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악연 (1)
그린 듯 단정한 미소가 남궁운의 입가에 머물렀다.
“들켰군요.”
부정하기엔 너무 노골적으로 움직였다는 걸 본인도 아는 모양이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정체를 숨기고 상행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나 거짓말을 한 셈이니 사과드려야겠군요.”
깔끔한 사과에 예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오히려 감사드려야지요. 그토록 의연하게 장강수로맹의 맹주에 맞서 싸우신 덕에 저희가 목숨이나마 건진 것 아니겠습니까.”
말간 낯으로 듣기 좋은 소리만 입에 담는 예결을 가만히 바라보던 남궁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모자란 실력으로 부린 만용을 그리 포장해 주시니 부끄럽습니다.”
아무리 빼어난 실력을 지녔다고는 하나 일개 후기지수가 장강의 주인을 상대로 덤볐으니 만용은 만용이었다.
만약 교룡왕이 조금만 더 잔혹한 성격이었다면 남궁운 때문에 심기가 상했다며 배 위의 모두를 죽여버렸을지도 모른다.
강호란 이렇듯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동네였다.
‘대사형 보고 싶다.’
위기가 코앞에 닥쳐왔음에도 예결은 코를 훌쩍거리며 제하량을 떠올렸다.
삼랑이 말한 대추나무도 확인하러 가야 하는데 언제 사천에 돌아가 흑귀를 만나고 청해에 가서 제하량 본인을 만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창궁비연대가 곧 당도할 겁니다.”
엉망으로 얻어맞은 남궁운이 열심히 예결을 안심시켰다.
제하량이 그리워서 울적해진 거였는데 공포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 모양이다.
“……창궁비연대라면.”
‘분명히 뱀뱀이 잡으러 남궁운이 곤륜까지 데려온 놈들이지.‘
“남궁세가의 정예 부대입니다. 제가 연락해야 하는데 조용하니……. 곧 이변을 알아채고 구하러 올 겁니다.”
지금 이 배에서 가장 비싼 인질임에도 의연한 태도였다.
“남궁 공자는 교룡왕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예결은 부러 어깨를 움츠리며 물었다.
“예. 두렵지 않습니다.”
“……남궁 공자만 믿겠습니다.”
이 배에서 하루라도 빨리 내릴 수 있다면 남궁운이 아니라 지렁이라도 믿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아까 교룡왕과의 일전을 보며 느낀 거지만 남궁운의 성취가 상당했다.
“포로로 끌려왔는데도 말입니까?”
남궁운이 그 반듯한 낯에 미소를 머금은 채 농을 던졌다. 공포에 질렸을 예결을 달래주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남궁 공자가 아니 계셨더라면 그 선원들이 죽었겠지요.”
만약 그들을 구하려 하지 않고 조용히 빠져나갔다면 남궁운은 혼자서라도 살 수 있었으리라.
예결이 관찰하기엔 그랬다.
비록 교룡왕의 관심사가 남궁운이 아니라 사천당가라서 할 수 있는 가정이긴 했지만 채 이립도 되지 않은 후기지수가 장강수로연맹의 맹주를 상대한 건 대단한 일이다.
수적 한 명 한 명은 별 볼 것 없다. 그저 헤엄 잘 치고 강에서 사람들 돈 뜯어먹는 강도다. 그러나 그들이 속한 수채의 채주는 그 일대에서 손꼽는 강자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다.
더 나아가 장강수로맹을 거느린 맹주라면 어떻겠는가?
장강에서 견줄 자 없는 고수만이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을 가진다.
강호 돌아가는 사정을 아는 이라면 교룡왕을 상대로 치명상을 입지 않고 버틴 이가 일개 후기지수였다는 소리에 깜짝 놀랄 것이다. 교룡왕은 어지간한 문파의 장로급 고수 여럿이 합공해도 승산을 장담하기 힘든 강자였기 때문이다.
“만용이라 생각하지 않으시는군요.”
“설령 만용이라 하더라도, 남궁 공자의 연배에 교룡왕을 상대할 수 있는 후기지수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예결은 슬쩍 아부를 곁들였다.
남궁운은 여기에서 죽을 운명이 아니다. 아무리 장강수로맹이라고 해도 남궁세가의 직계를 죽이고 혈채를 치르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남궁운이 지나치게 뛰어났다. 세가의 담벼락에서 벽돌 몇 장 빼 온 걸로는 전쟁이 나지 않지만 대들보를 뽑아가면 당장 전쟁이 벌어지고도 남는다.
“목숨만 건졌을 뿐입니다.”
남궁운이 겸손하게 답했다.
‘역시 남궁세가에서 영약 때려 붓고 벌모세수로 만들어낸 천재인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는 추후 문파를 이끌어나갈 후기지수를 만드는 데 여러모로 공을 들인다. 특히 오대세가는 한국의 교육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투자를 많이 하는 편이다.
갓 태어난 아이의 근골이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하다면 일단 벌모세수부터 시킨다. 외부에서 내공을 불어넣어 혈도의 탁기를 씻어내고 무공에 적합한 몸으로 만드는 거다.
