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악연 (3)
“이쪽이다.”
수적은 딱딱한 말투로 예결을 이끌었다. 거칠긴 해도 남궁운에게 했던 것처럼 폭력을 쓰는 일은 없었다.
‘정전기 맛 정도는 보여주고 싶었는데.’
가이드, 그것도 묶여 있던 사람을 걷어찼으니 죄질이 나쁜 놈이다.
“대체 교룡왕께서는 왜 이런 비실이를 데려오라 하신 건지…….”
어딜 가나 궁금해서 물어보려는 찰나, 수적이 먼저 목적지를 알려줬다.
‘교룡왕이 나를 보자고 한다고?’
청해상단의 주인이라는 걸 알게 되어 불러낸 걸지도 몰랐다.
교룡왕의 선실 앞에 당도한 수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냉랭한 음성이 들렸다.
“들어와라.”
인기척을 알아챈 교룡왕의 부름이었다.
수적은 눈을 도르륵 굴리더니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너는 물러가도 좋다.”
“예에.”
기강이 잘 잡혀 있는지 수적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몸을 뒤로 뺐다.
문가에 서 있던 예결은 잠시 망설였다.
여기에서 달아나려 시도해봤자 교룡왕의 밧줄에 발목이 휘감겨 끌려들어 갈 게 뻔했다. 그렇다고 해서 에스퍼의 신체 능력을 넘어서는 절대고수의 거처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니 찝찝했다.
‘번개에 지졌을 때 무림인의 반응속도도 실험해봐야 하는데.’
불러낸 포로가 미적거리고 있으니 어서 들어오라 윽박지를 법도 한데 교룡왕은 그저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교룡왕의 고요한 시선에는 살기나 투기, 심지어 욕망마저 배제되어 있었다.
예결은 선실 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살풍경하리라 짐작한 교룡왕의 선실은 생각보다 아늑한 느낌이었다. 유일하게 튀는 게 있다면 벽에 걸린 하얀 백호 가죽이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예결의 눈길이 벽에 멈춘 것을 알아챘는지 교룡왕이 입을 열었다.
“녹림 대별채에서 우호의 징표로 보낸 호피입니다.”
“예……?”
“가죽이 상하지 않게끔 공들여 잡아놓은 걸 징표 명목으로 낚아챈 탓에 녹림왕이 질질 짜던 게 생각나는군요.”
전시회에 온 것도 아닌데 왜 교룡왕이 큐레이터를 자처하는지 알 길이 없어 예결은 혼란스러워졌다.
때마침 가구로 가려져 있던 선실 구석에서 누군가가 성큼 걸어 나왔다.
상대를 발견한 예결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삼랑?”
“아이, 연 매도 참. 설명도 없이 대뜸 불러내면 보통 겁에 질린다고요.”
쓱 다가온 삼랑이 예결의 손을 풀어주었다. 느슨하게 묶어서인지 그리 아프지도 않았는데 인제 보니 밧줄에 살갗이 조금 쓸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붉어진 피부를 본 삼랑의 낯이 울적해졌다.
“제기랄, 비단이라도 찢어서 밧줄 아래 밀어 넣었어야 했나.”
삼랑이 난 죽었다, 하고 혼잣말을 중얼중얼하든 말든 교룡왕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아아. 저 아래 처넣은 인간을 다시 만나본 적이 없어서 그만.”
피 냄새가 진득하게 묻어나오는 발언이었다.
“내 손목은 돌아가기 전까진 나을 것 같으니 제발 상황 설명 좀 해주겠어?”
그 말에 삼랑과 친해 보이던 교룡왕은 성큼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예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교룡왕 연소소가 주군의 은인을 뵙습니다.”
“주군?”
예결의 떨리는 시선이 삼랑에게로 향했다.
‘교룡왕이 대사형 수하라는 거 나한테 까발려도 돼?’
전음을 쓸 순 없으니 떨떠름한 눈빛을 보내는 게 최선이었다.
예결의 필사적인 시선에 삼랑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대사형이…… 교룡왕의 주군이라고? 삼랑, 대사형은 상인 아니었어?”
더는 모르는 척하는 것도 어려워 예결은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투로 물었다. 당혹을 가장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 연결고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연 매……. 이렇게 확 까발리면 문 공자가 놀라신다고. 원래 곤륜파의 문도였다고도 말했잖아.”
“아아. 그 부분은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삼랑이 웃는 낯을 유지한 채 교룡왕을 채근했다.
연 매라니, 예결은 그 친근한 호칭에 입만 뻐끔거리다가 말았다.
“처음 만났을 때 주군은 정파의 협객이었지요.”
정파의 협객이라는 말에 예결은 향수가 새록새록 살아나는 걸 느꼈다.
