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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40화 (40/203)

40화. 남궁운 (5)

예결은 옷을 갈아입은 뒤 마차에서 내렸다. 얼굴에 확 와 닿는 물 냄새에 눈을 빛냈다.

“비린내가 하나도 안 나네.”

“물비린내 말씀입니까?”

삼랑의 말에 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민한 후각 탓에 조금만 강한 냄새도 악취로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기가 매캐하지도 않고 뺨에 와 닿는 햇빛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뜨겁지도 않다. 두통도 느껴지지 않았으며 무거운 짐을 옮기는 이들의 기합 소리는 경쾌하게까지 들렸다.

쾌적하다.

‘이게 보통 사람의 감각이지.’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예결은 전생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스퍼로 태어난 뒤의 예결은 항상 불로 달군 철판 위를 걷는 기분으로 살았다.

“장강의 물은 고여 있지 않으니까요.”

삼랑은 도도한 물결 너머로 흘깃 시선을 던졌다.

숙소에 도착할 때가 아니고서야 마차에서 나오는 일이 없는 예결이 등장하자 자연스럽게 주위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특히 익선문에서 온 이가 다가오려는 눈치였지만 예결은 슬쩍 삼랑을 앞으로 내세운 채 나루터의 풍광을 눈에 담았다.

분주한 가운데 녹의를 입은 무인들이 유독 도드라졌다. 사천당가의 당언보가 그들이 짐을 싣고 있는 배보다 더 자그마한 나룻배에 인원을 나눠 오르고 있었다.

“당가는 먼저 출발한다고 합니다. 미리 수적이 자주 나타나는 쪽을 둘러보겠다더군요. 대신 만약을 위해 깃발을 건네줬습니다.”

전음으로 상황을 파악한 건지 삼랑이 조용히 보고했다. 비록 사천을 벗어났다곤 하나 사천당가의 녹색 깃발을 보면 어지간한 무뢰배는 설설 피해 다닐 것이다.

“열심이네.”

“어떻게든 공을 세워야 하니까요.”

엉덩이 무거운 오대세가의 일원이 대뜸 척후를 맡겠다는 이유는 뻔했다. 당언보는 어떻게든 지난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다.

“그나저나, 삼랑은 왜 이렇게 죽상이야?”

“배는 퇴로 확보가 어려우니까요.”

무슨 퇴로 타령을 하나 했는데 삼랑의 낯은 진지했다. 예결은 대충 직업병이라고 이해했다.

전생에는 호위무사가 멋져 보이기만 했는데 지금 보니 퍽 까다로운 직업인 모양이다.

“하긴. 물 위에서는 날고 기는 고수라도 수적을 당해내긴 힘들다지.”

그리 말하는 예결의 낯은 태평하기만 했다. 일이 잘못 돌아가도 저 한 몸 지킬 자신은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우리도 슬슬 배에 오를까.”

“정말 겁이라는 게 없으시군요.”

삼랑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결은 발판을 딛고 성큼성큼 배에 올랐다.

“출발하겠습니다.”

수부(水夫)의 우렁우렁한 외침과 함께 배가 나루터를 떠났다.

뱃전에 나온 예결은 놀러 나온 아이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뺨은 기대로 상기되어 있었다. 배가 출발했는데도 지나치게 멀쩡해 보이는 호위 대상의 모습에 삼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멀미 심하다면서요?”

“심할 줄 알았지.”

예결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사실 장강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멀미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제하량과 몸을 섞은 것도 아니고 고작 손 좀 잡고 덥석덥석 안긴 게 전부인데 몸 상태가 이렇게나 달라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슬슬 들어가시는 게 좋을 텐데.”

“조금만. 정말 조금이면 되니까.”

어차피 예결도 계속 여기에서 버틸 생각은 없었다. 뱀뱀이가 소매 안에만 있으면 갑갑할 테니 밖에 나와서 놀 시간도 충분히 챙겨줘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삼랑이 이리 채근하는 것도 수적 조심하라는 경고의 연장선일 테니 그녀의 말을 따르는 게 좋으리라.

하지만 좀 더 여기에 머무르고 싶었다.

강가를 따라 난 억새가 바람을 타며 흔들흔들 춤을 췄다. 그 사이로 햇빛을 받은 수면이 반짝반짝 빛났다. 높고 넓은 돛은 장강을 누비며 입은 세월을 한껏 자랑하듯 펄럭였다. 그 위로 당가의 녹색 깃발이 부드럽게 나부끼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예결은 눈을 감았다.

갑판을 오가는 선원들의 발아래로는 나무가 삐걱대는 소리와 물결을 헤치고 나아가는 배의 소리가 났고, 먼 데서 들리는 새의 지저귐과 떠들썩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람결 사이로 스며들었다.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원래 제 것이었던 삶을 돌려받은 기분이었다. 새롭게 태어난 감각이 선사하는 기쁨은 예결에게 이 자리에 없는 이를 떠올리게 했다.

‘대사형.’

사천이나 청해에 있을 제하량이 보고 싶어 가슴이 수런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통 아름다워 보이던 풍광이 시들시들하게 느껴졌다.

“이제 들어가자.”

아쉬움을 걷어낸 예결은 못 박힌 듯 멈춰 있던 걸음을 뗐다. 그를 재촉하듯 따라붙는 삼랑의 뒤로 몇몇 이들의 시선이 머물렀다가 이내 흩어졌다.

선실에 들어온 예결은 삼랑이 가져온 수반에 뱀뱀이를 풀어줬다. 예결이 불러낼 때까지 소매 안에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뱀뱀이는 그를 힐끗 올려다보더니 물속으로 스르륵 들어갔다.

