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악연 (4)
“사천당가 일이겠군요.”
“영명하십니다.”
망설임 없는 아부에 예결은 침침한 눈으로 교룡왕을 쳐다봤다.
‘아니, 당신이 갑판에 오르자마자 사천당가 나오라고 교룡삭을 휘둘렀잖아……. 쉽게 잊혀질 장면은 아니었는데?’
돛과 함께 걸어두었던 녹색 깃발이 땅에 나뒹굴던 모습이 여전히 선명했다.
“이미 짐작하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를 배신한 정인이 바로 사천당가의 사람입니다.”
“당서악. 그래서 당서악을 찾은 거군요.”
예결은 앓는 소리를 냈다. 교룡왕이 대뜸 그 이름을 외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무림은 은원관계에 목숨을 건다. 특히 교룡왕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자신을 배신하고 무인에겐 목숨이나 마찬가지인 팔을 앗아간 이가 제 앞마당에서 설치는데 가만히 둘 리가 없다.
그러니 당서악은 너무도 손쉽게 연소소의 분노를 이용해 본인이 이득을 보는 판을 짠 것이다. 원수의 등장에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뛰어나올 교룡왕을 잘 알 테니까.
“당서악은 당신을 배신해서 뭘 얻었습니까?”
“가주의 신뢰.”
문득 예결은 연소소의 눈에 서글픔이 감돌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감정을 헤아려 보기엔 너무도 순식간에 스쳐 가고 말았다.
실적을 올리겠다고 일개 행수를 데리고 기루에 가던 당서악을 떠올랐다. 그는 본인의 자리를 굳히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당서악은 여기까지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사천의 안전한 곳에서 자신의 계획이 잘 굴러가고 있는지만 확인하겠지요.”
“당언보가 당가의 무인을 이끄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 여자가 당서악의 새 돈줄이니 일단 잡아서 묶어놓으면 놈도 똥줄이 타겠지요.”
교룡왕은 호전적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무 생각 없이 달려온 줄 알았더니, 의외로 사천의 사정이 어떤지, 당서악 주변의 관계도는 어떤지 파악한 뉘앙스다.
“당서악 그 인간은 돈줄씩이나 되는 귀한 사람을 미끼로 내돌렸단 말이야?”
예결이 혀를 내두르자 삼랑이 조용히 답했다.
“당언보 정도 되는 인물이 미끼가 아니라면 연 매가 나서지도 않았겠죠.”
“삼랑의 말이 맞습니다. 당언보가 장강 유역에 나타났다는 걸 목격한 이가 나타난 후에 휘하 수로채를 움직여 배를 습격했으니까요.”
연소소는 지속적인 습격의 배후가 자신이었음을 고백했다.
“대체 왜?”
“힘을 빼놓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당서악이 공포에 질리길 바랐으니까요.”
집착, 갈망, 분노, 증오…….
애정은 전부 추려낸 감정이 교룡왕의 시선에 머물렀다.
그래도 저 정도면 제정신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끝났어도 그게 끝났다는 걸 모르고 마음을 꺾어내지 못하는 인간들과 달리 교룡왕은 직접 선을 그으려 나선 거니까.
“그 남자는 당신이 원하는 걸 주지 않을 겁니다. 살아서 버티기만 하면 언젠가는 장강수로맹의 맹주가 바뀔 테니까요.”
정파와 달리 사파의 세대교체는 빠르다. 특히 사파에서 윗대가리를 차지한다는 건 그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상어 떼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형국과도 같다.
규칙이나 도의보다도 욕망이 가장 우선된다.
가뭄에 꽃 피듯 의리가 생겨나는 관계도 더러 있지만……. 척박한 땅에서는 오래 못 버티는 법이다.
“대신 그 새끼는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사천 밖으로 기어 나오지 못할 겁니다.”
교룡왕이 조소했다.
“당가주에게 약속한 대로 내 수급을 가져다 바치지도 못했고, 사천 밖으로는 나갈 수도 없으니 그 인간은 언젠가 스스로의 욕망에 쫓겨 사천을 나서게 될 겁니다. 얼핏 인내심이 커 보여도 기다리는 데 별로 재능이 없더라고요.”
“그를 잘 알고 있군요.”
“십 년은 알고 지냈을걸요?”
삼랑이 잔망스럽게도 끼어들어 대신 답했다. 연소소는 그런 삼랑에게 눈을 흘기더니 툭 내뱉었다.
“악연이지요.”
악연이라.
“일단 내게 시간을 주면 놈을 상대할 만한 방안을 생각해 오지요.”
“주군과 연이 있다고 저를 도와주시려는 겁니까?”
“아뇨. 사천 바닥에서 장사 좀 하려는데 좌판 열 때마다 보호비 명목으로 돈 뜯어 가는 깡패는 치워놓고 싶으니까요.”
예결은 어깨를 으쓱했다.
성질머리가 못돼서 그런가, 당서악 같은 놈이 어쭙잖은 속셈으로 깔짝거리는 건 딱 질색이었다. 그동안 진삼 행수를 살살 꼬여내 사천당가에 유리한 계약을 끌어내고 그 공을 날름 먹어 치운 것만 봐도 이놈은 글러 먹었다.
‘감히 대사형의 상단에 빨대를 꽂으려 하다니…….’
어떻게 해야 이놈을 살살 볶아 팝콘처럼 튀겨줄까 고민하는데 선체가 크게 흔들렸다.
