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51화 (51/203)

51화. 괴호 (1)

머리가 반은 검고 반은 하얀 사내가 길가에 주저앉아 있었다. 굵은 검미하며 한 번 부러졌던 티가 나는 매부리코가 강렬한 인상을 만들었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짐승 같아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나무 그늘도 아닌 곳에서 햇볕에 눈살을 찌푸린 채 무언가를 으적으적 씹어먹던 남자는 순간 멈칫하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돌연 허공을 향해 킁킁대던 사내는 입에 든 것을 퉤 하고 뱉어냈다. 잇자국이 남은 복숭아 씨앗이 바닥에 떨어졌다.

“음. 탄 냄새.”

코를 몇 번 벌름거린 남자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설렁설렁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인가?”

***

“이게 다 대추나무라고?”

예결은 삼랑이 안내해준 산에 올라 감탄했다. 대추나무가 제법 많이 심어져 있었다.

“예전에 근방의 성주가 대추를 좋아해서 많이 심어두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병을 얻어 요양하러 가게 되면서 이 부지를 처분했습니다.”

“대사형이 걱정이네…….”

“갑자기 주군을 걱정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삼랑처럼 유능한 수하를 나한테 붙여주면 평소 하던 일이 너무 많아지지 않을까?”

삼랑은 순간 예결이 자신에게 사탕발림을 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시름에 잠긴 예결의 낯은 너무도 진심 그 자체였다.

‘진영의 안목도 한물갔군.’

그녀는 내심 혀를 찼다.

“왜? 내가 삼랑한테 아부하는 줄 알았어?”

예결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삼랑은 기가 막혔다. 태어나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얄미운 남동생 같다.

덩달아 삐죽 솟아오른 장난기에 그녀는 불쑥 입을 열었다.

“제가 빠져도 주군께 별일은 없을 겁니다.”

“왜에?”

예결이 말꼬리를 늘여 빼며 묻자 삼랑은 방긋 웃었다.

“제 업무가 너무 은밀한 나머지 제가 빠져도 아무도 빈자리를 모르거든요.”

그 말을 들은 예결은 기가 막혔다.

‘내가 대사형과 교제하는 사이인데 너무 은밀하게 사귀는 나머지 당사자인 대사형도 몰라!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그래그래. 나한테 알려주기 싫으면 됐어.”

“진짠데.”

예결이 한숨을 푹 내쉰 채 돌아섰다.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삼랑의 미소는 얄궂기만 했다.

“자. 뱀뱀아.”

예결은 오른손을 앞으로 들어 올렸다. 내도록 그의 손목을 감고 있던 금빛 뱀이 쓰윽 고개를 내밀었다. 예결이 턱을 쓸어주자 뱀뱀이는 골골거리는 고양이처럼 고개를 뒤로 젖혔다.

“네가 활약할 때가 왔다.”

예결이 힘을 끌어 올리는 걸 감지하기라도 한 건지 뱀뱀이의 비늘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대추나무 앞으로 성큼 다가선 예결은 나무를 가만히 바라봤다.

본격적으로 힘을 쓰는 건 이번이 네 번째다. 잘못해서 힘이 통제를 벗어나면 산 전체를 태워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쩐지 겁이 나진 않았다.

“혹시 모르니 삼랑은 뒤로 물러나 있는 게 좋겠어.”

돌아본 예결의 눈에 짐승과도 같은 금빛이 어른어른했다.

삼랑은 숨을 삼켰다.

산채를 태울 때 어렴풋이 목격한 바로 그 금빛이다. 그때 본 것이 착각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예결의 눈에 맴도는 금빛의 기류는 선명했다.

‘영물의 영향인가? 아니면 실종된 20년 동안 있었을 불미스러운 일의 여파?’

삼랑의 머리는 팽팽 돌아갔다.

“힘내십시오.”

예결은 삼랑이 멀어진 뒤에도 눈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사람 크기의 희끄무레한 빛 같은 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빛은 집중할 때, 특히 힘을 끌어올릴 때면 좀 더 선명해졌다.