그렇게 몸을 만들면 애가 걷기도 전에 검을 잡는 법을 가르친다.
한국어 배우기도 전에 영어 유치원을 보내는 격이지만 대대로 내려오는 무림세가의 가르침은 이걸 가능케 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나면 돈을 어마어마하게 잡아먹는 영약을 만들어 먹이거나 영단을 구해 복용시키고 강호에 데뷔하기도 전에 단전 가득 내공을 채워 넣는다.
이렇듯 무식한 교육과정을 씹어먹는 천재만이 강호에서 손꼽는 후기지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불패의 입시전략이지.’
참고로 제하량은 여기에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근골은 뛰어났으나 평범한 가문 출신이라 벌모세수 같은 건 꿈도 못 꿨고, 곤륜파가 워낙 청렴한 편인지라 변변한 영약 한 번 쓰지 못했다.
그럼에도 제하량은 무림대회에 나가 우승을 거두고 용봉지회의 우두머리가 됐다. 청해를 위주로 활동했음에도 중원에 그의 이름이 자자하게 울려 퍼지기까지 했으니…….
곤륜이 속한 구파일방은 물론이요 오대세가까지 질투에 몸부림쳤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으며 취침 시간은 최소 8시간, 그리고 학원 문턱도 밟아본 적 없는 수능 만점자.’
용봉지회에 소속된 무림 후기지수가 곤륜까지 찾아와 제하량과 어울렸다. 그야말로 구름 위의 사람들처럼 보였다. 나날이 더해가는 제하량의 명성에 곤륜을 방문하는 이들도 늘었고 그들은 언제나 대사형의 이야기를 했다.
그 시절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벽곡단에서도 고기 맛이 났다.
“그…… 남궁 공자.”
예결이 망설이다가 물었다.
“제가 공자의 손을 어떻게 풀어볼까요?”
“내공을 금제 당한 건 아니니 이 정도는 풀 수 있습니다. 교룡왕도 이 사실을 알 겁니다. 잡아둔 인질만 믿고 이 정도의 구속만 해둔 것이지요. 창궁비연대가 오기 전까지는 이대로 있는 편이 좋습니다.”
사상자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몸을 낮추고 있다는 소리였다.
차분한 목소리에 온화한 표정까지 곁들여지니 절로 믿음이 생겨날 지경이었다. 하나 예결은 남궁운을 믿지 않았다.
척 보기에도 내공이 고갈된 데다 옷깃 아래로 비치는 푸른 멍을 보면 타박상도 잔뜩 입은 채다. 그럼에도 남궁운이 이렇게 이렇게 허세를 부리는 건 본인의 체면을 위해서가 아니다.
함께 갇힌 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지.
예결은 혀를 내둘렀다. 인성까지 반질반질하게 잘 빚어놓은 도자기 같다.
‘정말 대사형 생각나네.’
이쪽은 온화한 느낌의 미남이고 제하량은 차가워 보이는 미남이라는 것만 빼면 형제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센터에서 만난 에스퍼 중에는 가이드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주장하던 인간도 있었다.
예전엔 주접도 그런 주접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예결이 중원에 와서 만난 두 명의 가이드 모두가 선량하고 착하기만 했다.
‘의외로 신빙성이 있는 가설이었나.’
홀로 생각에 골몰하는데 남궁운이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달래듯 말을 꺼냈다.
“너무 그런 시선으로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나약한 인간인지라 다른 이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이러는 것이니까요.”
예결은 자신이 물에 닿으면 녹아내리는 솜사탕처럼 생겼는지 의심이 갔다.
본격적으로 수작을 부리기도 전인데 남궁운의 태도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삼랑이 유난을 떨며 감싸던 모습을 보기라도 한 건가?
“남궁 공자님은 정말 협객이시군요.”
상대가 가이드인지라 예결은 전에 없이 사근사근한 투로 말했다.
솔직히 이건 센터에서 받은 세뇌 교육의 결과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에스퍼들이 피눈물로 써낸 지침서의 첫 장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집 나간 인성 찾아와라.’
가이드 상대로 성질머리 뽐냈다가 후회한 에스퍼들의 눈물만 모아도 태양의 불을 꺼트릴 수 있을 거라나 뭐라나.
적당히 무시하려는 예결을 붙잡고 귀에서 피가 날 때까지 가이드를 상전 모시듯 모시라는 말을 때려 박은 선배 에스퍼들은 주옥같은 명언을 남겼다.
‘무심코 해버린 인성질, 가이드의 진입장벽.’
‘매칭률 바닥인 가이드도 다시 보자.’
‘자나 깨나 싸가지 조심.’
자기들끼리 가이드 존중 표어 공모전 같은 걸 여는 것도 봤다. 하지만 본인이 한 게 제일 낫다고 싸우다가 끝났다.
지침서 공유하고 표어를 짜면 뭘 한단 말인가? 에스퍼의 본질은 짐승 새끼인데.
“그러고 보니 공자의 이름을 묻지 못했군요.”
신랄하기 짝이 없는 예결의 회상 사이로 남궁운의 질문이 흘러들어 왔다.
예결은 선뜻 입을 열었다.
“예결. 문예결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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