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남궁운 (2)
삼랑을 따라 상단을 나서던 예결은 그녀 외에도 호위 셋이 더 따라붙은 걸 알아챘다.
일전에도 느낀 거지만 삼랑은 길 안내를 귀신같이 잘했다. 내비게이션 같은 것도 없는 중원에서 사람이 없는 길만 귀신같이 찾아다니는 게 놀라웠다.
“이쪽 길이 확실해?”
“네. 어딜 가나 주변 지리 파악을 최우선으로 하니까 믿고 따라오시면 돼요. 직업병이라서.”
외진 골목길을 빠져나오니 눈앞에 상점가가 펼쳐졌다.
저녁이라 그런지 시전(市廛)이 줄줄이 늘어선 거리의 위로 노란 등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사천 성도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거리에 도착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별천지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예결은 즐겁게 걸음을 옮겼다. 거의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삼랑부터 시작해서 그 몰래 쫓아다니는 호위가 셋이나 되는데 부담스럽다는 생각 자체가 안 들었다.
그러고 보면 예결은 전생에서도 대범했다.
사람들이 부산스레 오가는 소리며 상인이 호객하는 외침, 아직 이른 저녁임에도 벌겋게 코를 붉힌 채 어깨동무하고 가는 주정뱅이들의 노랫소리가 정신없이 어우러졌다.
“이게 보랑구(拨浪鼓)라고 하던가.”
작은 북 모양의 장난감을 발견한 예결이 그걸 들어 올렸다. 손잡이를 잡고 빙글빙글 돌리자 북 양옆에 달린 동그란 추가 북을 두드리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전생에 한 아이가 가지고 노는 걸 보며 무척 부러워했던 기억이 났다.
삼랑은 말없이 값을 치렀다.
“산다고 안 했는데 돈부터 주면 어떡해?”
“주군께서 문 공자님이 무얼 원하든 부족함이 없게끔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삼랑이 빤질빤질한 낯으로 미소 지었다.
“이건 칠도 벗겨져 있고 안 예쁘잖아. 더 좋은 걸로 살 거야.”
예결의 말에 삼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장난감의 만듦새가 퍽 조잡했다.
“이런, 그 생각을 못 했습니다.”
“하여간 대사형 명령이라면 융통성이 없어진다니까.”
예결은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예전부터 가지고 싶었으니까 이거 하나 정도는 괜찮겠지.”
그 후로도 예결은 비단 공이며 연잎 모양의 도자기 그릇, 자그마한 우각함을 사들였다. 우각함을 팔던 상인은 이게 외국에서 들여온 물건이라며 아주 값비싼 거라고 박박 우겼다. 하얀 물소의 뿔로 만든 거라던가.
하지만 척 보기에도 가짜라 안 사겠다고 돌아서니 값을 절반이나 깎아주기에 흥정을 잘한 기념으로 챙겼다.
“이것저것 잔뜩 샀는데 대사형 드릴 만한 게 없네.”
잡동사니만 한 아름이었다.
“뭐든 좋아하실 겁니다.”
“좋은 걸 드리고 싶으니 그러지.”
장난감을 흔들면 나는 둥둥 소리에 맞춰 걸음을 옮기는데 어느새 주변의 등이 붉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저 높다란 기루의 창에서 흥겨운 음악 소리와 노래가 뒤섞인 채 흘러나왔다.
“우리 진 행수가 신세 망친 곳이 바로 저기겠군.”
예결의 농 아닌 농에 삼랑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들어가 보시렵니까?”
삼랑의 질문에 예결은 고개를 내저었다.
에스퍼에게 중요한 건 첫째가 순결, 둘째가 자기관리, 셋째가 능력이다.
“삼랑은 가고 싶으면 가. 나는 이제 피곤해서 돌아가 쉴래.”
“이런, 공자님의 체력을 간과했군요. 병상에서 일어난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건강하게 돌아다녀서 깜빡했다며 삼랑이 혀를 찼다. 남 죽이는 일은 익숙해도 남 지키는 일은 처음이다 보니 호위 대상에게 뜻밖의 이변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역시 나보단 홍여가 더 적임자 같은데.’
주군의 명으로 일하러 간 동료를 떠올리며 삼랑은 상단으로 가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둘이 막 기루를 지나칠 때였다.
“오, 이렇게 반가울 데가.”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낸 이는 녹의를 입고 있었다. 사천당가 특유의 색에 예결은 걸음을 멈췄다.
당가의 사내가 뭐라 말하며 나서기도 전에 삼랑이 그 앞을 가렸다.
“오랜만입니다. 상단주님.”
당서악이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정체를 밝히지 않았건만 그새 정보를 습득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상단 내부로는 충분히 알려진 사실이니 새어 나갔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불쾌한 건 그 말 한마디로 자신이 정보의 우위를 점했음을 알리는 상대의 태도다.
