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남궁운 (3)
언제나 가슴속에 품고 다니는 쁘띠 대사형에게 오늘의 성과를 보고한 예결은 입에 발린 말을 늘어놓았다.
“이리도 호탕한 분이라는 걸 첫 만남 때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요.”
익선문과 옥형문을 끌어들이기로 한 게 예결의 결정임을 아는 삼랑은 그의 뻔뻔함에 혀를 내둘렀다. 어떤 의미에서는 주군과 정반대의 인물이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서악은 사람 좋은 낯으로 웃었으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가만 보고 있으니 문 공자는 향응에 큰 거부감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기름칠을 살살 하긴 했어도 정말 대쪽 같은 성품이라면 선물을 받기는커녕 이 자리까지 따라오지도 않았으리라.
문득 당서악의 뇌리에 진삼이 자신과 예결의 사이를 일부러 갈라놓았다는 의심이 움텄다.
‘배상금을 두 배로 올리면 일이 성사될 거라 귀띔한 것도 진 행수였지……. 혹 총관으로 승진한 게 그때 그 사건을 공으로 삼은 걸까?’
진 행수는 살살 꾀는 대로 쉽게 넘어오는, 귀가 얇고 평범한 사내였다. 그래서 꼬드겼다. 진삼이라는 놈이 욕심을 부려봤자 손바닥 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 행수가 여태 당서악이 주는 꿀물을 먹으며 점점 간을 키워왔다면?
불을 질러놓은 예결은 잔을 비우며 히죽 웃었다.
‘잘 탄다.’
꽃구경은 텄으니 불구경이라도 해야지.
“이번에 청해상단이 당가와 거래를 끊으려는 줄 알고 염려했는데, 신임 상단주님을 뵙고 나니 제 걱정이 다 부질없어지는군요.”
당서악이 웃으며 하는 말에 예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왜 그런 오해를 하셨는지요?”
예결이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
당서악은 입을 다물었다. 아미나 청성의 속가문파에 일을 맡긴 것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다소 구차했다.
방계라곤 하나 오히려 그 때문에 사천당가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상행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니까요. 제 사촌누이가 직접 호위단을 이끌었기 때문에 참으로 면목 없습니다.”
“배상금도 충분히 치렀으니 문제 삼지 않을 생각입니다.”
예결은 관대한 척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당가에서 건넨 배상금과 흑점에 넘겨 팔아치울 장물을 생각하면 눈앞에 앉아 있는 게 사람이 아니라 독개구리라도 방긋방긋 웃어줄 수 있었다.
“다른 곳에 호위를 맡기긴 했지만, 사천당가야말로 청해상단의 오랜 친구 아니겠습니까?”
예결은 슬쩍 몸을 앞으로 숙이며 당서악에게 손짓했다. 당서악은 무림인이라 청각이 뛰어난 편이었으나 상대에게 맞춰줄 요량으로 덩달아 몸을 숙였다.
“이번에 다른 문파에 일을 맡기게 된 건 제가 젊은 나이에 상단주 자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우려가 컸거든요. 첫 상행부터 이렇게 문제가 생겼으니……. 뭐라도 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아아.”
당서악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혈통이니 나이니, 온갖 조건 때문에 발목이 잡히는 환경이라면 그도 잘 알았다.
“곤란하셨겠군요.”
예결은 상대의 표정을 곁눈질로 쓱 살피며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도 이겨내지 못해서 어디 청해상단의 주인을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제 미숙함이 그간 좋은 관계를 맺어온 당가에 아쉬움을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지요.”
대사형 앞이 아니라 그런지 약한 척을 하려니 절로 입매가 파들파들 떨렸다. 예결은 표정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어깨도 축 늘어뜨렸다.
그 노력이 먹혔는지 당서악이 안타깝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상단주님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젊은 나이에 사천당가의 외부 당주직을 맡게 되며 여러 견제를 받았지요.”
술잔을 채워주는 사내의 손길이 퍽 정성스러웠다. 예결은 잔을 들어 올리며 당서악과 시선을 마주했다.
“본가에는 제가 잘 설명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입니까?”
“그렇고말고요.”
당서악은 너그러운 호인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 당 모의 진심이 상단주님께 전해졌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예결은 활짝 웃었다.
제하량의 진심 외엔 알 바가 아니지만, 그걸 당서악에게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물론입니다. 앞으로도 청해상단의 상행을 잘 부탁드립니다.”
잔을 들어 올리자 당서악이 마주 잔을 들었다.
