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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48화 (48/203)

48화. 악연 (5)

“천하제일상단의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

예결은 교룡왕의 옆구리에 매달린 채 중얼거렸다. 덩치가 작은 편도 아닌데 이렇게 가볍게 들리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게 긴 교룡삭을 수족처럼 다루는 연소소의 팔 힘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그걸 이렇게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예결의 투덜거림에 옷을 갈아입고 교룡왕의 뒤에 호위처럼 버티고 선 삼랑이 키득거렸다.

“지금이라도 포기하심이?”

“내 몸 하나만 빼내면 뭐 해. 당서악 일에 휘말린 것도 억울한데 뭐 얻어가는 거라도 있어야지.”

“곧 갑판입니다.”

교룡왕이 둘의 대화를 끊어냈다. 무림인의 청력은 보통이 아니니 슬슬 입단속을 해야 할 때가 되긴 했다.

갑판 위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창궁비연대에 소속된 것처럼 보이는 푸른 옷의 무인들이 곳곳에서 수적을 상대로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래도 교룡왕이 거느린 정예라 그런지 두셋 정도의 합격으로 창궁비연대 한 명의 발목을 묶어놓는 게 보였다. 치명상을 입은 일부 수적은 뒤로 물러나 있다가 동료의 부축을 받아 갑판 아래로 이동했다.

후퇴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교룡왕의 낯에는 그리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예결은 저 수적들이 교룡선을 향해 띄운 배를 침몰시키러 간 것임을 직감했다.

“이 몸은 교룡선의 수부 왕호탁이다!”

반달 모양의 도끼를 휘두르는 장한이 창궁비연대 앞으로 몸을 날리며 외쳤다.

“누가 또 물고기 밥이 되겠느냐!”

무식한 일격이 수적과 남궁세가의 무사 모두를 배 밖으로 날려버렸다. 일개 수부를 자처한 사람치고는 왕호탁의 힘은 그야말로 장사였다.

이를 지켜보던 교룡왕이 혀를 찼다.

“저놈이 또 갑판을 다 해먹겠군.”

창궁비연대라고 해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수적을 잡아당겨 생긴 반동력으로 배에 매달리거나 일부러 그 힘에 몸을 맡기고 교룡선 가까이 대 놓은 배에 사뿐히 착지했다.

다시 배를 기어오르는 이들의 기세는 보통 매서운 게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유일한 직계가 인질로 잡혔으니 저 집념도 이해가 갔다.

인질을 어느 정도 빼돌려서인지 전투가 점점 난전으로 바뀌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땅개들은 들어라!”

연소소가 내공을 실어 내뱉은 우렁우렁한 외침에 한순간 이목이 쏠렸다.

“너희들의 소가주는 교룡선의 인질로 잡혀 있다! 지금이라도 물러간다면 보름 이내로 남궁운을 풀어주겠다!“

“이 비열한 수적의 우두머리가……!”

가장 가까이 있던 창궁비연대 중 한 명의 눈이 분노로 시퍼렇게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예결은 새삼 남궁운의 인망이 정말 좋다는 걸 느꼈다.

아무리 소가주를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진심으로 목숨을 걸 이가 이토록 많을 줄이야.

“창궁비연대는 모두 물러나라!”

갑판의 바닥을 뚫고 남궁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결은 반대편에서 마지막 인질까지 찾아내 옮기는 창궁비연대원을 발견했다.

극적인 등장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일부러 바닥을 뚫고 올라왔다는 게 느껴졌다.

“……남궁 공자?”

예결이 멍하게 입술을 달싹이자 남궁운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처음엔 교룡왕과 시선을 마주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눈이 마주쳤다.

“문 공자……!”

“으음. 한 방에 가둬둔 사이 퍽 친해진 모양이군?”

연소소는 예결에게 농을 걸어온 거였으나 남궁운은 이를 협박으로 받아들였는지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더라니……! 교룡왕이여, 당신이 문 공자를 억류하고 있었습니까?”

“돈깨나 가진 티가 나서 데려왔지. 우리 애들은 입이 많으니 몸값을 톡톡히 받아내야 다들 배불리 먹지 않겠나.”

미리 입을 맞춘 대로 교룡왕은 몸값 타령을 했다. 그녀의 단단한 손이 어깨를 감싸는 것에 맞춰 예결이 움찔 떨며 고개를 숙이자 남궁운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내 남궁 가주님을 보아 그대는 보내주도록 하지. 하지만 이 친구는 아직 나와 할 이야기가 남아서 보내줄 수 없네.”

“어찌할 텐가? 이대로 남궁 소협이 구해낸 이들을 데리고 무사히 배에서 내리겠는가? 아니면…….”

연소소는 의수로 예결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서늘한 금속의 감촉에 예결은 눈을 내리깔았다.

“여기 이 사내를 구하겠다고 설치다가 모두 함께 장강의 바닥에 가라앉겠는가?”

남궁운은 이를 악물었다.

상황이 너무 나빴다. 앞선 습격에서 그는 내공을 거의 쥐어짰고 포로로 잡힌 뒤에는 수적에게 온몸을 두들겨 맞았다. 심지어 교룡왕에게 입은 내상까지 심한데 이를 돌볼 시간조차 없이 움직였다. 그처럼 급박한 상황이었다.

한둘도 아닌 수십이나 되는 비무장 상태의 일반인을 보호해야 했으며 남궁운은 그가 이끌고 온 창궁비연대의 전력을 최대한 보존해야 한다.