예결은 그게 사파의 고수를 만질 때 느꼈던 생체전기 신호일 거라 판단했다.

귀식대법을 쓴 음혼귀마조차 생체전기를 숨기진 못했다. 이걸 ‘보는’ 방법을 좀 더 훈련한다면 은잠술을 사용한 무림고수라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일단 삼랑처럼 습관적으로 기척 죽이는 무림인 대상으로 몇 번 더 확인해 보자.’

호위가 완전히 물러난 걸 확인한 후에야 예결은 나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한 번에 나무 하나만.

힘을 어느 정도 끌어올지, 또 면적은 얼마나 설정해야 할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지만 예결은 그저 ‘할 수 있었다’.

“끝내주는 벽조목을 만들어서 중원삼대상단이 되어보자고!”

다소 세속적인 외침과 함께 예결은 눈을 떴다. 그의 눈이 완연한 금색이 되어 번쩍이는 순간, 청명하고 푸른 하늘 아래 노란 번개가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오…….”

삼랑의 음성이 들렸다. 예결은 그게 감탄인지 탄식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숯이 되어버린 대추나무가 예결의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

본디 대추나무의 그림자였던 것이 기어올라 몸통을 집어삼킨 듯 검고 어둡다.

슬쩍 다가간 삼랑이 툭 하고 건드리자 검은 나무는 폭삭 주저앉았다.

하얗게 불태웠다.

예결은 민망스러움에 턱을 긁적였다.

“어디 보자……. 힘을 너무 많이 썼나?”

삼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예결은 뻔뻔하게도 뱀뱀이의 콧잔등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힘을 덜 써야지. 너무 강하게 번개를 내리치니까 다 타버렸잖아.”

타박이라기보다는 장난스레 놀아주는 것에 가까웠다.

지나치게 기합이 들어가 실수한 게 본인이라는 걸 잘 아는 예결과 주인이 흘려보낸 전류를 싹싹 긁어먹어서 기분이 좋아진 뱀뱀이는 참으로 알콩달콩했다.

“이런. 아쉽네요.”

삼랑이 히죽 웃었다. 예결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다음엔 성공할 거야.”

“아무렴요.”

“무려 중원삼대상단으로 가는 길인데 어느 정도 시행착오도 있을 수밖에!”

“방금은 한 번에 해치워버릴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리고 이미 중원삼대상단이야.’

삼랑은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뱀뱀이를 소중하게 끌어안은 예결은 두 번째 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어찌 두 번째 술에 배부르랴.

“아.”

예결은 탄식했다.

이번에는 나무의 겉이 회색으로 변하고 속은 용암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이건 또 너무 약한 거 같고…….”

“오. 괜찮아요. 아직 106그루가 남아있으니까요. 비록 108그루에서 106그루가 됐지만 말이에요.”

삼랑이 신나서 놀려대자 예결은 떨떠름한 낯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그는 왼손으로 뱀뱀이의 머리를 가리며 말했다.

“뱀뱀아. 듣지 마. 뱀뱀이가 좀 실수할 수도 있지. 그걸 놀려먹는 삼랑이 나쁜 거지. 다음에 삼랑이 어디 같이 가자고 하면 절대로 따라가면 안 된다? 알았지? 도와달라고 해도 도와주면 안 돼?”

그 말에 삼랑의 낯이 해쓱해졌다.

아무리 영물이라도 어찌 사람 말을 알아듣겠나, 같은 낙관적인 생각을 하기엔 삼랑은 뱀뱀이와 예결의 특별한 교감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때마침 뱀뱀이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듯 움직였다.

십수 년간 목숨을 붙여주었던 본능이 삼랑의 등을 떠밀었다.

“문 공자님 힘내세요! 중원삼대상단으로 가는 길 멀고도 험하다! 하지만 문 공자님은 천재니까 할 수 있다!”

삼랑이 주먹을 쥐고 휘두르며 계속해서 응원했다.

“우리 뱀뱀이도 할 수 있다! 우리 뱀뱀이가 중원에서 가장 빛나는 뱀, 아니 영물이다!”

