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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45화 (45/203)

45화. 악연 (2)

순간 남궁운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그러나 다른 데 정신이 팔렸던 예결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남궁운의 미간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런.”

예결은 앞으로 묶여 있던 손을 뻗어 남궁운의 얼굴을 닦아냈다. 옷에 피가 묻어났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래 타고 있던 배에 금창약이 있을 텐데.”

스스럼없는 예결의 태도에 남궁운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눈앞의 청년은 이상했다.

어떤 식으로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남궁운도 뾰족이 답할 말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남궁이라는 성씨를 듣고도 눈치를 보거나 위축되는 기색이 없다는 것이리라.

이질적이다.

남궁운이 그 감각을 채 곱씹기도 전,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누군가 그들이 갇힌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예결은 남궁운이 반응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다가온다는 걸 알아챘다. 습관적으로 호흡을 숨기고 걸음을 조심하는 삼랑 정도가 아니고서야 그의 오감을 피할 순 없었다.

그러나 평범한 상단주 행세를 하고 있는 중인 만큼, 예결은 남궁운이 고개를 돌린 뒤에야 반응하며 물었다.

“누가 오나요?”

남궁운이 답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고 교룡왕의 옆에서 손을 싹싹 비비던 수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어나.”

본인을 부른 거라 생각한 남궁운은 살짝 비틀거리며 두 다리로 일어섰다. 남궁운이 일어날 때까지 지켜보던 수적은 코웃음을 치더니 이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윽!”

신음을 삼키면서도 남궁운은 살짝 휘청였을 뿐 무너지진 않았다. 저도 모르게 수적에게 발끈했던 예결은 남궁운의 모습에서 무인의 기개를 느꼈다.

“하여간 정파 놈들 꼿꼿하기는.”

한 번 더 걷어찰까 말까 고민하며 입맛을 다시던 놈이 히죽 웃었다.

“남궁세가 공자님은 얌전히 계시지요.”

돌연 공손한 투로 공자님 운운해봤자 조롱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물러나라는 말에도 남궁운은 비키지 않고 묵묵하게 버티고 섰다.

“어쭈?”

예결은 수적의 입매가 비틀리는 걸 확인하는 순간 몸을 날려 남궁운 대신 수적의 발길질을 받아냈다.

크게 휘청한 예결은 남궁운과 달리 바닥으로 무너졌다. 그러나 예결의 입술에서는 신음 한 자락 새어 나오지 않았다.

“문 공자!”

남궁운의 외침에도 돌아보지 않은 예결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질로 잡았다면 몸값이 목적 아닙니까? 남궁 공자님에게 더는 폭력을 행사하지 마십시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인 예결이 장강 바닥에서 수십 년은 굴렀을 험악한 산적 앞에 나서는 모습은 의연하기 그지없었다.

남궁운은 자신과 수적 사이를 가로막은 예결의 등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을 감싸는 예결의 행동은 그에겐 낯설기만 했다.

“따라 나와라.”

혀를 찬 수적이 턱짓했다. 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끌려가서 무슨 일이 있든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가지 마십시오.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걸음을 옮기려다가 붙들린 예결은 남궁운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남궁 공자는 스스로를 돌보세요.”

동네가 동네라 그런가, 무림의 가이드는 몸을 너무 막 쓴다.

내심 혀를 차는데 남궁운의 두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예결은 수적의 뒤를 따라 방 밖으로 나섰다.

문이 닫히려는데, 등 뒤에서 남궁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 공자!”

아, 이름 불러도 된다고 해주는 거 깜빡했다.

***

지키지 못했다.

치 떨리는 무력감에 남궁운의 낯은 침중함으로 물들었다.

좀 더 세상 경험해보고 싶다는 욕망에 창궁비연대와 따로 움직인 것이 후회스러웠다.

애써 의연해지려 해도 자꾸만 제 앞을 감싸던 등이 떠올랐다.

남궁세가의 적자로 태어난 남궁운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위해 몸을 던져왔다.

강호에 나선 이래 남궁운의 협행은 끊이질 않았으나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 자신을 지켜주겠노라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예결, 문예결.”

끌려간 이의 이름을 뇌까리던 남궁운은 아까부터 느꼈던 기시감을 천천히 곱씹었다.

혓바닥 위에 굴려보자니 어색했으나, 분명히 어디에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곧바로 떠오르진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남궁운은 뒤로 넘어갈 듯 붉으락푸르락해진 한 도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도사는 다름 아닌 곤륜의 백양진인이었다.

불과 몇 주 전, 남궁운은 안휘에서 청해까지 한 마두를 추적하는 중이었다.

본가가 자랑하는 창궁비연대까지 이끌고 영단 도둑을 찾기 위해 놈의 행적을 좇아 곤륜산에 올랐다.

백양진인으로부터 영단을 지닌 영물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던 중, 곤륜의 제자가 뛰어 들어와 외쳤다.

‘일대제자 문예결이 의약당에서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습니다!’

문예결.