“당시 저는 일개 채주였지만 정파 애송이 하나 해치우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단지 주군께서 젊은 나이에도 관철하고자 하는 이상이 드높아 어디 얼마나 잘 살아남나 구경하고자 놓아주었습니다.”
“아, 설마……. 그 무림맹 다녀오는 길에 있었던 양강채 사건인가.”
환생하기 전 대사형의 행적을 싹 꿰고 있는 예결의 말에 매서워 보였던 연소소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실로 오랜 인연이라 듣긴 했으나 그 일도 알고 계시는군요.”
“그때 대사형이 크게 다쳤으니까.”
당시의 제하량은 보는 이를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자기 몸이라도 다 잘라 나눠줄 것 같았다.
“송사리 하나 살려 보낸 것에 큰 의미는 두지 않았습니다. 곤륜에서 참변이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저, 그때 살려 보냈던 젊은 영웅이 끝을 맞이했구나 싶었지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군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연소소의 눈이 먼 과거를 더듬어 올라가고 있었다.
“당시의 주군은 예전에 만난 고아한 곤륜의 도사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살기를 품고 있었지요. 호승심이 일어 그와 다시 손을 섞었고 이번에는 호각을 이뤘습니다.”
예결은 눈을 내리깔았다.
수적이야 수채가 사라져도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그만이지만 정파는 이야기가 다르다.
잘 자란 거목의 밑동을 잘라내서 다른 곳에 옮겨심는 것과 비슷하다. 잘 자라고 있던 나무가 뿌리를 잃었으니 결국 말라 죽게 되는 거다.
“백 합을 겨루고도 승부가 나지 않아 계속 싸우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작별을 고했지요. 중원은 넓으니 이 희한한 인연도 끝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가 있더군요.”
교룡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음을 나눈 사내에게 배신당해 죽기 직전까지 몰렸을 때였습니다. 한쪽 팔이 잘렸고 피도 많이 잃은 데다가 추적자까지 따라붙은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지요.”
상대는 교룡삭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던 두 손 중 둔탁한 광택을 발하던 오른손을 내밀었다.
“죽음을 확신한 순간 주군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분께서는 저를 살려주셨고, 이 기물을 건네 무인에게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한 손을 대신할 수 있게 해주셨지요.”
연소소의 낯에 피처럼 붉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날로 그분을 주군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놀라운 인연이긴 하지만 대사형이 장강수로맹의 맹주를 받아 주셨다고……?”
예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놀랍네요.”
실로 놀라웠다.
흑점에서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역할 놀이를 할 때부터 예전의 대사형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아챘지만 무려 교룡왕을 수하로 뒀다니.
교룡왕은 예결이 강제 고용한 녹림채 채주와는 결이 다른 인물이다. 중원의 물자가 드나드는 장강의 수적을 거느린 우두머리 아닌가.
그러나 강호는 무를 가장 큰 가치로 치는 곳이고, 교룡왕이 일개 상인의 수하가 될 리가 없다.
‘협력자라면 또 모를까.’
처음엔 제하량이 흑점의 주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청해상단이며 흑점 사천지부의 흑귀 같은 퍼즐만 손에 쥐고 있을 때 맞춰볼 수 있는 건 딱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예결의 앞에 놓인 퍼즐 판은 그가 처음에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이쯤 되면 언제나 소중하게 가슴속에 품고 다니는 쁘띠 대사형이라도 불러놓고 청문회를 열고 싶었다.
대체 그동안 뭘 어떻게 하면서 살아왔던 거냐고.
교룡왕이 슬쩍 언급한 시간 속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했던 건지도.
“대사형의 수하를 만나게 된 건 이게 네 번째네요. 반가워요. 문예결이라고 합니다.”
악수를 청할 수는 없어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교룡왕이 흥미롭다는 듯 예결을 바라봤다.
“주군의 은인께서는 제가 무섭다거나, 불쾌하지 않으십니까?”
“생면부지의 타인을 판단하기엔 제가 당신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요.”
예전에는 교룡왕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없으니 연소소가 장강수로연맹의 맹주가 된 건 예결이 죽은 후의 일일 것이다.
중원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예결은 교룡왕의 악명 같은 건 하나도 몰랐다.
“그러니 저는 대사형의 안목을 빌려서 판단했을 뿐이에요. 대사형이 수하로 거둔 분이니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판단을 외주 줬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예결을 보며 교룡왕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리 불쾌해 보이진 않았다.
예결은 슬쩍 눈치를 보다가 덧붙였다.
“이제 우린 풀려나는 건가요?”
얼른 사천에 가서 대사형을 만나고 싶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교룡왕이 비죽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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