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악연 (7)
“이번 일은 엎을까요?”
당시 당언보는 익선문과 옥형문을 꼬꾸라트릴 함정을 만드는 중이었다.
‘사천당가의 실책 때문에 청해상단의 마음이 옮겨간 거라면 다른 문파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만들면 된다.’
당서악의 설득에 넘어간 그녀는 장강 일대에 당서악의 등장을 암시하는 소문을 내고 있었다. 한데 그 와중에 청해상단의 문 공자가 상행에 합류할 거라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당서악이 입을 열었다.
“글쎄. 내 생각에는 이대로 진행해도 괜찮을 것 같구나.”
독을 다루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올리는 당서악은 그저 청수한 문인처럼 보였다.
“어째서입니까?”
“청해상단주가 위험에 처했다가 당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분명 큰 호의를 가지지 않겠느냐.”
사실, 당서악은 문예결이 그 사고에 휘말려 목숨을 잃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신임 상단주인지라 내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말을 믿기는 했다. 하지만 하필 문예결의 등장과 함께 진삼 행수가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게 마음에 걸렸다.
처음엔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진 행수는 승진해서 청해로 갔다고 한들 사천에서 누리던 모든 걸 쉽게 포기할 인간이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당서악에게 여지를 남겼으리라. 지금은 청해로 가지만 언젠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사천으로 돌아오겠다는…….
그러나 진삼은 완전히 연락을 끊어버렸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당서악이 진삼에게 품은 의혹에 답해줄 사람은 문예결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지나치게 편리하지…….’
당서악 그 자신이라도 필요 없는 이를 그런 식으로 치워 버렸으리라.
한번 의심이 들고 나니 모든 게 수상했다. 온갖 나쁜 짓을 획책하며 살아온 만큼, 당서악은 조심스럽고 의심이 많았다.
순순한 태도로 나오던 문예결을 한 번쯤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교룡왕이 어찌 나올지 모르겠다만, 분명 수적을 동원해 상행의 발목을 잡으려 할 것이다. 내게 원한을 품었으니 이 당 모가 나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망치려 들 테니까.”
당서악은 연약한 척 눈을 내리깔았다.
“적당한 규모의 수로맹 소속 수채가 등장할지도 모르지. 너희는 상행의 본대에 사천당가의 깃발을 빌려주고 앞서 빠져나와 옷을 갈아입어라. 그리고 지켜보다가…….”
그는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속삭였다.
“교룡왕 본인이 나타난다면 탈출하려는 이들을 전부 죽이도록.”
한낱 춘정이 너무 오랫동안 그의 발목을 잡았다. 당서악은 이번이 연소소를 제 인생에서 털어낼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다.
“오라버니.”
당언보가 걱정 가득한 낯으로 물었다.
“만약 교룡왕 연소소를 만나게 된다면 함정에 대한 것도 알려질 거다.”
당서악은 체념 어린 투로 속삭였다.
“더는 내 개인의 일로 사천당가에 누를 끼칠 수는 없지……. 교룡왕의 일로 또 문제가 생긴다면 가주님의 인내심도 바닥이 날 테고 말이야.”
은근슬쩍 입술을 깨문 그는 당언보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말했다.
“그럼 지금까지 나를 믿고 손을 더럽혀온 너도 밀려나지 않겠느냐.”
그 말에 당언보의 눈에 감동이 일렁였다.
당서악이 그토록 원한 가문보다도 일개 수하에 지나지 않는 자신에게 마음을 써 주는 것이 너무도 고마웠다.
그는 당언보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감수했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당언보의 도박은 틀리지 않았다.
“오라버니…….”
다들 착각하고 있지만 당서악의 가장 뛰어난 재주는 용독술이나 협상술 같은 게 아니었다.
당서악의 가장 큰 힘은 바로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감언이설이다.
“목격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교룡선을 침몰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어쩔 도리 없이 희생자가 생겨난 거라고 말하렴. 이쪽은 사천당가의 공격대 하나뿐이지만 저쪽은 교룡왕이 버티고 있으니……. 다들 이해해줄 거다.”
당서악의 계획은 참으로 간단했다.
척후로 앞서갔던 사천당가가 이변을 알아채고 돌아와 상행을 구해낸다.
단, 그 과정에서 생기는 희생자까지는 어쩔 수 없다.
본대를 지키고 있던 익선문과 옥형문은 이 실책 때문에 다시는 청해상단의 호위로 나설 수 없게 될 것이고 무려 교룡왕을 상대로 항전한 사천당가의 이름값만 올라가리라.
“사람들이 많이 죽으면 이번 일을 계기로 장강의 수적들과 정면 대결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현장을 꾸미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다만 당언보는 일이 지나치게 커져서 자신이나 사촌 오라버니의 손아귀를 벗어날까, 그게 걱정이었다.
“만약 네가 계획대로 일을 키운다면 당가주께서 직접 나서시게 될 거다.”
강호는 너무도 오랜 시간 동안 평화로웠다.
사천당가는 그간 쌓인 힘을 밖으로 내돌리지 못해 근질거리는 상태였다. 언제나 가주의 눈치를 살피느라 혈안이 되어 있는 당서악은 이를 빠르게 알아챘다.
