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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42화 (42/203)

42화. 남궁운 (7)

“괜찮습니까?”

갑자기 넋을 놓은 예결이 이상했는지 운이 채근하듯 물었다. 예결을 부축하면서 죽립이 뒤로 넘어가 드러난 그의 얼굴은 잘난 하관을 보고 상상한 것보다 더 훤칠했다.

운은 실로 그 태도만큼이나 온화한 인상의 미공자였다.

잠시 버벅거렸던 예결은 빠르게 제 두 다리로 일어섰다. 일부러 운 쪽은 보지도 않은 채였다.

대사형에게 비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한국에서 만나본 그 어떤 가이드보다도 강렬한 가이딩이었다.

‘어째 이 동네 가이드들은 다 가이딩 조절을 못 한담?’

어느새 다가온 삼랑은 예결을 보호하듯 제 뒤로 밀어냈다. 고의인지 아닌지 몰라도 운과 예결 사이에 벽처럼 솟아난 그녀가 입을 열고 외쳤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수적들이!”

쾅 하고 배를 들이박은 건 크기가 거의 열 배는 되어 보이는 전투선이었다. 물안개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 뱃머리에는 용의 머리……, 아니지. 입에 여의주가 없으니 뱀의 머리일 것이다.

나무로 조각하고 검게 칠한 이무기는 하늘에 오르지 못한 분노를 내보이듯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뱀뱀이와 동족이라고는 믿기 싫을 정도다.

태평한 감상도 잠시, 장강에서 오래 수부 노릇을 했다던 한 선원이 그 조각을 알아본 순간 비명을 질렀다.

“교룡선! 교룡선이다! 교룡왕의 행차다!”

“아니, 장강수로연맹의 맹주가 왜 여기에?”

혼비백산한 선원들은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털썩 주저앉고 있었다.

“우린 다 죽었어…….”

짙은 절망이 뱃사람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옥형문도는 전원 검을 들라!”

그때 운이 전면으로 나섰다. 검은 파도처럼 난간을 타고 넘어오는 수적들을 가장 앞장서서 맞이하는 이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부연 안개 속에서도 검광이 번뜩였다.

뭔가 반짝이는 게 운의 검을 휘감고 있었다.

‘검기인가?’

희고 푸른 것이 노랗기도 하여 마치 번개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남궁세가의 심법이 뇌전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강호의 풍문이 떠올랐다.

전투가 시작된 이래 운은 처음으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움직였다. 자비 없이 뻗어나가는 운의 검 끝이 번쩍일 때마다 붉은 피가 튀었다. 그러나 운의 손은 망설임이나 떨림 없이 날카로운 검의 궤적을 그려냈다.

두 번째 가이드를 마주친 탓에 계속 긴장하고 있던 예결은 삼랑이 혀를 끌끌 차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선원들은 정신을 차리고 교룡선과 최대한 거리를 벌릴 준비를 해라! 싸울 수 있는 자는 무기를 들고, 민간인은 선실로!”

저쪽에서 먼저 들이박았는데 쉽게 떨어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예결은 선뜻 입을 열어 외쳤다.

“배에 적치한 물건을 버려도 좋으니 속도를 높이시오!”

운의 선창에 예결이 답하듯 이어 외치자 분주하게 움직이던 선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짐 좀 버린다고 따돌릴 수 있었다면 어찌 교룡선이라 불리겠습니까?”

누군가는 투덜거렸으나 다른 이들이 걸음을 재게 놀려 물건을 장강에 집어 던졌다. 예결은 일부러 귀한 물건이 담긴 상자를 열고 그걸 여봐란듯이 장강에 내던졌다.

까마귀가 빛나는 것을 찾듯, 값진 것을 약탈하는 것이 수적의 습성인지라 몇몇이 첨벙첨벙 물에 뛰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문 공자님. 뒤로 물러나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왜?”

“교룡선의 주인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요.”

삼랑의 말에 답하듯, 휘리릭! 하고 무언가가 그녀와 예결의 사이를 가르며 눈앞을 지나갔다. 검은 사슬 같은 게 돛을 찢어발기며 그 아래에 걸어놓은 당가의 녹색 깃발까지 바닥에 처박혔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갑판이 부서졌다.

예결은 그제야 검게 칠한 밧줄과 그 끝에 매달린 녹슨 닻을 볼 수 있었다. 척 보기에도 진짜 배를 정박하는 데 쓰였을 것 같은 묵직한 쇳덩이였다.

‘무슨 저런 걸 공깃돌처럼 다룬담?’

정말 한 뼘 차이로 얼굴 앞을 지나갔다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이었다.

밧줄이 뻗어 나온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검은 배의 난간을 밟은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시원하게 드러낸 두 팔 중 한쪽에서 둔탁한 광택이 느껴졌다.

‘의수인가?’

“나와라!”

살고자 타오르던 이들의 숨으로 뜨거워진 대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교룡왕이다.

“나와라! 쥐새끼처럼 어디 숨어 있느냐!”

내공을 담아 우렁우렁하게 퍼지는 외침에 예결의 골이 지끈거렸다.

교룡삭의 끝을 쥐고 휘두르니 그 끝에 매달린 닻이 돛대에 박혔다. 장정 서넛이 함께 끌어안아야 할 정도로 큰 기둥이 움푹 패어 쓰러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교룡삭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다루다니, 정말로 교룡왕이로구나…….”

예결은 저 검게 칠한 밧줄이 교룡삭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교룡왕인가 했더니, 교룡삭에서 별호를 따온 눈치다.

“이렇게 재수가 없을 줄이야.”

