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악연 (6)
“인질을…… 아!”
삼랑은 예결의 말을 금세 이해했는지 혀를 찼다.
“일을 키우려는 모양이군요.”
“교룡왕이 배 한 척만 이끌고 나타났으니까. 우리가 교룡왕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불안하겠지…….”
사천당가를 그렇게 부르짖는 거야, 뭐. 수적을 하도 토벌하고 다닌 당가의 협객들 때문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하지만 교룡왕 본인이 나서면 당서악이라는 이름이 도마 위에 올라가게 된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상행을 위험에 처하게 만든 이가 누구인지 일목요연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야망이 큰 사내가 계속 장강을 포기할 리도 없고.”
장강수로맹이 아무리 극성이어도 이 시대 사람들이 장강을 포기하지 못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고속열차나 비행기도 없는 시대다. 무림인은 경공을 쓸 수 있다지만 내공은 무한한 게 아니며, 주로 장강을 이용하는 상인 등 다른 이들은 무공을 모르는 민간인이었다. 하물며 장강은 중원을 관통하는 가장 큰 강이다.
사천당가의 가주라면 목적지에 닷새 만에 도착할 수 있는 이와 열흘이 넘게 걸리는 이 중 전자를 더 중하게 쓸 것이다.
“내가 당서악을 얕봤네.”
예결은 혀를 찼다. 정확히는, 그를 둘러싼 환경과 은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흠. 어떻게 할까요?”
그 말에 예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했다.
“어쩌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야지.”
당서악은 분명 머리가 좋았다.
고작 한 번의 수를 놓아서 골치 아픈 경쟁자도 처리하고 당서악이 함정을 팠다는 사실을 알게 될 증인도 제거한 데다가 옛 은원까지 해치울 판을 벌이지 않았나.
장강을 범할 수 없다는 금제를 해결하는 김에 겸사겸사 본인이 이름을 날릴 싸움판까지 만들었으니, 그놈은 밥을 안 먹어도 석 달 열흘은 배가 부를 것이다.
하나 당서악의 계산에서 빗겨나간 존재는 예결뿐이 아니었다.
“아무리 당서악이라도 남궁운을 입막음하긴 어렵겠지.”
저 너머는 남궁운이 기를 쓰고 구할 거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예결 한 명을 포기한 남자다. 창궁비연대까지 이끌고 왔으니 남궁세가의 활약을 기다리면 그만이다.
“……요새 남궁세가의 힘이 좀 강한 편이긴 하죠.”
“나도 남궁세가의 직계 같은 게 상행에 합류했을 줄은 몰랐는데, 정말 당서악 그 남자, 올해 운이 참 나쁜가 봐.”
예결이 씩 웃었다. 분명 예쁘장하고 선이 고운 얼굴인데 보기에 스산함이 느껴졌다.
“그럼 저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겁니까?”
가만히 대화를 경청하던 연소소의 질문에 예결은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요. 일단 저희를 열심히 납치해서 데려가 주시고 전쟁을 대비하셔야지요.”
팽팽 노는 건 예결의 몫이지 연소소의 몫은 아니었다.
“흠.”
“당서악이 수채 한둘 정도는 포섭했을 거라고 봐요. 전.”
당서악을 겪은 시간이 길진 않았다. 그러나 사천당가와 교룡왕의 전면 대결 같은 판을 아무런 대비 없이 벌일 인간이 아니라는 걸 느끼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장강수로맹의 주인을 끌어내리는 게 그 남자의 최종 목표일 테니까요.”
“정정당당한 대결을 하는 척 비수를 숨긴 배신자를 심어놓는다, 라. 너무도 그 남자다운 짓이라 놀랍지도 않군요.”
“짐작 가는 배신자는 있습니까?”
예결의 질문에 연소소가 답했다.
“차기 맹주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야 얼마든지 있지요. 서로를 잡아먹고 또 잡아먹히는 것이야말로 사파의 생태 아니겠습니까.”
연소소가 서늘한 낯으로 웃었다. 짙은 피 냄새가 묻어나오는 미소였다.
“교룡채로 돌아간다!”
마지막 말은 내공을 담은 까닭에 갑판 위를 우렁우렁하게 울렸다. 왕호탁을 비롯한 교룡선의 수적들이 각자의 할 일을 찾아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배 위에서 예결은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 물건은 또 장물이 되겠군.”
대사형을 또 볼 수 있다는 기쁨과는 별개로 자신이 청해 상단을 맡은 이래 사천지부의 상행 두 번 모두가 도적 손에 털렸다는 건 입맛이 썼다.