만족스러울 때까지 헤엄쳐 다니던 뱀뱀이가 꼬리로 수면을 두드렸다. 그 여파로 손등이 젖은 예결은 뱀뱀이가 하는 양에 픽 웃으며 손을 내밀어 뱀뱀이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좋아라 하며 고개를 뒤로 젖히며 분홍 혀를 날름대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필요에 의해 데려왔지만 갈수록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이 들고 있었다.

한동안 반려영물의 물놀이에 어울려준 예결은 삼랑이 건네준 영견을 받아서 손을 닦았다. 뱀뱀이가 자신이 닦아 주겠다는 양 혀로 할짝거렸지만, 솔직히 말해서 귀엽기만 하고 도움은 하나도 안 됐다.

“아직까진 수적의 등장도 없고 이동도 순조롭습니다.”

“다행이네. 척후로 나선 당가는 여전히 소식이 없고?”

“예. 무슨 일이 있으면 신호탄을 쓰겠다고 했는데 아직까진 잠잠합니다.”

“음. 이번엔 별 이변이 없으려는 모양이네.”

뱀뱀이가 몸을 부르르 떠는 걸 지켜보다가 비늘의 물기를 닦아주니 기다렸다는 듯 예결의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서늘한 감촉에 뱀뱀이의 머리를 소매 밑으로 쓰다듬어 주고 있으니 삼랑이 물었다.

“안 나가 보십니까?”

아까만 해도 예결은 태어나서 겨울을 처음 만난 강아지 같았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대사형이랑 다시 올래.”

심드렁한 어투였다.

참 묘한 사형제지간이라 생각하며 삼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때였다.

쿵!

배가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선체가 한 차례 흔들렸다. 예결의 몸이 살짝 휘청했으나 삼랑이 부축의 손길을 내밀기도 전에 균형을 잡았다.

“습격이다!”

“수적이다!”

“오.”

밖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예결은 긴장감 없는 탄성을 내뱉었다. 삼랑은 그런 예결을 자신의 뒤로 밀어내며 문가로 다가갔다. 외부의 소요에 귀를 기울이는지 그녀의 눈매가 날카로웠다.

“보아하니 습격한 이들의 규모가 크진 않군요.”

“합류할 거야?”

“아뇨.”

삼랑은 예결을 몇 없는 선실 안쪽으로 집어넣으며 덧붙였다.

“제 실력은 최대한 숨길 작정입니다. 다른 이들이 활약하게 두지요.”

천장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예결은 고개를 까딱였다. 애초에 그러려고 데려온 옥형문과 익선문의 제자들이다.

“재미있네.”

예결의 눈이 샐쭉 휘어졌다. 척후로 나선 사천당가가 놀고만 있진 않았을 텐데 습격이라니.

‘장강은 넓고 수적은 교활하니 무인만 탄 사천당가의 배를 무시했다든가.’

저들이 들고나올 변명을 미리 상상해보며 예결은 소란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나가도 될 듯합니다.”

삼랑의 말에 예결은 그녀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갑판에 오르니 수적으로 보이는 이들이 한쪽에 묶여 있는 게 보였다.

옥형문도가 그들을 둘러싼 채 경계하는 중이었고 선원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배를 다시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음.”

예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위화감이 느껴지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사망자가 한 명도 없군요.”

익선문도가 한 쪽에서 팔에 붕대를 감고 있긴 했으나 죽은 이는 보이지 않았다. 수적들도 치명상을 입은 자는 보이지 않았다.

“살리는 게 죽이기보다 더 어려울 텐데.”

제압보다 살인이 더 쉽다.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게 아닌 이상 살리려는 자는 싸우려는 자를 이길 수 없고, 싸우려는 자는 죽이려는 자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전원 무사하여 다행입니다.”

삼랑이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상단의 책임자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옥형문에서 정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습격으로 놀랐는지 희게 질린 낯을 하고도 목소리만은 그렇게 우렁찰 수가 없었다.

“갑판을 거닐던 중이었는데 웬 갈고리가 발목을 휘감고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려 하더군요. 순간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데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이대로 죽는구나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옥형문의 영웅께서 달려와 갈고리에 이어진 끈을 귀신같이 잘라내지 뭡니까?”

생생한 묘사에 배의 바닥을 둘러보니 정말 갈고리가 바닥에 던져져 있었다. 빛이 반사되는 걸 막기 위해서인지 뭔가 검게 칠도 되어 있어서 방심한 순간 사람을 끌고 가기 딱 좋아 보였다.

“그러더니 선원이나 상단의 일꾼 같은 비전투원을 배의 중심으로 모으시더군요. 자칫 난전이 일어나 큰 희생이 일어날 뻔했는데, 옥형문에서 저희를 빙 둘러싼 채 수적들을 상대했습니다.”

예결은 흥미로운 낯으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 목숨이나 파리 목숨이나 비슷비슷한 강호에서 제 한 몸 건사하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픽픽 죽어나가기 십상이다. 한데 그런 이들을 우선하여 보호하다니, 옥형문이 괜히 아미파의 속가가 아닌 눈치였다.

“만약 옥형문의 영웅들이 아니었다면 이번 상행은 큰 손해를 입었을 겁니다”

남자의 눈은 별처럼 초롱초롱했다.

‘아. 이거 그거네.’

예결은 어딘지 모르게 기시감이 느껴지는 시선의 정체를 깨달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영화 주인공을 만난 아이의 눈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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