돛이 찢어지고 돛대가 무너졌으니 안 그래도 빠른 교룡선과 거리를 벌릴 방도가 없어진 셈이다.

“당서악!”

교룡왕의 외침에 예결이 눈을 끔벅였다.

그 이름이 왜 여기에서 나와?

한참 벗어날 방도를 궁리하던 예결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술자리에서 수적이 기승이라며 다른 두 문파도 함께 상행에 나설 것을 권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당서악의 명령을 듣는 사천당가는 척후를 보겠다고 자진해서 나섰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배에 걸고 다니라며 사천당가의 녹색 깃발을 내주기까지 했다.

다시 보니 이 모든 게 교룡왕을 끌어들여 이번 상행을 망치기 위함이었다.

아니지, 척후랍시고 앞서간 사천당가의 호위대가 돌아와 그들을 구해주는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잘 노는데…….”

예결이 혀를 찼다.

“당서악! 당장 나오지 않는다면 네 책임하에 있는 이들을 한 명씩 산 채로 매달아 물고기 밥으로 줄 것이다!”

교룡삭의 끝에 수부 한 명이 걸려서 질질 끌려갔다. 제 목을 죄는 밧줄에 매달린 채 발을 동동 구르는 낯은 하얗게 질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운이 교룡왕을 향해 뛰어들었다. 예결은 순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는 줄 알았다.

갓 얼굴이나 튼 사이에 뭐 대단한 정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센터에서 반쯤 세뇌당하다시피 가이드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을 온종일 들은 탓이다.

‘미치겠군.’

이십 년 평생 한 번도 못 본 매칭 가이드가 벌써 두 명이다. 어쩌면 중원은 에스퍼보다 가이드가 많은, 그야말로 낙원과 같은 세계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여기에 에스퍼가 예결 하나라는 거지만.

“놈!”

교룡왕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운을 향해 파리라도 쫓아내듯 교룡삭을 내리쳤다. 운은 이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보법을 전개해 나갔다.

교룡삭의 범위 내에 있으면서도 그 큰 움직임을 파고드는 과감함은 단순히 재능과 노력만으로는 생겨나지 않는 것이었다.

예결은 조바심을 품은 채 운의 등을 지켜봤다.

그 끝에 매달린 이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처음부터 목적이 교룡왕이 아니라 사람을 구조하는 것이었는지 운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려 선원을 끌어안고 바닥에 뒹굴었다.

“정파 냄새가 나는 놈이군.”

교룡삭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운의 몸을 휘감았다. 바닥에 질질 끌려가던 운은 어느 순간 바닥을 짚으며 자신을 묶고 있던 구속에서 벗어났다.

“우리 중에 당서악은 없소!”

중심을 잡고 일어난 운이 외쳤다.

“거짓말 마라. 놈이 이끄는 당가의 척후조가 이 앞을 막 지나갔다.”

그러나 교룡왕은 이미 말이 통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당서악. 상행 중에 몸을 숨기면 내가 지키는 장강을 지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어서 모습을 보여라!”

“아악!”

교룡삭에 휘말린 익선문도의 팔이 기이한 각도로 꺾여서 덜렁거렸다. 깔끔하게 부러진 것 같긴 했으나 당장 치료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게 시발점이라도 된 듯 검을 쥔 이들이 수적과 그들의 중심에 있는 교룡왕에게 달려들었다.

운은 유의미한 타격을 입히진 못했으나 교룡왕이 교룡삭을 넓은 범위에 뻗을 수 없게끔 견제했다. 그가 벌어준 틈을 타고 옥형문도가 춤추듯 움직여 아미의 검을 전개해 나갔다.

그야말로 난전이 따로 없었다.

삼랑은 이 와중에도 예결에게 튀는 나무토막이라든가 눈먼 검 따위를 가볍게 쳐내고 있었다. 다들 살고자 욕망이 절절한 가운데 그녀의 낯만은 지나치게 심드렁해 보여서 기이할 지경이었다.

뭐라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예결은 제 맞은편에 있던 교룡왕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발견했다.

“정파의 협객 나으리들. 부디 멈춰 주셨으면 합니다.”

갑판 아래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운이 피신시켰던 이들이 한 명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목에는 시퍼런 검날이 겨눠져 있었다.

예결은 그들을 협박하는 이들의 얼굴을 바로 알아봤다. 일찍이 있었던 전투에서 사로잡은 수적들이었다.

“이, 어떻게…….”

옥형문도 중 한 명의 낯이 파리해졌다.

교룡선이 갑판 위에서 소란을 비우는 틈을 타 수적 중 몇이 몰래 배에 올라 묶어서 가둬놓은 자들을 풀어주고, 피신한 비전투원을 인질로 잡아 올라온 모양이었다.

비열해 보이는 수적이 선원의 목에 박도를 찔러넣으며 눈을 부라렸다.

“검을 놔라. 아니면 이놈의 목숨은 없다.”

운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손에 쥐고 있던 하얀 검을 갑판에 박아넣었다. 수적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족쇄 같은 것을 주렁주렁 채웠다.

‘나서야 하나?’

예결이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어서 원하는 대로 하라는 듯, 뱀뱀이가 예결의 손목에 머리를 비비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천년뇌각망을 내보이시면 안 됩니다! 저자는 남궁세가의 직계 남궁운입니다.]

삼랑의 전음에 예결은 여태 까맣게 잊고 있던 곤륜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남궁세가에서 창궁비연대를 파견했다더군. 원래대로였다면 천년뇌각망이 남궁세가로 들어갔을 테니 열받을 만도 하지.’

바야흐로, 뱀뱀이 주문하신 분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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