 느끼진 못했다. 다만, 저 얼굴을 봐도 진영이 의심을 이어 나갈지 궁금해지긴 했다.
“주군께서는 언제나 문 공자님의 칭찬을 하시지요.”
빈말이래도 듣기가 좋았다. 예결은 굼실굼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자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출발하지.”
예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서 사천에 다녀와서 대사형에게 자기가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했노라 자랑하고 싶었다.
재촉하는 예결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삼랑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따라 나가기 전, 예결은 검은색 수반도 하나 챙겼다.
뱀뱀이를 위해서였다.
어제 대사형과 시간을 보낸 후 뱀뱀이를 찾아다니다가 후원의 연못에서 헤엄치며 놀던 것을 발견했다.
처음엔 강가도 아닌데 웬 사금이 있나 싶었다. 햇빛을 받은 천년뇌각망의 비늘이 마치 금모래가 휘몰아치는 양 반짝였기 때문이다. 가까이 가서 보니 뱀뱀이였다.
나는 거 빼곤 다 할 줄 아는 똑똑이였다.
‘하기야 날면 용이 돼서 승천하지, 뭐 하러 지상에 남아 있겠어.’
예결은 옷소매 위로 소중한 파트너를 쓰다듬고는 걸음을 옮겼다.
***
두 번째 사천행은 처음처럼 고되지 않았다. 몸이 하루가 다르게 좋아진 덕이다. 게다가 어지간한 일은 전부 삼랑 선에서 해결되니 예결이 직접 나설 일도 없었다.
예결은 사천에 당도하자마자 새로 계약을 맺은 속가문파에서 온 사람들과 대면해야 했다. 상단 대 문파로 호위 계약을 주고받긴 했으나 예결이 사천에 없었기 때문에 얼굴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온 건 청성의 속가문파였다. 익선문에서는 사천당가가 은근히 눈치를 준다는 말을 흘렸다. 대신 나서서 해결해줄 생각은 없었기에 예결은 사람 좋은 웃음만 흘렸다.
‘좋은 뒷배 두고 무공도 안 익힌 일반인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네.’
한국에서는 걸어 다니는 재해라고 불리는 S급 에스퍼가 참으로 양심이 없었다.
인사와 선물을 건넨 익선문의 문도 돌아가기 무섭게 예결은 삼랑에게 속삭였다.
“저기랑은 단기 계약만 하자.”
“예.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지요.”
삼랑이 살랑살랑한 투로 답했다.
연이어 옥형문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옥형문은 아미파의 속가제자가 세운 문파로 성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규모가 크진 않았으나 내실이 단단하여 일을 맡겼다고 들었다.
“어려움은 없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옥형문에서 나온 제자가 덤덤하게 답했다.
“약간의 마찰이 있다고 들었는데…….”
삼랑은 별말을 해주진 않았으나 앞선 익선문과의 대화 덕에 옥형문 역시 비슷한 상황일 거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천당가는 그 특수성 때문에 폐쇄성이 짙었다. 까닭에 내부인에게는 관대해도 외부인에게는 한없이 옹졸해지는 면모가 두드러진다.
“그런 마찰을 막기 위해 귀 상단에서 저희를 고용한 것이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당찬 말에 예결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이 정도의 배포는 있어야 앞으로도 일을 믿고 맡기지 않겠나.
“옳으신 말씀입니다.”
옥형문의 제자가 일어날 때까지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예결은 삼랑과 단둘이 된 후에 그녀에게 소곤거렸다.
“다음 계약은 좀 더 장기로 끌고 가도 될 거 같지?”
“저한테 굳이 확인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삼랑이 소처럼 눈을 끔벅이자 예결은 새침하게 대꾸했다.
“의견 물어본 게 아니라 시킨 거야.”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익선문도 그렇고, 옥형문도 그렇고, 사천당가가 많이 괴롭혀?”
“글쎄요. 제가 알아본 바로는 아직 수위가 심해지진 않았습니다. 적당히 눈치 주는 정도?”
“익선문이 심각하게 굴길래 사천당가 측이 단단히 수틀린 줄 알았네.”
예결은 혀를 끌끌 찼다. 이쪽도 성도에서 장사하려면 사천당가 눈치를 봐야 했다. 까닭에 작은 규모의 일감만 다른 문파에 맡겼다.
벌써 우는 소리가 나오면 곤란한데 익선문이 어려움을 호소해서 의아했다.
“옥형문이 담대한 건 믿을 구석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아미파 가지고 하는 소리는 아닐 테고.”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익선문의 뒷배도 마찬가지로 구파일방 중 하나인 청성파다.
“옥형문에 아주 특별한 식객이 머무르고 있다더군요.”
삼랑이 눈을 휘며 말했다. 예결은 그 정보를 어찌 얻었냐고 묻지 않았다. 어떻게 알아냈건 유용하면 그만이다.
“특별한 식객? 누군지는 알고?”
“거야 저도 모르지요.”
슬쩍 목소리를 낮춘 삼랑이 속삭였다.
“하지만 옥형문이 위기에 처하면 전면에 나서지 않을까요?”
호기심 가득한 삼랑의 시선은 옥형문의 등을 떠밀어 사지로 보내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예결은 혀를 찼다. 여러모로 대단한 성격이었다.
“그럼 오늘 일정은 이걸로 끝인가?”
“예. 따로 할 일이 있으십니까?”
슬쩍 말을 돌리자 삼랑은 언제 나쁜 생각을 했냐는 양 얌전히 물었다.
“대사형에게 줄 선물도 사고…… 흑귀 님에게 드릴 만한 물건도 찾아보려고.”
말꼬리를 슬쩍 흐렸다가 시선을 피하는 예결의 모습에 삼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도 감이 좋은 편이긴 한데 예결도 만만치 않았다.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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