물꼬만 튼다면 가주는 그를 질책하는 대신 당가의 저력을 외부에 내보이는 일에 집중하리라.
“청해상단주가 휘말리면 그를 구합니까?”
당언보는 사촌 오라비가 웃으며 대접한 어린 상단주를 떠올렸다.
상행과 호위, 그리고 그 스스로의 안전까지 전부 내맡긴 소년은 이 계획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리라.
고작 몇 번 본 얼굴에 정이 든 건 아니었다. 다만, 당언보는 제 등을 떠밀어줄 확실한 명령이 필요했다.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다.”
당서악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어차피 바뀐 상단주, 한 번 더 바뀐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
***
익선문과 옥형문의 무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인질을 구해내고 있었지만 당언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교룡선 내부에서 탈출한 게 아니라 외부에서 배를 가져온 걸 보면 다들 도망쳤다가 돌아왔다는 소리지.’
당언보는 창궁비연대의 존재를 몰랐다. 한데 갑자기 나타난 무림인 여럿이 인질을 구해내고 있으니 당언보에게 그들은 익선문도와 옥형문도일 수밖에 없었다.
교룡선은 물론이고 상단 측에 발각되지 않기 위해 상당한 거리를 벌리고 이동했기에, 당언보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잘 몰랐던 것이다.
그저 당서악이 예견한 대로 수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지켜봤고, 설마 했던 교룡왕의 행차에 미리 계획한 대로 인질을 해치웠을 뿐이다.
‘당가는 바뀌어야 한다.’
사천이라는 땅덩어리 내에서 성도에 뿌리를 내린 사천당가는 고이고 또 썩어버린 물이었다. 직계가 아닌 방계에게는 위로 올라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직계가 그토록 승승장구하며 누릴 수 있는 배경에는 물심양면으로 가문을 위해 몸을 바치는 방계의 노고가 존재했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 누구도.
가문에 대한 헌신은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폐쇄적이기 짝이 없는 가문 내에서,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도 남의 주춧돌이나 하다가 평생을 소모해 버리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무공을 더 깊이 연마하고 싶어도 고급 독은 전부 직계의 수중에만 들어간다. 좋은 철로 만든 암기도 직계에게 최우선으로 분배되며 방계는 그들이 쓰고 남은 찌꺼기나 얻게 될 뿐이다.
당언보는 고작 상인을 택한 어머니 때문에 자신도 그런 신세로 밀려났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당가는 제 혈육을 집어삼키며 덩치를 불려온 괴물이다. 내가 어떻게 빠져나왔는데 네가 그 짐승의 아가리로 기어들어 간단 말이냐!’
딸이 어미를 이해하지 못하듯, 당언보의 모친 역시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을 낳은 이가 겁쟁이였다는 이유로 자신이 위를 꿈꿀 수 없게 되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때, 당언보는 당서악을 만났다. 교룡왕의 팔을 잘라 와 가주의 인정을 받고, 방계 중에는 이례적으로 가문의 중책을 맡아 당가타에서 성도의 본가로 불려갔다.
당서악은 자신과 같은 방계를 기용하려고 애썼으며 가주의 눈에 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당언보는 그런 사촌 오라비를 보고 일종의 영감을 받았다.
‘방계라 해도 뭔가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어머니는 추하고 두렵다며 멀리한 당언보의 욕구를 당서악만은 알아줬다. 왜 그녀가 갈증을 느끼고 허기를 느끼는지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당서악의 욕망을 귀하게 여겼다. 사촌 오라버니라면 이 아귀다툼의 승자가 되어 사천당가의 역사에 새 장을 열어 주리라는 믿음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이제 그 믿음이 보답받을 때가 되었다.
평소 무뚝뚝한 당언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장강 위에 너울거리는 불꽃의 붉은색이 그녀의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그때였다.
교룡선에서 한 사내가 표홀히 등장했다.
그가 입은 흰옷은 여기저기 구겨지고 피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사내가 겪었을 치열한 혈투를 짐작게 할 뿐, 마치 젊은 신선과도 같은 그의 풍모를 더럽히지 못했다.
당언보의 눈이 가늘어졌다. 불길함에 가슴이 졸아들었다.
당금 이 무림에 저만한 의기를 품은 후기지수는 손에 꼽혔다.
아니나 다를까.
“창궁비연대는 소가주의 명을 받들라!”
내공이 담겨 있는 그 외침은 사람들의 비명을 내리눌렀다.
남궁운의 등장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궁운을 향해 눈먼 화살 하나가 날아갔다.
대주의 부축을 받고 있긴 했으나 남궁운은 자유로운 반대편 손을 뻗어 불화살을 잡아 부러뜨렸다. 화상이나 관통상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그 과감한 행보에 사람들의 아우성이 한순간 잠잠해졌다.
“창궁비연대의 일 조는 배를 장강의 중심으로 모으고 이 조는 사람들을 구조하라! 삼 조는 배의 외곽을 둘러싸고 불화살을 막는다!”
“존명!”
불꽃을 너울처럼 두른 채로도 타오르지 않는 사내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에 큰 파문을 그려냈다.
이는 당언보도 마찬가지였다.
“……뇌전검룡 남궁운.”
으득 깨문 당언보의 입술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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