“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선실의 문이 열렸다.
“교룡왕님! 무림인들이 습격하고 있습니다!”
“강 한복판으로?”
“어민들의 배를 징검다리처럼 뿌려 놓고 그걸 밟으며 건너오고 있습니다!”
“간이 큰 놈들이군. 무공은 그보다 더 대단한 것 같고.”
연소소는 배가 습격당하고 있다는 데도 심드렁했다.
“창궁비연대……!”
예결은 핼쑥해졌다.
“창궁비연대요? 어쩐지……. 남궁세가의 직계가 혼자 돌아다니더라니.”
삼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다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징검다리를 전부 가라앉혀. 그리고 배를 장강 한가운데로 몰도록. 공격은 그다음부터다.”
싹 수장시키겠다는 기개가 느껴졌다.
“예!”
“남궁세가 놈을 잡아서 쫓아올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빠르네.”
“오대세가에서 그만한 인재가 난 게 정말 백 년 만이니까요.”
연소소의 발언에 삼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답했다.
“남궁운이 그렇게 대단해?”
예결의 질문에 삼랑이 잽싸게 답했다.
“당금 무림의 일룡삼호이봉 중 가장 빼어난 후기지수로 꼽히는 이가 바로 뇌전검룡 남궁운입니다.”
“뇌전검룡…….”
“최연소의 나이로 용봉지회에서 우승하는 것으로 처음 이름을 알렸으며 숱한 협행으로 미담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요. 까닭에 무림인뿐이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도 이름이 널리 퍼진 상태입니다. 남궁세가가 전에 없이 활동 영역을 넓히는 데에는 뇌전검룡의 영향이 있다는 말도 있지요.”
정말 대사형의 후기지수 시절을 복사 붙여넣기라도 한 것 같은 이야기였다.
“남궁운이 요새 가장 유명한 후기지수라는 거군.”
무림에 수십 년 만에 돌아왔더니 요새 핫한 신인은 누가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저 예전에 후기지수였던 이들이 천하십대고수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십 년 전에 히트송을 낸 아이돌 이름은 다 기억해도 요새 누가 유명하냐고 물으면 아는 게 없는 사람이 된 셈이다.
“예전엔 삼룡삼호사봉이었는데.”
이렇게 말하니까 무슨 혼성 그룹 같았다.
구파일방의 남자 후기지수 셋과 오대세가의 남자 후기지수 셋이 삼룡삼호였고, 사봉은 중원의 여자 후기지수 중 제일 빼어난 넷을 뜻했다.
“근데 남궁운이 용이야? 용은 원래 구파일방 쪽 후기지수 호칭 아니었나?”
“뛰는 호랑이 위에 나는 용 있다는 뜻으로 쓰여서요.”
“요샌 또 유행이 그런가 보네…….”
환생 때문에 세대교체 당한 예결은 중원 트렌드 따라가기 참 벅차다는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 때는 이름을 날린 후기지수가 열 명이나 됐는데 지금은 고작 여섯 명이라니. 무림에 그렇게 인재가 없나?”
예결도 본인이 꼰대처럼 말하고 있다는 걸 느꼈으나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과장 좀 보태면 반토막 난 수준 아닌가.
“영웅은 난세에 나니까요.”
그리 답한 삼랑의 표정이 뭐라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묘했다. 예결은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곤륜혈사가 일어나기 전부터, 중원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알력 다툼에 여념이 없었다. 가뭄과 홍수가 연이어 일어나는 통에 굶주린 백성들이 도적으로 돌변하는 일도 허다했고 그 까닭에 사파의 세력이 전에 없이 팽창하고 있기도 했다. 와중에 마교가 다시 발호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으니…….
“일단 당서악을 좀 끌어내렸으면 하는데.”
삼랑에게 한 말이었으나 연소소가 답했다.
“사천당가의 체면이 있으니 그를 쉽게 내주진 않을 겁니다. 저는 장강을 떠날 수 없으니 놈은 그것만 믿고 버티는 거지요.”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교룡왕의 힘이 최대로 발휘되는 곳 역시 장강이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다면 맹주 자리를 노리는 수채의 채주들이 연소소의 기반을 갉아먹으려 들 것이다.
“사천당가에서 당서악을 버리게 해야지요.”
당서악은 확실히 머리가 좋았고 과거의 원한까지 써먹을 줄 알았으며 당언보라는 오른팔까지 내던질 정도로 과감하다.
그러나 놈의 계산에는 예결이 포함되지 않았다.
“그간 당서악이 세운 공을 무너뜨릴 정도로 큰 사건을 만드는 겁니다.”
“……그만한 일을 맨입으로 해주실 것 같진 않은데, 무얼 원하십니까?”
복수라는 달콤한 미끼에 홀린 것이 역력한데도 교룡왕은 냉철하게 예결의 의사를 확인했다. 주군의 은인이라며 정중하게 굴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장강을 건널 때 장강수로맹의 비호를 받았으면 하는군요. 통행세는 적당히 깎아주시면 됩니다.”
예결은 연소소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때요? 이 정도면 교룡왕의 후의를 살 만합니까?”
상대의 입가에 픽하는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뱃사람의 단단한 손이 예결의 손을 마주 잡았다.
“기꺼이 내드리지요.”
팔씨름이라도 하는 양손이 겹쳤다. 예결은 대충 악수하는 셈 치고 이를 흔들었다.
“그럼 승낙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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