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남궁운 (4)
그렇게 예결의 중경행이 결정되었다.
출발하기 전, 예결은 익선문과 옥형문에 사람을 보내 상행에 동행해줄 것을 청했다. 옥형문은 발 벗고 나서서 사람을 보냈고 익선문은 몸을 사릴 요량인지 그야말로 구색만 맞추는 수준으로 문도를 보내왔다.
마차에 앉은 채 상단의 일꾼들이 짐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모습을 구경하던 예결은 막바지에 등장한 무림인의 면면을 살폈다.
“옥형문은 여자가 많다고 들었는데.”
옥형문은 아미파의 속가문파인지라 아무래도 여성 문도가 많은 편이었다. 한데 지금 예결의 눈에는 남자도 여럿 보였다. 비율만 따지자면 거의 반반이었다.
“옷차림도 그렇고, 외부인인가?”
일찍이 삼랑이 옥형문에 특별한 손님이 머무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항상 예결에게 집중하던 삼랑의 시선이 오늘만은 옥형문 측에 꽂혀 있었다.
“그래 보입니다.”
“표정이 별로군.”
“생각보다 더 특별한 손님인 것 같아서요.”
이 정도의 강자라니…….
삼랑의 미간이 좁아졌다. 옥형문과 인연이 있으면서도 이 정도 수준의 무림인은 손에 꼽힐 정도다. 한데 그녀가 아는 한 그중 누구도 사천에 발을 들였다는 소식이 없었다.
예결을 지키게 되며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난 탓에 예전보다 정보의 흐름이 둔감해진 게 신경 쓰였다.
“혹시 모르니 옥형문 쪽에는 너무 다가가지 마셔요.”
“음.”
삼랑의 말에 예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할게.”
착한 아이처럼 방긋 웃고 있는 낯에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여운이 맴돌았다.
삼랑은 혀를 찼다. 이번 여정도 편히 보내기엔 글렀다.
“사천당가가 오는군요.”
녹색 깃발을 든 이들의 등장에 삼랑이 주의를 환기했다.
옥형문이나 익선문보다 한 발짝 늦은 도착이다. 녹의를 입은 사천당가의 무인은 하나같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먼젓번 호위가 실패로 돌아간 걸 마음에 담아둔 티가 났다. 특히 옥형문과 익선문 측에 시선을 준 후에는 입매가 더욱 단단해지는 게 보였다.
“분위기 끝내주네.”
“대 사천당가의 일원인데 고작 속가문파 제자와 함께 상행을 호위하게 생겼잖아요. 그것도 본인들이 실패한 탓이니……. 자존심이 퍽 상했을 겁니다.”
“무림인 심보란.”
예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간장 종지도 이런 간장 종지가 없었다.
가이딩 순서를 놓고 다투는 에스퍼가 생각날 정도다.
“왜 그렇게 봐?”
삼랑이 별 해괴한 것을 다 본다는 양 시선을 주고 있었다.
“본인은 무림인이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기에…….”
“아아.”
무심코 해버린 말을 주워 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예결은 헛된 발버둥을 치는 대신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사부님이 말씀하시길 이제 난 무공을 익힐 수 없는 쭉정이라 하셨거든. 그러니 어찌 무림인이라 하겠어.”
단전도 없는 게 어디 무림인을 자처할 수 있겠냐며 예결은 어설프게 웃었다.
만약 백양진인이 예결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일 터였다. 그로서는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꾸준한 모략질을 당하는 중이었다.
‘비빌 언덕도 없는 처지에 무림명숙을 상대하려면 날조와 선동은 필수지.’
양심에 털 난 예결의 목적은 확고했다.
백양진인이 콩으로 메주를 만든다는 소리를 해도 대사형이 그를 불신하게 만드는 것.
“제자에게 못 하는 말이 없는 분이시군요.”
삼랑은 혀를 차긴 했으나 그녀의 낯엔 동정이나 안타까움이 스치진 않았다. 단지 곤륜파 조사 보고서에 이 내용도 포함해야겠다고 건조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예결과 삼랑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예결이 대행으로 내세운 상단 측 책임자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고명하신 분들께서 이리 와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상행 호위에 세 문파가 달라붙었으니 일을 나눠야 했기 때문이다.
“옥형문과 익선문, 그리고 사천당가에서 오신 무인께서는 어느 위치에 서실지 말씀해 주십시오.”
“당가는 척후를 맡겠습니다.”
사천당가의 무인을 이끄는 건 이번에도 당언보였다. 예결은 새삼 당서악이 협상 자리에만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
“매복과 함정에 일가견이 있는 당가의 무인이 척후로 나서준다면 안심입니다.”
