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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52화 (52/203)

52화. 괴호 (2)

삼랑은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 되어 입을 꾹 다물었다.

주군을 두고 저런 발언이라니, 차라리 뇌전검룡이 순진하다고 믿는 편이 나았다.

가끔 보면 문예결은 놀라우리만치 과감한 구석이 있었다. 본디 곤륜파 출신이라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삼랑이 접한 문예결은 선량하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그보다 좀 더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선’을 넘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불길에 휩싸인 채 오도 가도 못 하고 허우적거리던 인질이 전원 창궁비연대의 보호를 받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 예결은 장강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평소에는 사파의 무인 같은데…….’

본인의 상행을 습격해 장물로 팔아치우고, 녹림도를 잡아 와 수하로 부리고, 벽조목을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내자는 발상까지 아무렇지 않게 떠올린다.

진영이 말한 것처럼 의심스러운 구석이 한가득한데 그걸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외려 그 당당한 태도 때문에 믿음이 갔다.

‘그 녀석 앞에서 이런 말을 하면 덜떨어진 살수 취급이나 당할 테지만.’

삼랑은 코끝을 찡그렸다.

“곤륜파에서 대사형을 파문해버릴 줄이야. 그래서 더는 무림인으로 살 수 없어 상인이 되신 거겠지.”

예결은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파문이라 함은 그 문파에서 배운 모든 것을 써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단전을 폐하는 건 기본이고 폐쇄적인 문파에서는 사지근맥을 잘라 버리기도 한다.

무림인은커녕 일상생활까지 어려운 처지로 전락하는 것이다.

‘곤륜이 도가문파라 근맥까지 손대진 않아서 다행이지.’

심지어 파문당한 후에도 평생 감시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만약 문파에서 배운 무공을 다른 이에게 유출했다는 정황이 포착되면 추적대가 편성되어 목숨을 취하러 온다.

결국 파문당한 이들의 말로는 비슷비슷할 수밖에 없다.

자살하거나, 살해당하거나.

“어쩌면 곤륜파에서 무림맹주를 배출했을지도 모르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말만 안타깝다고 했을 뿐, 예결의 음성에는 냉소가 서려 있었다.

아직도 대사형이 곤륜의 도복을 벗게 된 이유가 무언지 모른다는 게 갑갑했다.

“무림맹주요?”

찰나 동안 삼랑의 낯이 복잡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예결이 돌아볼 땐 삼랑의 얼굴은 이미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그래서 말인데, 대사형 어디 아픈 곳은 없으셔?”

예결은 눈을 빛냈다.

자신이 죽고 스무 해나 지나서인지 제하량을 아무리 살펴도 눈에 띄는 후유증을 발견하지 못했다.

곤륜의 심법으로 쌓아 올린 내공을 전부 잃었을 텐데도 강건한 대사형을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그가 겪었을 고통을 하나도 모르는 것이 괴롭다.

예결은 제하량의 전부를 알고 싶었다.

“글쎄요.”

삼랑은 모호한 답을 내놨다. 예결은 그녀의 표정을 샅샅이 훑었으나 뾰족한 답은 얻어낼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지.’

아쉬움을 삼키며 예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조목 실험도 끝났겠다, 이젠 슬슬 돌아가야 할 때였다.

그러나 예결은 채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불청객이 나타났다.

“이봐, 꼬마.”

머리의 반은 희고, 반은 검은 남자가 껄렁하게 선 채 예결에게 물었다.

“누가 여기에서 불장난을 했지?”

***

기인이다!

상대를 보는 순간 그가 강력한 고수라는 걸 직감한 예결은 시치미를 떼기로 마음먹었다.

“불장난 말입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심지어 이건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가 사용한 건 불이 아니라 번개였으니까.

“어쩌면 여기 벼락이 친 것 때문에 그리 오인하셨을지도 모르겠군요.”

손짓으로 방금 막 만들어낸 따끈따끈한 벽조목을 가리키자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데…… 분명히 냄새가 났는데.”

남자는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반은 검고 반은 하얀 그 특징적인 머리카락을 알아본 삼랑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 괴호 팽문형 대협이십니까?”

팽문형이라는 이름에 예결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이름을 전생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대사형과 함께 언급되던 후기지수 중 한 명이었다.

도법으로 유명한 하북팽가에서 권법을 택한 괴짜 소리를 듣긴 했지만 별호에 붙을 정도는 아니었다.

‘분명 그때 별호는 하북권호였던 거 같은데…….’

지난 이십 년간 무얼 하며 살았기에 정파 출신, 그것도 하북팽가의 직계가 어쩌다가 괴호 같은 무림명을 얻게 되었단 말인가?

“하북팽가의 영웅께서 어찌 이런 곳까지 걸음 하셨는지요?”

“불 냄새가 나서 다친 사람이 있으면 의원에게 데려다주려고 했지. 내 오해였다니 다행이지만…… 여기에서 탄 냄새가 진동하는군.”

킁, 하고 코를 씰룩거린 남자가 눈을 도르륵 굴렸다.

정신 사납게 이리저리 둘러보던 시선이 다시금 예결에게로 와 꽂혔다.

“그나저나 이쪽은 어쩐지 낯이 익구만? 내 아는 얼굴인 걸 보니 뉘 집 자제인가?”

삼랑이 나서기도 전에 예결이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한미한 세가 출신이라 말해도 모르실 겁니다.”

“끙……. 중원이 너무 넓은 탓이니 이해해 주었으면 하네.”

덩치가 크긴 했으나 말하는 걸 듣고 있자니 어린아이처럼 단순했다.