심지어 여기는 교룡왕의 앞마당인 장강의 한가운데였다. 빠르게 움직이기 위함인지 교룡왕은 그녀의 숱한 배 중 교룡선 딱 한 척만을 가져왔으나 전투가 길어질수록 인근 수채에서 지원을 나올 가능성이 컸다.

설령 최상의 몸 상태라 하더라도 남궁운이 교룡왕의 상대가 되긴 어렵다.

그러나 지금 연소소의 손아귀에 잡힌 어린 청년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을 대신해 얻어맞은 탓인지 몸을 제대로 일으키지도 못하는데 교룡왕의 우악스러운 손에 이리저리 끌려다녀서인지 안색도 나빴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남궁 공자께서는 부디 몸을 조심……!”

남궁운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언제나 남을 도와주는 위치에 있었다. 사람들은 남궁운의 도움에 감사를 표했으나 그가 나서서 도적을 해치우고, 마두를 무찌르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다.

남궁세가의 소가주니까. 정파의 가장 이름 높은 후기지수니까.

때로는 그가 너무 늦어서 친인이 죽었다며 원망하는 이도 더러 있었다. 남궁운은 그들의 슬픔을 이해했기에 분노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한 부채감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기실 남궁운도 자신이 사람을 구할 때 효율을 따지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이를 구하기 위해 두엇의 목숨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검은커녕 요리할 때 쓰는 칼조차 들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이가 남궁운을 걱정하고 물러나라 말하는 것만큼은 그의 이해 밖에 존재하는 사건이었다.

애초에 무림인인 그를 왜 감쌌는지 물어볼 기회도 없었는데, 문예결은 또 남궁운에게 저를 버리고 가라 말했다.

“남궁세가에서 그의 몸값을 내겠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글쎄…….”

전에 없이 형형한 남궁운의 시선에 교룡왕은 조소했다.

“자네가 무얼 제안하든 이자의 주인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게 더 많으니 필요 없네.”

연소소가 든 교룡삭이 예결의 목덜미를 건드렸다.

“흙발로 교룡선을 밟고 내가 잡은 전리품들을 가져가는 걸 눈감아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아량을 베풀었음을 어찌 모르는가?”

문예결 하나만 포기한다면 다른 인질은 전부 놓아주겠다는 제안이 담겨 있는 발언이었다.

“새끼 용이여. 내 말을 이해했다면 물러가게. 아니면 용이라도 익사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지.”

이를 악문 남궁운이 창궁비연대에 손짓했다.

“모두 하선한다!”

“잘 생각했네. 장강수로맹이라고 해도 남궁세가와의 전면전은 피하고 싶거든.”

교룡삭 한 번 휘두르지 않고 거둔 승리에 연소소의 낯이 빛났다.

창궁비연대가 배에서 물러나자 수적들이 투덜거렸다.

“간만에 장강의 용왕님께 제사 좀 올리나 했는데, 아쉽군요.”

“아서라, 왕호탁. 네가 하도 갑판을 부숴대서 적이 아니라 아군을 제물로 바치질 않느냐?”

연소소가 코웃음 쳤다.

“사고를 하도 치는 바람에 더 내려갈 보직도 없으면서 또 갑판을 부숴 먹다니. 이젠 왕호탁 네가 교룡선의 유일한 선노가 되겠구나!”

“아이고, 선장님.”

덩치 큰 사내가 징징거렸으나 교룡왕은 비위도 좋아야 하는 자리인지 연소소의 낯은 덤덤했다.

“이제 남궁운을 보내 주었으니 되었습니까?”

“예.”

예결은 방긋 웃었다.

당서악의 계산에서 빗겨나간 존재는 예결뿐이 아니었다.

“아무리 당서악이라도 남궁운을 입막음하긴 어려우니까요.”

남궁운은 당서악에게 의구심을 품게 될 것이다. 예결에게 부채감을 지닌 만큼 최대한 빨리 척후로 나선 사천당가의 무인을 찾아내서 추궁할 테고, 당서악은 궁지에 몰리겠지.

상단을 호위하겠다고 나섰으면서 당가의 무인만을 빼돌린 것, 교룡왕이 큰 소리로 당서악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찾은 것 모두 놈의 족쇄가 되리라.

다른 누구도 아닌 남궁세가 소가주의 의심에 내몰린 당서악은 이 장강으로 오게 될 것이다. 교룡왕의 수급을 취하거나 문예결을 구해오지 않는 이상 그의 앞날은 풍전등화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정인을 배신하면서까지 얻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못 할 짓이 없는 인간이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게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면 제정신으로 있을 리가 없었다.

“교룡왕을 두 번 속일 수 없다고 여길 테니 이번에는 직접 나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사천당가에서 만들어둔 영향력을 총동원해서라도 전력을 모아 덤비겠지요. 교룡왕을 해치우지 않는 이상 남궁운의 의심을 피할 수 없으니까요.”

소곤소곤 속삭인 예결이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때 놈을 잡으면 됩니다.”

익선문하고 옥형문에 큰 타격을 주려고 벌인 일의 덩치가 계속해서 커지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뭐라 말하려던 교룡왕의 고개가 교룡선 밖을 향했다. 예결의 귀에 한 사내의 절규가 들렸다.

“불, 불이야! 불!”

저 멀리, 강기슭에서 불화살이 날아왔다.

시위에 불붙은 화살을 메길 때마다 주변이 밝아지며 활을 쏜 이들의 모습을 비췄다. 그들은 전부 흑의를 입고 있었다.

‘사천당가다.’

무림인이 잘 다루지 않는 활을 저렇게 귀신같이 쓰는데 군인이 아니라면 사천당가일 수밖에 없었다.

‘발목을 잡으려고? 아니. 아니다.’

“인질을 죽이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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