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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41화 (41/203)

41화. 남궁운 (6)

익선문은 아예 언급되지도 않았다.

“직접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은데.”

삼랑만 앞에 내세우던 예결이 불쑥 입을 열었다. 상단 책임자가 삼랑의 눈치를 봤으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적이 묶여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에 계십니다.”

호기심 어린 예결의 시선이 옥형문도 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한참 무언가를 논의하는 중이었다. 흰옷을 차려입은 옥형문도 사이에 교묘하게 가려진 인물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주변에서 명령에 순응하듯 움직이는 게 보였다.

분명 옥형문도를 이끄는 이는 따로 인사를 받았는데, 정작 분위기를 주도하는 건 저 사내였다.

‘삼랑이 말한 특별한 손님인가?’

유독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데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더 눈길을 끌었다.

“저분입니다. 가장 먼저 갈고리가 등장한 걸 알아채고 그야말로 표홀한 움직임으로 갑판을 내달리며 그 줄을 전부 끊어내 배에 오르려 하던 수적들을 막았지요.”

이런 증언이 아니더라도 단연 눈에 띄었다. 예결이 채 시선을 끊어내기도 전에 상대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죽립의 그늘 아래로 드러난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게 보였다.

‘하관도 잘생겼네.’

못 본 척 시침 떼기도 늦었다. 그러나 원체 뻔뻔한 예결은 성큼성큼 고개를 옮겼다.

“상단 사람들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림인이 아닌 척하기 위해 포권 대신 고개를 숙였다. 고작 달포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살아서 오히려 이쪽이 더 익숙했다.

“이렇게까지 인사받을 일은 아닙니다. 옥형문은 그저 계약한 바를 수행했을 뿐이니까요.”

옥형문도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가 예결을 만류했다.

예결의 정확한 정체는 몰라도 상단의 책임자라고 나선 이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건 알아챘는지 저쪽의 태도가 참 공손했다.

“지난 상행이 수포가 된 일에 이어 여기에서 수적들에게 또 물건을 탈취당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부러 괴로운 목소리를 낸 예결은 정확히 죽립을 쓴 사내를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상단의 행수를 구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귀인의 존성대명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운이라 합니다.”

예결이 생각한 것보다 빠르게 답이 돌아왔다.

성은 뚝 떼고 이름만 한 자 던져주긴 했으나 예결은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운 대협이셨군요.”

어차피 삼랑은 이미 들었겠지만 예결은 일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이번에 배가 멈추면 상단의 은인께 술이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개인적인 사정으로 술은 마시지 않고 있습니다. 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예결은 입매를 부드럽게 끌어 올려 정중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아쉽군요.”

“공자님, 들어가셔야지요.”

삼랑이 넌지시 그를 불렀다. 고작 이름자 하나 알아냈을 뿐인데 저를 불러내는 삼랑의 조바심에 예결은 괜히 미적거렸다.

“공자님.”

슬쩍 엄해지는 음성에 예결은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는 시늉을 하다가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내 호위가 방금 전의 습격으로 조바심이 생긴 듯하니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다음에 꼭 이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세요.”

“그럼 다음에.”

은근한 기약을 남기고 돌아오자 삼랑이 예결을 거의 이끌다시피 데리고 선실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고도 그녀는 한참이나 밖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다가 몸을 돌렸다.

예결과 시선이 마주친 삼랑은 흠칫했다. 질질 끌고 와서 화라도 낼 줄 알았는데 예결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뭐야. 누군데 그렇게 다급히 불렀어?”

삼랑의 입술이 떨어질락 말락 움찔거렸다. 예결은 가뭄에 하늘만 쳐다보는 농부처럼 그녀를 바라봤다.

“……아직은 짐작뿐입니다. 좀 더 확실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작 이름자 하나로 정체를 짐작해서 나를 들어가게 해놓곤 짐작뿐이라니.”

여 들으라는 듯 투덜거리자 삼랑이 눈치를 살피다가 덧붙였다.

“혹시 모르니 뱀뱀이 비늘 하나 안 보이게 잘 숨기십시오.”

“그거야 항상 조심하고 있지.”

“방금 만난 그 사내 앞에서는 절대로 내보이시면 안 됩니다.”

“알았어.”

예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너른 중원에서 예결이 비빌 언덕이라곤 제하량뿐이었다. 그런 제하량이 붙여준 삼랑이 온몸의 비늘이 다 곤두선 뱀처럼 소스라치게 놀라서 하지 말라는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나저나, 운. 운이라…….

예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너른 중원에 운이라는 이름자가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어째 기시감이 들었다.

호기심과 경계심이 설왕설래 뒤섞여 예결의 안에 똬리를 틀었다.

***

장강을 따라 배가 흘러가는 동안 수적의 자잘한 습격이 이어졌다.

“아무리 수적이 기승이라지만 습격이 너무 잦은데?”

또 선실에 틀어박히게 된 예결이 눈살을 찌푸리자 삼랑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척후로 나선 사천당가가 전서구를 날렸습니다. 그쪽을 습격한 수적을 사로잡아 추궁해보니 서역에서 들여온 귀한 물건을 옮긴다는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이상하네. 어디에서 그런 말이 샜을까.”

