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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43화 (43/203)

43화. 남궁운 (8)

남궁운이 두 팔을 늘어뜨리자마자 수적 다섯이 덤벼서 그의 사지를 짓누르고 밧줄로 칭칭 묶었다. 한 놈이 발로 걷어차는데도 신음 한 번 내뱉지 않는 남궁운의 낯은 고요하기만 했다.

흰옷이 구겨지고 진흙으로 엉망이 되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고아해 보였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예결은 흠칫 손을 떨었다.

하필 남궁운이 제하량처럼 가이드라서일까, 지금 그의 모습에 예전의 대사형이 겹쳐 보였다.

곤륜의 하얀 대지 위에 찍히던 제하량의 붉은 발자국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여기가 곤륜이 아니라 장강이라는 사실을 애써 상기하며 예결은 숨을 골랐다.

정신을 차리는 거야 어렵진 않았지만 그냥 지켜만 보고 있자니 뒷맛이 더러웠다.

“전부 묶어라!”

서슬 퍼런 교룡왕의 음성이 갑판에 울려 퍼졌다.

“숨어있는 놈까지 전부!”

가이드의 발견에 이어 상대의 정체까지 알게 된 예결은 수적이 자신에게 성큼 다가왔음에도 살짝 넋을 놓고 있었다.

영특한 뱀뱀이는 수적이 사람들의 손목을 묶는 걸 확인했는지 팔을 타고 슬금슬금 기어올랐다. 때마침 삼랑을 묶은 수적이 예결에게로 다가왔다.

“윽.”

뱀뱀이가 살갗 위를 움직이는 감촉에 간지럼을 느낀 예결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게 수적 탓이라고 생각했는지 삼랑이 전에 없이 싸늘한 시선으로 수적을 노려보며 경고했다.

“조심하시오.”

“예에…….”

수적은 어깨를 살짝 움츠리더니 예결의 손을 조심스럽게 묶었다.

‘포로한테 존댓말을 쓰네?’

기가 이렇게 약한데 수적질이라니, 진로를 잘못 선택한 게 아닌가 싶다.

상대는 예결의 손을 약간 성기게 묶고는 물러났다.

와중에 교룡왕은 선원 한 명을 붙들었다.

이 거리에서 보기에도 정교해 보이는 의수는 빛을 반사하며 둔탁한 광택을 머금었다. 불길한 색이다.

“그래서? 사천당가 것들은 여기에 없다?”

“사…… 사천당가는 척후로 앞서 이동했습니다.”

교룡왕의 손에 머리채가 잡힌 선원이 덜덜 떨며 말했다.

“재미있구나. 사천당가의 깃을 버젓이 내건 채로 장강 위를 누벼 놓고 정작 당가 놈들이 이 배엔 없다니.”

가만히 듣고 있던 교룡왕의 음성이 점점 낮아졌다.

이 자리에서 당가의 무인을 가장 간절히 찾는 이는 인질로 잡힌 선원이 아니라 교룡왕인 것처럼 느껴졌다.

분노가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예결은 교룡왕이 실수로 선원의 머리통을 터트려도 이상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는 아니다. 말 그대로 열받아서 힘 조절에 실패하는 것이다.

남궁운 또한 이를 알아챘는지 얌전히 묶여 있다가 새파랗게 날이 선 눈으로 외쳤다.

“이 갑판 위에서 피를 보겠다면 내 남궁세가의 이름을 걸고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그 말에 교룡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궁세가에 금지옥엽이 있다더니, 아직 강호 물이 덜 들었군.”

주인의 부름에 아양을 떠는 개처럼 교룡왕 휘하의 수적들이 낄낄거렸다.

“아무리 대단한 후기지수라 해도 결국 애송이 아니겠습니까?”

“교룡왕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귀하신 남궁세가 도련님에게 인생이 무언지 알려주겠습니다.”

“너희들은 가서 당가 놈이나 찾아와!”

껄렁껄렁해 보이는 수적이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쏘삭거리자 교룡왕은 대뜸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어이쿠. 우리 두목님 성질도.”

“갑니다. 예. 가요.”

투덜거리면서도 날카로운 눈을 하고 갑판 아래로 사라지는 이들은 정예로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샅샅이 수색해도 당가의 인물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다른 배를 타고 먼저 움직였으니까.

웃음이 자꾸 예결의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 야단이었다.

당서악처럼 야망에 눈이 먼 놈 따위는 한 손에 올려놓고 다룰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런데 장강의 주인이라는 수적에게 미끼로 내던져지고 말았다.

주인의 불편한 심기를 감지한 건지 뱀뱀이가 예결의 팔에서 살짝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예결은 눈을 감았다.

‘아냐. 아직은 아니야.’

S급 에스퍼로 각성했다는 사실이 예결에게서 조심성을 앗아갔다. 상황을 엎는 거야 언제든 가능하지만 이렇게 위기에 처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몸을 낮추고 자만을 뽑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갑판 위에서 탈출 시도를 하는 건 위험하다.’