그래, 분명 그때 들은 이름이다.

제자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백양진인은 노기등등한 낯으로 외쳤다.

‘그 천인공노할 놈이 결국 내 제자를……!’

무량수불을 입에 달고 다니는 도사가 이렇듯 분개하는 건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백양진인은 그 ‘천인공노할 놈’이 누군지 끝까지 말해주지 않으려 들었다. 문파 내의 일이라며 정중히 밀어냈을 뿐이다.

남궁운은 수색에 창궁비연대를 빌려주겠노라 약속하고 문예결이라는 이에 대해 조금 더 알아낼 수 있었다.

‘곤륜혈사가 있기 전, 내 거두어 기르던 제자 중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혈사가 있던 날 마두를 상대로 분투하다가 죽었지. 그런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원시천존께서 그때 그 제자와 꼭 같은 아이를 곤륜으로 이끌어 주었지요. 비록 무공을 익힐 수 없는 체질이었으나 이 또한 인연이라 생각하고 다시금 제자로 맞이하였는데…….’

백양진인이 이를 악물었다.

‘곤륜이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대마두 놈이 내 그 아이를 귀하게 여기는 걸 알고 납치해간 거지요.’

앞뒤가 완전히 맞지는 않았으나 남궁운은 그에게 안타까움을 표하고 약속했던 대로 창궁비연대를 곤륜에 빌려주었다.

일부 호위와 함께 사천으로 향하며 인근 문파의 동태를 살피던 남궁운은 옥형문에 몸을 의탁했다.

슬슬 안휘로 돌아갈까, 하고 고심하던 그는 옥형문이 장강을 따라 움직이는 상단의 호위를 맡았다는 말에 자신도 끼워 달라고 부탁했다. 상행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용봉지회에서 만나 친우가 된 옥형문주의 아들은 남궁운의 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남궁운은 일단 곤륜에서 돌아온 창궁비연대부터 떼어놨다. 그들까지 옥형문도로 가장하는 건 무리였다. 대주에게 거리를 두고 따라오라 명령한 남궁운은 옥형문도 중 한 사람인 것처럼 상행에 합류했다.

장강을 따라 이동하는 상행은 옥형문 말고도 익선문과 사천당가까지 고용했다. 대체 무얼 나르나 했더니 서역에서 들여오는 귀하디귀한 물건이 잔뜩 쌓여 있었다.

남궁세가의 도련님인 남궁운이 보기에도 대단한 사치품이었다.

그러나 금은보화의 번쩍임보다 남궁운의 눈길을 끈 것은 저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흰 얼굴의 청년이었다. 듣기로는 그가 상단의 중책을 맡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마차 밖에서 거의 나오는 법이 없고, 배에 오른 뒤에도 드문드문 갑판 위에 모습을 드러낼 뿐 대체로 선실에서만 지냈다.

수적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남궁운이 문예결에게 받은 인상은 그게 전부였다. 유약해 보이는 상단의 관계자.

한 방에 갇히고 그가 이름을 밝혔을 때 낯익다고만 여기고 깊게 생각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문예결…… 예결.”

그가 정말 백양진인의 제자라면 일반적인 실종이 아니라 납치당한 상태다.

저를 감싸겠다고 나서던 예결의 모습에 느낀 호의에 걱정이 맞물리며 불길한 가정이 하염없이 자라났다.

생각해보면 기척을 알아채기 힘든 여인이 항상 그림자처럼 예결의 뒤를 쫓고 있었다. 처음엔 대단한 호위를 붙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그 여자가 감시역이라면?

남궁운은 수적의 습격 당시 호위가 예결을 거칠게 다루던 모습을 기억했다.

‘교룡왕이 배를 점령하기 전에 인질을 빼돌리려고 했던 게 아닐까.’

지금으로서는 예결의 정확한 정체는 모른다.

그러나 백양진인이 창궁비연대를 빌려 가면서까지 찾고 싶어 했으며, 곤륜파에 악의를 가진 누군가가 일부러 납치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중에도 생면부지의 타인인 남궁운을 감싼, 선한 성정의 청년이기도 했다.

‘왜 상단의 관계자 노릇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예처럼 끌고 다니는 것보다 귀한 사람처럼 포장하는 편이 남들의 이목을 덜 끄는 방법이기도 했다.

‘겉보기엔 상처 같은 건 없었지만 순순히 협력하게 만들려고 무슨 수를 썼을지는 아무도 모르지.’

무림인이 된 이래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잊은 적이 없는데, 가슴이 자꾸만 수런거렸다.

배의 갑판 위에서 스치듯 시선이 마주쳤을 때 본 그 연한 갈색 눈이 남궁운의 뇌리에 맴돌았다.

남궁운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숨을 고른 남궁운은 상념을 가라앉히며 스스로의 정신을 최대한 가다듬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먼 데서 새 우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왔다.

남궁운은 눈을 떴다. 순간 그의 눈동자에 뇌전과 같은 금빛의 기운이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도착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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