“진짜 속 보인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예결은 다시 대추나무를 향해 돌아섰다. 삼랑의 말마따나, 아직 대추나무는 많이 남아있었다.

될 때까지 실험해보는 수밖에.

“성공!”

예결은 상큼한 얼굴로 외쳤다. 그의 눈앞에는 벼락 맞은 대추나무가 서 있었다.

삼랑이 샘플로 가져온 벽조목 토막을 참고로 해서 골고루 구워냈다.

있는 힘껏 가진 걸 다 쏟아내는 건 익숙해도 힘을 균일하게 조정하는 건 어려워 고생했지만 이젠 어느 정도 숙달이 되었다.

“제대로 된 거 같아.”

벽조목을 만지며 중얼거리자 아까부터 뇌전을 쓰는 척 멋진 연기를 보여준 뱀뱀이가 예결의 손목을 휘감은 채 덩실덩실 춤을 췄다.

얼핏 그냥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예결은 뱀뱀이가 제법 신난 상태라는 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되기까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면서 지나치게 방출된 힘은 전부 뱀뱀이가 흡수했기 때문이다.

환경 파괴도 최소로 줄이고 뱀뱀이도 배불리 먹이고 기의 흐름을 통제해 삼랑의 이목까지 속였으니 일석삼조였다.

“어릴 적에도 안 한 불장난을 이렇게 할 줄이야.”

삼랑이 지친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곁에는 물이 담겨 있던 동이가 몇 개나 널려 있었다.

벼락 맞은 나무가 불에 타오르고 그게 옆으로 번지려고 할 때마다 삼랑은 잽싸게 물을 끼얹는 역할이었다.

처음에는 가져다 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나중에는 경공까지 사용해서 물을 날라야 했다.

“중간에…… 아니다.”

만약 중간에 남궁운이라는 가이드를 만나지 않았다면 힘이 부족해졌을지도 모른다.

“남궁세가는 일을 잘 처리하고 있으려나?”

“아직 전투가 이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가장 최근 소식으론, 척후조로 나선 사천당가의 무인을 교룡선이 싹 잡아들였다고 합니다. 당가 측은 상행이 교룡선에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을 알아채고 돌아오는 길에 얼굴을 가린 무림인이 인질을 교룡선에서 배로 옮기는 걸 보고 그들을 저지하고 발목을 묶기 위해 불화살을 썼다는군요.”

“개싸움이 됐겠네.”

“사천당가주가 직접 나서서 화살을 장강수로맹으로 돌렸다고 합니다.”

“남궁세가는 당가의 그 결정을 또 받아들였고?”

“예. 다만 뇌전검룡 남궁운이 아직 붙잡혀 있는 인질이 있다고 하며 적극적으로 구출 작전을 추진 중이라더군요.”

뱀뱀이의 이마를 문질문질하던 예결은 멈칫했다.

“……그 인질이 혹시 나인가?”

“네.”

만약의 경우 뱀뱀이를 빼돌려도 눈감아줄 정도의 친분을 쌓으려고 잘 대해주긴 했지만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다.

“남궁세가 소가주라면서 사람을 잘 믿나 보네…….”

예결의 중얼거림에 삼랑은 어이가 없어졌다.

“남궁 공자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어떻게 하면 뇌전검룡이 순진한 협객으로 볼 수 있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내 말 좀 들어봐. 어지간한 후기지수는 다 싹수가 노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궁운은 의협심이 있더라고. 처음 만난 사이나 다름없는데 나를 안심시키겠다고 멀쩡한 척을 하는 거야. 심지어 몸도 온전치 않은데 창궁비연대가 다른 인질을 구출하는 동안 시선 분산시키는 노릇을 하고 있었지…….”

혀를 차면서도 예결의 낯에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그런 걸 보니까 곤륜파 시절의 대사형 생각이 났어.”

“아, 그러니까…… 뇌전검룡이 예전의 주군처럼 느껴지신다는 거군요.”

“그렇지. 후기지수 시절의 대사형은 협객의 귀감 그 자체였으니까.”

예결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