본인이 겸손한 척 잘 가장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꼬리 열 개 달린 예결이 보기엔 거들먹거리는 티가 났다.
“음. 죄송하지만 누구십니까?”
예결의 질문에 당서악은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불쾌함을 드러내지 않고 갈무리한 걸 보면 난 놈은 난 놈이다.
“이런. 너무 반가운 나머지 일방적으로 아는 척을 해버렸군요. 저는 사천당가의 당서악이라고 합니다. 지난번에 진 행수와 함께 상단주님을 만났었지요.”
“아. 기억이 날 것도 같군요.”
예결이 짐짓 거드름을 피우자 당서악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어린놈이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외부에는 제가 상단주라는 게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소식이 빠르시군요.”
은근한 추궁이 깔린 질문에 당서악은 유려하게 답했다.
“사촌누이가 상가에 연이 닿아 있어 젊고 재기가 넘치는 사내가 청해상단의 주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남들보다 빠르게 접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운이 좋아 진 행수가 극진히 모시던 문 공자님을 뵐 기회도 있었기에 두 사실을 연결하기 쉬웠지요.”
“영민하십니다.”
은근슬쩍 대화를 끝내려는 기미에 당서악은 붙임성 좋게 제안을 건넸다.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제가 저녁을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사천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를 내는 곳을 압니다.”
지난 사천 방문 때 진 행수를 통해 부른 예결이 끝내 기루에 나타나지 않아서일까, 당서악은 새로운 미끼를 흔들었다. 그러나 예결은 낯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제하량이 없으면 윤기가 차르르 도는 쌀밥도 모래알 같고 소고기도 말라비틀어진 곤약 같은데 음식 이야기에 마음이 동할 리가 없었다.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은 당서악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무엇보다도 사천 제일의 명주를 내는 술도가로 유명하지요.”
예결은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흑점의 대사형에게 술 선물을 하면 받아 주시려나?’
사파 무인은 으레 술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아니, 사실 예결은 무림인치고 술 싫다는 이를 몇 보지 못했다.
심지어 무당의 도사나 소림의 승려조차 술을 곡차라 부르며 즐긴다.
“안내 부탁드립니다.”
삼랑의 시선이 예결의 등을 쿡쿡 찔러왔다. 예결은 대답 대신 뱀뱀이가 휘감고 있는 팔을 들어 올려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남들 보기엔 따라오라 명령하는 것처럼 느껴질 테지만 여차하면 번갯불에 튀겨 버리겠다고 신호를 주는 거였다.
‘도통 나설 기회를 안 주신다니까.’
간만에 사천당가의 암기를 수집하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글렀다.
픽 웃은 삼랑은 조용히 예결의 뒤에 따라붙었다.
당서악이 안내한 술도가는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있었다. 적당히 사람이 오가지만 시끌벅적하지 않고 조용했다.
예약이라도 해둔 건지 당서악의 얼굴을 본 일꾼이 그들을 방으로 안내했다. 주문하지도 않은 음식이 척척 상에 올랐다.
여러모로 당서악의 철저한 안배가 느껴졌다. 하나 예결은 천하 태평하게 고기볶음을 몇 점 우물거렸다.
“괜찮네.”
지난 방문 때는 향신료가 너무 강렬하다는 생각이 더 컸는데 오늘 먹는 음식은 하나같이 조화가 절묘했다.
역시 맛집은 현지인이 제일 잘 아는 법이다.
“술이 나왔군요. 함께 드시지요.”
당서악은 정중하게 예결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그 태도만 두고 보면 오대세가 중에서도 콧대 높기로 유명한 사천당가 출신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야망이 보통 큰 놈은 아닌 모양인데…….’
잔을 비운 예결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게 좋은 술입니까?”
뭐가 맛있는 술인지 알 기회가 없어서 감이 잡히질 않는다. 향이 그윽하긴 한데, 목 넘김은 뜨겁고 맛은 진득하게 달다.
“선담주라 합니다. 사천의 명주로 꼽히지요.”
“귀한 술이군요. 아무한테나 내주지 않을 거 같은데…….”
말꼬리를 흐리며 상대의 배려를 띄워주자 당서악이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뭘요. 청해상단과 제 사이에 인연이 깊으니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청해상단과 사천당가의 인연이 아니라 청해상단과 그라는 개인 사이의 인연을 강조하는 게 흥미롭다.
무림문파나 세가의 일원은 단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데 눈앞의 당서악은 그 자신의 영달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런 면에서는 강호에 돌아와 마주친 인간 중 가장 현대인에 가깝다.
“마음에 드셨다면 가시는 길에 몇 병 챙겨드리라 언질해 놓겠습니다.”
“아, 기왕이면 두 궤짝 정도로.”
예결은 사양 않고 선담주를 챙겼다.
반 정도는 사천의 대사형에게 주고, 남은 반은 청해로 돌아가 만날 대사형에게 건네주면 딱이다.
‘대사형, 오늘도 남는 장사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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