당가를 통해 날려 먹은 먼젓번 상행에 비하면 그리 대단치 않은 물건을 나르는 중이었다.

“누가 작심하고 상행을 망치려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삼랑의 말에 예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익선문하고 옥형문 끌어들일 때부터 이미 예감했지. 근데 습격 규모가 너무 고만고만하잖아.”

예결이 고개를 까딱였다. 저번처럼 물품이 전부 탈취당하거나 상행에 나선 상단의 일꾼들 모두가 인질로 잡히는 수준의 불상사가 일어나기엔 수적들의 수준이 너무 낮았다.

당연히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았고 심한 부상을 입은 이도 없다. 대신 수적들은 잡히겠다 싶으면 전력으로 내뺐다.

“글쎄요.”

예결의 말에 삼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새삼 그가 모시게 된 공자가 영악한 편이긴 해도 무림에서의 경험이 많지 않다는 게 실감이 났다.

“최초의 습격은 제법 규모가 컸지요. 하지만 습격에 실패하자 놈들은 수를 줄이되 더 자주 덤비고 있습니다. 이쪽은 물건과 사람을 지켜야 하니 놈들을 끝까지 추적할 수 없고……. 이를 이용해서 치고 빠지는 전략을 택한 눈치입니다.”

“아, 그럼 무인들이 긴장을 풀 수 없겠네.”

은근히 단서를 늘어놓는 삼랑의 말에 예결은 금세 이해했다.

“예. 아무리 대단한 체력과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사람인 이상 언젠가는 지치기 마련입니다. 저 수적들을 부리는 누군가가 그때를 노리는 게 아닐까요?”

“역시 삼랑이 비열한 수작은 잘 아네.”

예결은 물개박수를 쳤다.

전생에는 강호에 데뷔하기도 전에 곤륜산에서 죽었고 이번 생에는 능력의 봉인을 풀고 실습 나가기도 전에 중원에 떨어져서 이런 전략 전술은 잘 몰랐다.

“별말씀을.”

일말의 비꼼도 없는 순수한 찬사에 삼랑이 방긋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예결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이거 몰이 당하는 거 같은데.’

수적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배가 몇 번이나 방향을 바꿨다. 잦은 습격에 지친 자도, 연이은 승리에 방심한 자도 많이 생겼을 터다.

뭐, 여차하면 예결 하나 데리고 피신하는 건 일도 아니었기에 삼랑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이제 위쪽도 정리된 거 같으니 올라가 볼래.”

배를 타고 이동하는 건 지루한 일이었다. 21세기의 호화로운 유람선도 아니고 짐 나르는 용도의 상선인지라 선실에는 창문조차 없다.

예결의 갑갑한 마음을 이해하는지 삼랑은 조용히 따라붙었다. 갑판 위에 오르자 어느새 물안개가 자욱이 피어올라 있었다.

‘습하네.’

혹시 모를 충돌을 대비하기 위함인지 배의 속도가 느려진 상태였다. 옥형문도 두엇이 난간에 몸을 기댄 채 휴식하는 게 보였다. 습격 직후라 항상 똘똘 뭉쳐 있던 이들이 흩어진 모양이었다.

삼랑이 쫓아오거나 말거나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살랑살랑 걸음을 옮기던 예결은 멈칫했다.

선미에 홀로 서 있는 운이 보였다. 그는 물안개 너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안 보일 거 같은데.’

무림인의 눈이 밝긴 해도 저런 안개까지 뚫긴 어렵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운은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예결이 와 있다는 걸 알아챘는지 침착한 투로 답했다.

“물안개가 갑자기 자욱하게 끼는 모습이 신비로워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상단 인물을 상대로도 참 정중한 어투였다. 마냥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라기엔 입매가 굳어 있었다.

“장강은 처음 오시나요?”

“종종 다녀간 적이 있지만 이렇게 물 위에서의 전투를 겪은 건 처음입니다.”

삼랑조차 극찬한 실력자에 수적 여럿이 달라붙어도 침착하게 손을 쓰기에 그가 노회한 강호인일 거라고 생각했던 예결은 조금 놀랐다.

“많이 피곤하셨겠군요.”

잠시 주저하던 예결이 덧붙였다.

“잠시 여유가 생겼으니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눈이라도 붙인다든가.”

평소의 그답지 않은 상냥함이었다. 사실상 제하량을 배제한 나머지 인류를 대하는 태도 중에서는 최고로 예의를 지킨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운을 보면 자꾸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절제된 기도, 빼어난 무공, 무림인도 아닌 상가의 인물을 향한 정중한 태도. 그리고 젊은 나이.

이 모든 게 제하량을 연상시켰다.

정확히는 아직 후기지수였던 시절의 대사형을 말이다.

‘왠지 기시감이 들더라니. 이거 때문이었나?’

예결이 혀를 찼다.

“글쎄요.”

운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제 생각에 수적들이 배를 치고자 하자면 지금일 겁니다.”

쾅!

배가 크게 흔들렸다. 예결이 휘청거리자 뒤를 조용히 따르던 삼랑이 나서기도 전에 운이 그의 허리를 붙잡고 지탱했다.

“조심!”

“헉.”

운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린 예결은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가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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