“정정당당하게 돈을 벌려고 해도 세상이 안 도와주네.”
“예? 정정당당이요?”
삼랑이 슬그머니 딴죽을 걸었지만 예결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일이 무르익을 때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우리는 대추나무나 보러 가자.”
“정말 쉬지 않으시군요.”
“청해상단을 얼른 천하제일상단으로 만들어야지.”
예결과 삼랑이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에 갑판에서 수적을 지휘하던 연소소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빼어난 무림인답게 그녀의 청각에는 예결의 말이 전부 들렸기에 제 귀로 들은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청해상단을 왜 천하제일로 만들어?’
불현듯 시선이 마주친 삼랑이 오묘한 낯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혀를 찬 교룡왕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얼굴을 돌리고 부하들을 채근했다.
“어서 움직여라! 이 느림보 거북이 같은 놈들!”
***
교룡선의 갑판 너머는 아비규환이었다.
“꺄아악!”
“불이라니, 아니!”
풍덩, 풍덩, 그리고 또 풍덩.
배에 불이 옮겨붙자 당황한 사람들이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급한 마음에 물에 들어가긴 했으나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이가 대다수였다. 그들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면서 붙잡을 것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배는 대부분 시뻘건 화염에 휩싸여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장강 안쪽의 조각배에는 아직 불이 붙지 않았으나 바로 뒤에 교룡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차, 차라리…… 교룡왕의 인질이 되는 게.”
누군가가 입술을 달싹였다. 몸값을 낼 수 있을지와는 별개로 최소한 목숨은 붙어 있을 게 아닌가.
그때, 교룡선이 물살을 가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길……! 젠장!”
사람들의 눈은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도저히 퇴로가 보이지 않는다.
“조준.”
장강을 바라보는 당언보의 시선은 차가웠다.
“쏴라!”
당가의 무인들이 쏘는 화살은 마치 밤을 벼려 놓은 것처럼 검고 흉흉한 교룡선까지는 미치지 못했으나 대신 이를 둘러싼 배에 불길이 치솟았다.
어디에서 구한 배인지는 모르지만 단 한 놈도 살려 보낼 수 없었다. 그것이 당언보가 맡은 임무였으니까.
“다시!”
당언보의 말에 불화살이 어둑한 하늘을 수놓았다. 검은 선체 주변이 다시금 밝아졌다. 얼핏 불에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광경에 당언보는 뒤틀린 만족감을 느꼈다.
저 검은 배의 주인은, 가문 내에서 위치를 다지려면 공을 세우는 게 필수인데도 당서악이 사천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된 원인이었다.
‘염치도 모르는 인간 같으니라고.’
연소소는 본인이 극악무도한 장강수로맹의 맹주라는 사실을 숨긴 채 당서악과 교제했다. 당언보의 사촌 오라비는 그런 교룡왕과 혼례를 올리기 위해 본가에 허락받으러 갔다가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당시의 당서악이 얼마나 상처받았던가. 가주에게 매섭게 추궁당한 사촌 오라버니는 교룡왕을 차마 죽일 수 없어 팔을 잘라 오는 것으로 인연을 끊어냈다.
문제는 살아남은 교룡왕의 분노였다. 그녀는 장강수로맹 소속의 수채에 당서악을 보는 즉시 끌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음 약한 사촌 오라버니는 사천 땅을 벗어나길 포기했다. 그는 신뢰하는 사촌인 당언보, 즉 자신에게 모든 대외 임무를 맡기며 쓰게 웃었다.
‘소소는 내가 증오스럽겠지. 이해한다. 하지만 가주께서 나를 미끼로 그녀를 잡으려 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당서악이 당언보에게 물었다.
‘사파의 무인, 그것도 장강수로맹의 맹주와 정을 나누고 끊어내지 못하는 이런 내가 미련하게 느껴지지 않느냐?’
그럴 리가.
당언보는 언제나 당서악이 안쓰러웠다. 그녀의 사촌 오라버니는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도 직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세가의 대소사에서 한발 물러난 채 살았다. 그러다 재수가 없어 하필 교룡왕에게 정을 주었을 뿐이다.
당언보는 사파의 무인이라도 한 번 마음 준 상대를 끊어내지 못하는 당서악의 유약함조차 단점이라기보다는 장점으로 받아들였다.
‘설마 했지만 교룡왕이 직접 행차할 줄이야…….’
그리고 그건 벌써 수년이나 흐른 일이었다. 이쯤 되면 장강의 물길도 바뀔 만큼의 세월인데 교룡왕은 여전히 당서악을 잊지 않은 모양이다.
당언보는 출발하기 전, 당서악과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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