“이제부터 산에서 내려갈 생각인데 괜찮으시다면 대협과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삼랑이 무슨 생각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예결은 그녀를 못 본 척 팽문형에게 시선을 줬다.

잠시 고민하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사연이 있어도 돈은 빌려줄 수 없고 이름도 빌려주지 않을 걸세. 식사 정도는 같이 해도 되지만 제삼자가 시비를 걸어도 내게 직접 해가 되지 않는 이상 나서지도 않을 거고. 이래도 괜찮다면 동행하지.”

달달 외운 양 흘러나오는 말에 예결은 착잡해졌다.

‘얼마나 데였으면…….’

길을 물어보려고 말을 걸었더니 방문판매 및 종교 권유 사절이라고 답하는 사람을 본 기분이었다.

“저는 남에게 돈 빌릴 일 없고 이름 빌릴 생각도 없습니다. 식사는 제가 감사의 의미로 사드리고 싶고 누가 시비를 걸 때를 대비해서 호위도 데리고 다닙니다. 제가 대협께 동행을 청한 건 요새 무림 돌아가는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입니다.”

“오? 그런가?”

“예. 저는 상인이라 강호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궁금하거든요. 원하신다면 고급 요릿집에 가서 고기 요리에 좋은 술을 대접해 드리지요.”

“거참. 대화 상대 찾던 이에게 내가 너무했구만. 부디 이해해주게. 내 아우님이 한 번만 더 불쌍한 사람 돕겠다고 가문을 팔면 호적에서 아주 파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놨거든.”

하하하고 호탕하게 웃는 팽문형을 보자니 그 동생이 왜 으름장을 놓았는지 알 거 같았다.

“그거참, 훌륭한 아우님을 두셨군요.”

삼랑은 예결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주군은 예결이 무얼 하든 안전이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내버려두라 하였으니 그녀가 나설 이유는 없었다.

“그럼 가세.”

솥뚜껑만 한 손을 휘적휘적 흔들던 팽문형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내 소협의 이름을 못 들은 것 같군.”

“청해에서 작게 장사하는 제하량이라고 합니다.”

예결은 방긋 웃었다. 오래전의 사형을 떠올리며 그려낸 반듯한 미소였다.

삼랑은 툭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 눈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노려봤다.

‘문 공자 놈, 아니 문 공자는 미친 건가?’

“……좋은 이름이군.”

한참이나 침묵하던 괴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럼 제 소협. 어서 내려가세나. 산 어딘가에 불이 났을지도 모르니 빨리 움직여야지.”

괴호 팽문형은 그야말로 호랑이처럼 날렵하게 움직였다.

분주해 보이는 등은 무언가로부터 달아나는 사람 같기도 했다. 그러나 중간중간 고개를 돌려 예결을 확인했다.

“잘 따라오는군.”

괴호의 말에 예결은 흐르지도 않은 땀방울을 닦아내는 척 손을 움직였다.

“대협을 따라잡으려니 힘들군요. 역시 무림인은 대단합니다.”

“이런, 내가 너무 빨리 움직였나 보군. 자네는 무공을 배운 적이 없는 건가?”

예결이 힘없는 티를 조금 냈다고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서 부모님이 저를 곤륜산으로 보내셨습니다. 덕이 높은 도사님들 사이에서 양생술이라도 얻어 배우라는 뜻이셨지요. 하지만 문턱만 밟고 돌아왔습니다. 입문하기엔 재능이 턱없이 부족하다더군요.”

“곤륜파라, 곤륜파…….”

그 단어를 몇 번 읊조린 팽문형이 쓰게 웃었다. 아마도 괴호의 생에 손꼽힐 정도로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오래전에 내가 아는 영웅도 곤륜파 출신이었지.”

요즘 무림인은 수십 년 전 이름을 날린 후기지수를 까맣게 잊었을 테지만 팽문형은 제하량을 똑똑히 기억하는 눈치였다.

‘표정을 하나도 못 감추네.’

옛 향수에 젖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다.

이런저런 미끼를 뿌리고 팽문형을 관찰하던 예결은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산에서 내려가면 팽문형에게 술을 잔뜩 먹일 작정이었다.

산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엔 요릿집은 없고 객잔이 하나 있었다. 음식이 나쁘지 않은지 벌써 동네 주민이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는 게 보였다.

“일단 방에 짐을 풀고 오겠습니다. 대협께서는 먼저 한잔 기울이고 계십시오.”

“내 기다리지.”

괴호가 자리에 앉는 모습까지 확인한 예결은 삼랑을 이끌고 방으로 향했다. 내내 침묵하던 그녀는 단둘이 되자마자 내공으로 검막을 만들어냈다.

보통은 적의 공격을 막는 데 사용되지만 소리가 외부로 흘러나가는 걸 막는 데 쓰이기도 했다.

“많이 긴장했어?”

“예. 초면의 무림인에게 함부로 다가가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깊은 산중을 돌아다니는 고수가 항상 선한 이라고 장담하기도 어렵고요.”

“걱정 안 해도 돼.”

“그나저나, 주군의 이름을 대실 줄 몰랐습니다.”

“문예결은 장강에 있어야 하잖아. 둘러대기 마땅한 신분 같은 게 없다 보니…… 대사형의 이름을 댔어.”

삼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예결의 선택지에는 제하량이 아니라 진삼도 있었다. 그녀는 이를 잘 알았다.

그렇다면 예결에게 제하량의 이름을 거론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거다.

아니나 다를까, 예결이 이실직고했다.

“사실 나, 저 남자를 알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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