“비록 진삼 행수와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이렇게 말이 통하는 상단주님을 만나게 되어 무척 기쁘군요.”
***
예결은 사천에서 머무르게 된 장원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손 씻을 물을 찾았다. 시비가 가져온 은대야에 손을 몇 번이나 씻고 향유를 묻힌 영견으로 손을 닦아낸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엄청나게 질척거려.”
그가 하는 양을 가만 지켜보던 삼랑이 불쑥 물었다.
“왜 그렇게 성의껏 상대해주신 겁니까? 적당히 내다 버리시지 않고.”
“무슨 생각인지 궁금하잖아. 방계라지만 오대세가 출신이 일개 상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그렇고.”
원래는 진삼이 모든 일의 원흉인 것처럼 판을 깔아둔 뒤 슬쩍 물러날 작정이었는데
“게다가 사천에서 계속 장사를 해야 하는데 사천당가 눈 밖에 나면 곤란하지.”
흑점에 대사형이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만 해도 당서악에게 이렇게 잘 대해줄 생각은 없었다.
“곤란한가요?”
삼랑이 눈을 느릿하게 끔벅였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흑점에서 돈도 받아야 하고 흑귀 님도 만나러 가야 하는데 사천당가가 사사건건 훼방 놓는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귀찮겠어?”
“하긴. 개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는 더 시끄럽게 짖지요.”
손짓과 발짓을 곁들인 설명에 삼랑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목적은 대사형과 자주 만나는 거지만 예결에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바로 제하량의 정체를 알아내는 거다.
예결은 아직 대사형의 진정한 정체를 몰랐다.
자신이 죽고 난 후, 곤륜에 남은 대사형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왜 파문을 당했으며 어쩌다 청해 상단을 손에 쥐게 된 건지, 또 언제부터 흑점의 지부장 노릇을 했는지 등등, 모르는 게 너무도 많았다.
‘욕심부리면 안 돼.’
유독 해쓱한 낯을 하고 있던 에스퍼 선배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예결은 아무렇지도 않게 옛 지인의 경고를 뇌리에서 지우며 물었다.
“이번 상행이 중경으로 간다고 했었지?”
“예.”
사천당가와 새 계약을 맺었으니 흑점에 방문해서 지난 거래의 대금을 받은 후 청해로 돌아가는 게 그들의 다음 일정이었다.
“우리도 따라가 볼까?”
“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니, 아까.”
예결이 손목 꺾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당서악이 장강수로맹이 기승이라 했잖아. 익선문이나 옥형문도 이번 상행에 함께 호위를 맡는 게 좋을 거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걸 보면, 이건 도전장이지.”
예결은 호전적으로 웃었다.
“먼저 함정을 팠던 입장이니 정정당당하게 저쪽 함정에도 걸어 들어가 줘야지.”
“당서악의 함정은 익선문이나 옥형문을 노린 거잖아요?”
삼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속 시커먼 인간끼리 사이좋게 모략질을 주고받으면서 정정당당을 따지는 건 흥미로웠다. 예결이 일을 크게 벌일수록 보는 재미가 있었기에 삼랑은 내심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예결이 스스로를 위험에 내모는 일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주군의 입에서 제 이름 석 자가 불린 날, 삼랑은 호위 대상의 사지가 멀쩡하고 숨통만 붙어 있으면 될 거라 여겼던 판단을 빠르게 수정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무슨 짓을 하려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지.”
“상단주님의 뜻이 그리 강경하시다면야 저는 따를 분이지요.”
잠시 고심하던 삼랑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중경 쪽에 대추나무를 판다는 사람이 있었던 거 같아요.”
“겸사겸사 거기도 다녀오면 되겠네.”
예결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대사형 곁을 떠나 있는 것 자체가 괴로운 만큼 나온 김에 볼일을 전부 보고 돌아가고 싶었다.
집에 꿀을 발라놓은 것도 아닌데 가이드가 엉덩이를 걷어차야지만 센터에 출근하던 선배 에스퍼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된 예결은 그리움을 삼켰다.
‘대추나무를 벽조목으로 만들다 보면 가이딩이 부족해지겠지만, 최대한 빨리 흑점으로 가면 되니까.’
중경에서 청해까지의 거리보다 중경에서 사천까지의 거리가 훨씬 짧아서 다행이었다.
‘나무 가격을 좀 더 후려치려고 했는데 별수 없이 이대로 거래를 성사시켜야겠군…….’
삼랑은 적당한 때에 예결을 이끌 미끼가 준비되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호호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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