눈앞에는 교룡왕이 있다. 예결은 아직 절정고수의 반사신경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다.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무림인의 한계를 실험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탈출한다면 인질이 되어 구금된 후가 나았다.

예결이 판단을 내리는 사이 상선을 훑고 온 수적들이 하나둘씩 갑판 위로 돌아왔다.

“당가 놈들만큼 퍼런 건 배 바닥에 낀 이끼가 전부입니다.”

“허 참. 분명 그 독쟁이들이 싸돌아다녔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교룡왕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예결은 눈을 내리깐 채 그녀가 어찌 나올지 지켜봤다.

성격이 급해 보이던데, 화풀이로 이 중 몇을 죽이려나?

예결은 코끝을 찡그리다가 슬쩍 삼랑에게 몸을 붙이며 속삭였다.

“혹시 내가 죽을 위기에 처하면 괜히 구해준다고 몸 던지지 말고 도망가. 알았지?”

능력 숨기자고 황천을 건널 생각은 없다. 만약의 경우 목격자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교룡선을 전기구이 통닭으로 만들 셈이었다. 그때 삼랑이 곁에 있으면 곤란하다.

“생각 좀 해 보고요.”

삼랑이 히죽 웃었다. 그 여유로운 표정에 예결은 눈을 도르륵 굴렸다.

대사형이 호위로 붙여줄 정도로 유능한 삼랑이 수적 따위에게 순순히 묶여준 건 방심을 유도하고 예결을 지키기 위해서일 거다. 그러니 쉽게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건 이미 짐작했다만 너무 태평했다.

‘오히려 남궁운을 더 경계한 거 같은데.’

“포로는 교룡선으로 옮겨라!”

오.

다행스럽게도 불미스러운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거기 너, 이쪽으로!”

“예에.”

삼랑이 건성건성 답하고는 수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남겨진 것이 남자뿐이라는 걸 확인한 예결은 내심 혀를 찼다.

‘내 중원 내비게이션…….’

탈출 시도라도 해 보려면 삼랑이 곁에 있어야 하는데.

예결이 애틋한 시선을 던지자 때마침 고개를 돌려 그를 확인한 삼랑의 낯이 은은하게 썩어들어갔다.

[얌전히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삼랑이 눈앞에서 사라지기 전에 던진 전음에 예결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라!”

저를 잡아끄는 수적의 뒤를 따라 이동한 예결은 교룡선의 지하에 자리 잡은 감옥에 도착해 혀를 내둘렀다. 과연 장강수로맹의 맹주가 이끄는 배답게 포로 수용 시설도 있는 모양이었다.

예결은 녹슨 창살을 지나 가장 안쪽의 방으로 끌려갔다.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밀쳐진 예결은 공포에 사로잡힌 척 내부를 둘러보다가 눈을 끔벅였다.

이럴 거라고 예상하긴 했으나 역시 삼랑은 없었다.

“저기, 나랑 같이 잡혀 온 사람은? 여잔데 키가 한 이 정도 되고…….”

문으로 다가가 묻는데 예결을 밀어 넣었던 수적은 질문에 답하기는커녕 다른 포로를 안쪽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아!”

옆으로 슬쩍 피하려고 했던 예결은 상대의 정체를 깨닫고는 멈칫했다.

‘남궁운……!’

앗, 하는 고작 찰나의 망설임 탓에 예결은 산 채로 깔개가 되어 감옥 룸메이트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신세가 되었다.

손도 묶여 있겠다, 혼자 중심을 잡으려 했다가는 상대가 바닥에 쿵 하고 미끄러질 판이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귀하신 분들끼리 조용히 있으라고.”

예결이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을 보곤 기분 나쁘게 킬킬거린 수적이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남궁운은 저보다 체격이 클뿐더러 단련된 몸이라 상당히 무거웠다.

어떻게 벗어날까, 하며 눈만 데굴데굴 굴리던 예결은 밀착한 자리에서 스멀스멀 흘러들어 오는 가이딩에 기함했다.

차라리 굶주린 맹수와 인간을 한 우리에 집어넣을 것이지 정신 잃은 가이드와 에스퍼를 한 방에 처넣다니!

‘나처럼 센터에서 세뇌당, 아니지. 교양 있는 에스퍼가 흔한 줄 아나.’

“윽.”

이 복잡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픈 척 끙끙거리자 반쯤 기절했던 사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남궁운의 시선은 처음엔 예결을 알아보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곧 자신이 깔고 있는 게 바닥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남궁운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런…….”

시선이 마주치자 남궁운의 민망함을 배려해서인지 눈을 내리까는 예결의 낯에서 어딘지 모를 가련함이 묻어났다.

상행을 나섰다가 창졸간에 교룡왕의 포로 신세가 되었음에도 침착한 태도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탄식을 내뱉는 남궁운의 입술은 터져 있었다. 어디에서 쌈박질이라도 하다가 온 모양새인데 귀공자처럼 느껴지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으십니까?”

일단 질문부터 던져 놓고 잠시 뜸을 들인 예결이 덧붙였다.

“남궁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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