익선문의 제자가 간은 물론이고 쓸개까지 빼줄 것 같은 낯으로 아첨했다. 순간 장내의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물론 사천당가가 독과 암기를 다루는 가문인 만큼 제갈세가 정도는 아니더라도 함정을 잘 알아보는 건 맞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바로 이전 상행 호위 당시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야말로 처참하게 실패한 아부였다.
당언보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고개를 까딱하고 물러났다.
“그럼 저희는 후방을 맡지요.”
수가 몇 없던 익선문은 눈치를 보다가 냉큼 상행의 후미를 맡겠노라 선언했다.
“옥형문은 상행을 지키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옥형문이 입을 열었다.
“사천당가가 척후, 옥형문이 본 상행을, 그리고 익선문이 후미를 맡게 된 것으로 결정되었군요. 일다경 후에 출발할 테니 다들 준비해 주십시오.”
그 말과 함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결은 마차의 창을 가리는 천을 내려버린 뒤 편하게 몸을 눕혔다.
머잖아 닥쳐올 비포장도로 롤러코스터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나 잘 거니까 깨우지 말고. 뱀뱀이 물은 꼭 챙겨주고.”
옷을 둘둘 말아 만들어놓은 간이 쿠션에 머리를 댄 예결이 한쪽 눈만 뜬 채로 신신당부했다. 제 이름이 들리자 뱀뱀이가 소매에서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네에.”
삼랑은 부럽다는 시선으로 예결을 바라보다가 뱀뱀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뱀뱀이는 슬금슬금 예결의 옷자락 아래로 돌아가 몸을 숨겨버렸다.
킥킥 웃은 예결은 뱀뱀이가 든 손을 가슴께로 끌어당긴 뒤 눈을 꼭 감았다.
금세 긴장을 풀고 잠든 예결은 상행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시선이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출발한다!”
멀어지는 상행 뒤로 흙구름이 일었다. 청해상단의 장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선 당서악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저들은 참혹한 실패를 겪게 되리라.
***
“도착이야?”
마차가 멈추자마자 예결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삼랑은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마차가 멈추기 전까지 한 번을 안 깨고 주무십니까?”
안 깨는 정도가 아니라 자는 중에 어떻게 중심을 잡고 있는 건지 바닥에 굴러떨어지는 법이 없다.
요 며칠 내내 예결이 보여주는 기예에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멀미가 심해서.”
가이드를 못 만난 에스퍼는 일반인 수준의 쾌적함조차 누리지 못한다. 지나치게 예민한 감각 때문이다.
환청에 두통이 원 플러스 원으로 따라오고 차를 타면 멀미가 서비스다.
능력을 사용하기도 전에 봉인한 예결이 그랬으니 다른 에스퍼 사정은 말할 것도 없다.
“어릴 적 항주에서 중원을 가로질러 곤륜까지 갈 때는 괜찮았던 거 같은데…….”
예결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에스퍼로 태어난 건 득보다 실이 많았다.
가만 귀를 기울이던 삼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 대체 어쩌다가 중원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가게 된 거예요?”
“……글쎄, 대사형 만나러?”
“농은 거두시고.”
“진심인데.”
예결은 말을 돌렸다.
“그래서 도착이야?”
창가의 천을 쓱 들어 올리려는데 삼랑이 그의 손을 제지했다.
“드디어 장강으로 접어들었어요. 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결국 배도 타는군.”
한국에서 배를 타본 적은 없던 예결이 혀를 찼다.
차만 타도 멀미하는 처지에 뱃멀미까지 섭렵하고 싶지 않아서 기를 쓰고 물가를 피해 다녔다.
“아무래도 이편이 빠르니까요.”
사천에서 중경까지는 말을 타고 나흘에서 닷새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다. 장강을 만나면 아예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게 훨씬 빨랐기에 운수업이 발달해 있었다.
그러나 산에 녹림이 있듯, 강에는 수적이 있었다. 특히 중원을 가로지르는 가장 큰 강인 장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수적들은 대대로 장강수로맹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장강의 수적을 만나면 건넬 통행료는 따로 준비해 두었으나 상단주님의 신분을 들키면 몸값을 요구할지도 모르니 앞으로는 주의하셔야 해요.”
예결은 삼랑의 짤막한 경고를 귀담아들었다.
“알겠어.”
목숨을 위협당하는 게 아닌 이상 물 위에서 힘을 쓰는 건 최대한 자제할 생각이었다. 원래도 피아를 가리기 힘든 힘인데 물을 만나면 전류의 범위를 통제하기 힘들어진다.
“당서악이 장강수로맹이 기승이라 하던데, 둘이 손이라도 잡았을까?”
“글쎄요.”
삼랑이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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